photo1 해방이 되자 미군이 왔습니다/미군이 오고, 군인이 오고/지원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오고/모두 무기를 들었습니다/어머니, 나는 죽음이 두려웠습니다/나는 산에 숨었다 잡히어 빨갱이가 되었습니다/나는 빨갱이가 아니라 하였습니다/빨갱이가 아니라면 산에서 잡혀온 다른 빨갱이를 이 죽창으로 죽이라 하엿습니다/눈 감고 “살려줍서, 살려줍서” 하며 반은 미쳐 내 이웃을 향하여 죽창을 들고 찔렀습니다/피 묻은 죽창을 들고 내가 미쳐서 소리지를 때/희미한 여명 속에 “겨누어 총! 쏘아!” 하는 소리가 반복되고/사람들은 허망하게 쓰러져 있었습니다/모두 구덩이에 처박아 휘발유를 뿌려!/어머니, 그 시국에 우리는, 제주 땅에 태어난 죄로 허망하게 쓰러져야 했습니다 (‘살의 노래, 피의 노래, 뼈의 노래’ 중에서 -문무병)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사건이 있다. 그럼에도 사건발생 50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2000년에 이르러서야 제주 4.3 특별법(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됐다. 그때부터 비로소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진행됐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하면서 55년 만에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연 제주도민들의 한은 풀린 것인가. photo2 지난 4월 2일 ‘평화의 섬’ 제주에서는 4.3 57주기를 맞아 추모 전야제가 열렸다. 일종의 축제인 전야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감히 손댈 수 없는 한의 실타래였던 제주가 이제 조금씩 그 실을 스스로 풀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성항공의 취항으로 5만원이면 제주에 발을 디딜 수 있지만 당시 나에게 비행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인천에서 제주로 출항하는 오하마나호의 3등 칸은 나들이 떠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만원이었다. 통닭에 소주를 곁들여 수다보따리를 풀어놓는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이 놀다갈 그 땅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피와 한으로 얼룩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귀향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으로 사는 게 팍팍한 때였다. 이와 함께 극심한 흉년, 일제 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 행위는 광복에 대한 제주민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려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월 1일에 발생한 발포는 민심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3.1사건은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이는 한국에서 유례없는 관공서, 민관기업 등 제주도 전체 직장 95%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미군정은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 사람으로 교체하고 응원경찰과 서청(서북청년단)단원 등을 대거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2500 여명이 구금됐고 계속되는 고문치사사건과 우익의 테러는 제주사회의 폭발을 부추겼다. 조직노출로 위기에 처해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일부세력은 무장투쟁을 결정했고, 드디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함으로써 비극의 막을 열었다. photo3 photo4 제주의 상쾌한 바닷바람은 과거의 비극을 잊은 듯 내 얼굴을 간질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4.3 평화인권포럼이 열리는 제주대로 향했다. 캠퍼스 곳곳의 상징물과 제단은 4.3추모 열기를 짐작하게 해줬다. 2일에 걸친 포럼에선 한?중?일 삼국의 전쟁경험, 피학살의 기억을 공유했으며 각국의 평화인권운동 연합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구상했다. 4.3의 현재적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포럼 후 토론에서 나왔다. 제주민예총 지회장 김수열 씨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며 “아직 가해자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체 누가 화해와 상생, 평화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고 성토했다. 얼마 전에야 4.3의 구체적 내막을 알게 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도 있어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는 줄 알았던 나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으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명령을 내렸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은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4.28 평화협상을 통해 평화적 사태해결을 추구했다. 그러나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과 이를 지원한 미군정에 의해 평화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서만 총선거가 무산되었고, 교체된 신임 연대장 박진경은 부하대원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양측은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으나 이는 폭풍전의 고요일 뿐이었다. photo5 화산섬 곳곳엔 역시 동굴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동굴 하나하나에 피의 상흔이 있었다. 