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그대, 울어라.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TV나 라디오에서 요즘 심심찮게 들려오는 어느 광고에 나오는 노래 “캔디”.광고 속에서 탤런트 김희애는 어깨가 축 처진 남편에게 이 노래를 불러준다.곧이어 “마음에 힘이 되는 아내의 노래처럼”이라는 자막으로 광고는 끝을 맺는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TV나 라디오에서 요즘 심심찮게 들려오는 어느 광고에 나오는 노래 “캔디”. 광고 속에서 탤런트 김희애는 어깨가 축 처진 남편에게 이 노래를 불러준다. 곧이어 “마음에 힘이 되는 아내의 노래처럼”이라는 자막으로 광고는 끝을 맺는다. 이것은 한 보험회사의 ‘아내편’ 광고로, 그밖에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이라고 노래를 불러주는 ‘아들편’, 친구가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는 노래를 불러주는‘친구편’ 등으로 이어지는 시리즈 광고이다. 이렇듯 아내, 아들, 친구가 한 목소리로 실의에 빠진 가장을 위로하고 있으나, 광고 속 아빠는 다시 발 딛고 일어나지 못한 채 그저 그 위로곡에 쓸쓸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다. 이렇듯 ‘수직적 가부장제에 온 몸을 바쳤지만, 수평적 가족관계로 변한 현실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세대’로서의 40대 가장은 소위 ‘아빠광고’에 요즘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가족관계 변화의 낀 세대로서의 남성가장의 억울함이 묻어나는 ‘아빠광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남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내가 아는 한 선배는 아버지가 퇴직 이후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틈만 나면 몰래 병원을 나가려고 하신다고 한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집단에 들어가든 모임의 장 자리를 맡기 일쑤였던 한 남자아이는, 여자친구가 무얼 먹자고 음식점을 정해주고 무얼 하자고 데이트 계획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한다. 누군가를 이끌고 모임을 주도하는 역할에 자긍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아, 연애관계에서 만큼은 자신의 전복된 역할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밖에도 몸집이 작고 운동을 못해서 중학교 시절 괴롭힘을 당했다는 남자, 미팅을 할 때 남자가 분위기를 주도해야 하고 데이트 비용을 모두 지불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억울해하는 남자, 자신의 직업이 변변치 않아서 결혼할 여자의 부모님에게 너무 죄스럽다는 남자 등등, 우리 시대 “고개 숙인” 남성들은 정말로 힘겹고 외로운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말고 힘내라고 응원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하면 그 남성들은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면서 외롭지 않고 행복해지는 것일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언뜻 보면 아내가 힘든 남편에게 응원의 노래를 불러주는 감동적 스토리에 마음이 훈훈해질 수 있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남편 혹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급기야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광고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마음 훈훈해 지고 눈시울 뜨거워진다고 ‘땡’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힘이 솟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외롭고 슬퍼도 꾹 참고 울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속 시원히 울어버린 다음에라도,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IMF 이후 대중문화는 “고개 숙인 남편, 고개 숙인 아버지”를 키워드로 하여, 과거 가부장의 권위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자극해왔다. 힘겨운 남편, 쓸쓸한 아버지의 모습은 깊은 연민을 자아내고, 우리는 그러한 ‘가부장의 그늘’을 사랑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만큼 가부장 신화는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이다.돈 벌겠다고 병든 몸을 이끌고 공사판에 나가는 남성이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억눌린 무수한 남성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그 앞에서 “꾹 참고 힘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힘든 남편을 앞에 두고 아내가 “외롭고 힘들어도 꾹 참고 힘내라“는 응원의 노래를 불러주는 것은 가만히 따지고 보면 무척이나 ‘잔인한’ 것이다. 오히려 덜 힘들고 덜 외로우려면, 남편을 힘들게 하는 그 짐을 가족 구성원이 함께 나눠 짊어지면 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남편이 짊어지고 있는 그 짐이 없어서(물론 육아와 가사노동이라는 다른 짐을 짊어진다) 소외감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회의하게 되는 데 반해, 남성들은 그 짐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한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명절 때마다 운전하고 귀향하는 것에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하고, 여성들은 귀향해서 음식을 장만하고 설거지를 하는 등의 가사노동에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힘들어도 꾹 참고 버티라고 하는 것은 과연 가슴 훈훈한 광경인가? 이들 모두를 위한 해결책은, 꾹 참고 힘내라는 노래 한 곡이 아니라, 힘겨운 서로의 짐을 나눠 짊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제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볼까한다. 여성주의를 주제로 했던 어느 수업시간에, 한 남학생은 페미니스트가 언뜻 보면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을 짓밟고 여성들이 우위를 점하려는 꿍꿍이를 갖고 있다며 그 이름도 유명한 ‘음모론’을 주장하여 수강생들로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의 주장 왈, 일부 순진한 남성들이 ‘극렬페미분자’의 꾐에 넘어가 양성평등을 외치는 것이 페미니즘인 줄 알고 그 운동에 가담한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우연히 소위 ‘남성해방운동본부’류의 인터넷 카페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게시물 중에는 별별 희한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특히 여성부 홈페이지 도메인이 moge(우리말 발음으로 ‘모게’)라는 것을 근거로 “여성부가 부계사회에 앙심을 품고 ‘모계(!)’사회로의 전복을 꿈꾼다”고 주장하는 글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페미니스트들은 야심한 밤에 몰래 모여서 남성의 고통에 축배를 드는 마녀 집단이고, 여성부는 ‘moge’ 사회로의 전복을 계획하는 정부 산하 단체인가. 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공사판에 나가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에, 쌈박질을 못해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남동생의 하소연에, 돈 없고 숫기 없어서 그 흔한 미팅도 못하겠다는 어느 남학생의 말에 가슴 서늘한 무언가를 느낀다. 또한 나는 느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70%가 여성이라는 뉴스에, 아침에 가족들이 모두 나가버리면 하루 종일 ‘집 지키는 개 마냥’ 소파에 앉아있는 게 지겹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대학가면 돈 모아서 성형수술을 할거라는 중3 여자아이의 말에, 밀리터리 룩을 입고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길 가던 남자한테 뺨을 맞았다는 어느 여대생의 말에, 가슴이 서늘한 무언가를 말이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남성도 여성도 모두 각자의 이유들로 행복하지 못해하고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누군가에 의해서 ‘극렬페미분자’라고 지칭되는 나는 이러한 현실에 가슴 서늘한 무언가를 느낀다. 나는 소위 ‘극렬페미분자’가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과격한 표현을 쓰면서 남성에게 대드는 여성? 감히 담배를 피우며 소위 남성문화에 도전하는 여성? 아니면 가장 유명한 가설이기도 한 뚱뚱하고 못생긴 억울함을 운동으로 해소하는 여성? 소위 ‘극렬페미분자’에 대한 무수한 소문은 다 셀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굳이 거창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침 튀기며 말할 수 있는 해박한 지식이 없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억압받는 여성과 남성의 고충에 가슴 서늘한 그 무엇을 느낀다면, 그 사람이 바로 페미니스트라고. 더 나아가 그러한 현실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양성평등을 주장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소문만 무성한 채 실체는 없는 그 유명한 극렬페미분자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사람이 고개 숙인 가부장의 모습에 가슴 서늘한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이 사악한 단지 ‘극렬페미분자’의 가식적 연극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나는 여성부 도메인 주소인 moge는 단지 Ministry of Gender Equality의 이니셜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한 학기 동안의 소박했던 칼럼연재를 마무리 짓는 이 시점에서, 나는 페미니즘이 양성 모두에게 해방의 열쇠가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또한 제발 “moge 가설”과 같은 이유 없는 적대감이 내 소박한 소원을 망치지 않기를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염원해본다*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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