아이가 울자,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고 자기 손으로 아이를 죽여야 했던 사연, 살려줄테니 동굴에서 나오라고 한 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한 이야기가 내 눈 앞 동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니. 북제주군 북촌리에는 ‘너분숭이’라는 곳이 있다. 북촌은 해안마을임에도 50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무더기로 학살된 곳이다. 시신을 온전히 수습하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고, 갓난아이들은 돌무더기로 대충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 무덤자리가 바로 이곳 ‘너분숭이’라는 것이다. 남한정부가 수립되며 제주도 문제는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됐다. 경비대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채택한다. 해안 마을에 피난 온 주민들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자, 살기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은 더욱 늘어났다. 그런데도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빨갱이가족이라며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했다. 재판절차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마을 근처에서 경찰 2명이 사살됐다는 이유로 아무 영문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초등학교에 몰아넣고 집단 총살시킨 것이다. 49년 3월, 사면정책이 발표되어 많은 주민이 하산하였고 그해 5월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 가입자, 입산자 가족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즉결처분 한 것이다. 산사람에게 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겨우 살아남은 한 두명 마저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세상에서 잊혀지게 만든 야만의 시대. 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어 제주 4.3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 후 연좌죄, 국가 보안법은 끊임없이 제주를 억압했다. photo6 4월 3일 아침은 어두침침했다. 간밤에 ‘한라산’ 소주와 입에 착착 달라붙는 제주의 회를 사양하지 못한 탓에 머리가 지끈했지만 그날은 왠지 모르게 엄숙했다. 항상 친절하게 4.3의 요모조모를 설명해주던 현혜경 씨(전남대 사회학 박사수료)도 오늘 만큼은 표정이 굳었다. 비록 비극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제주인으로서 그녀 역시 말 못할 한을 삭이고 있었나보다.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 4.3 평화공원은 모래바람이 강한 곳이었다. 제주인들의 한이 서린 바람은 공원을 배회하는 이방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동안 육지것들한테 얼마나 당했을 것인가. 육지것들의 횡포는 안타깝게도 바로 그때, 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사전 마당과 위령제 본행사가 진행되는 무대 앞자리는 검은 양복 흰 장갑으로 대표되는 정부관리 차지였고 행사의 주체인 유족들의 자리는 저 뒤편, 혹은 양 옆이었다. 평지에 플라스틱 의자만 잔뜩 늘어놓아 뒤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 행사장은 이 자리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케 했다. photo7 위령탑 안에 마련된 위패봉안소 여기저기서 오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곡하는 모습보다 나를 더 울게 만든 건 자기 가족의 ‘이름’을 찾으려 애타는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라. 60년이 지났다. 빨갱이 가족이 아니라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가족들을 부정해온 그 눈물의 역사를 떠올려보라. 억울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만 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분들일 것이다. 보고 또 보고, 만져보고, 우는 사람들, 사용할 줄도 모르는 핸드폰 카메라에 이름을 담아가려 애쓰는 모습에서 이방인인 나는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학생, 나 이 이름 좀 찾아줘” 라고 필자를 붙잡은 할머니, 온 가족 5명 중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그 할머니는 한명 한명씩 네 명의 이름을 모두 확인하고 나서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셨다. “고마워잉, 고마워” 연발하시며. 한사코 사양해도 꼬깃꼬깃한 만원 짜릴 쥐어주시며. 진정한 의미의 진상규명이 아니다 희생자 유족 10명 가운데 6명은 4.3해결 성과가 불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이는 현실적인 보상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해자가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데 핵심이 있을 것이다. 4.3연구소 연구원 강태권 씨는 “겉으로는 진상규명이 잘되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 쪽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고 말했다. 현혜경 씨는 “의례가 공식화되고 제도화 되면서 많은 유족들의 위령의례와 위령공간이 배제돼가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더불어 진상규명이 4.3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종착점으로 간주하고 “이제 됐다. 이제 그만 화해하고, ‘평화와 상생’을 이야기 하자”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한다. 아직 가해자가 없는 상황에서 누가 평화와 상생을 이야기하는지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