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일 0시 보신각에서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이 울렸다. 이날 제야의 종 행사는 예년과는 달랐다. 보신각 주변 곳곳에서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외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독점 중계를 담당한 KBS의 보도에서는 이 구호를 들을 수 없었다. 시민들의 시위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박수소리가 정부 비판 구호를 대신했다. 이번 보신각 제야의 종 분위기는 예년과 달랐습니다. 각종 구호에 1만여 경찰이 막아섰고요. 소란과 소음을 지워버린 중계방송이 있었습니다.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언론, 특히 방송의 구조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시청자들이 새해 첫날 새벽부터 현장실습교재로 열공했습니다. 2009년 첫날 목요일 뉴스데스크 마치겠습니다.(2009.1.1)이날 화제가 됐던 신경민 전 앵커의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다. 그동안의 앵커의 역할이 단순 진행자에 국한됐다면 신 전 앵커는 적극적 해설자로서의 앵커 역할을 택했다. 그의 권력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은 논란이 됐다. 일부 사람들은 그에게 용감하다고 찬사를 보냈고, 일부는 정치적이라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신 전 앵커는 본인의 판단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클로징 멘트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2009년 4월 언론 탄압과 정치적 외압이라는 의혹과 함께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 하겠습니다”라는 클로징을 남기고 뉴스데스크 앵커직에서 물러났다.기자생활을 하게 되기까지“언론의 메커니즘이나 중요성은 아버지가 기자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알았어요”라고 신경민 전 앵커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1953년 8월 전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직후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미제 초콜릿만 봐도 황홀했고, 옥수수빵과 마른우유면 행복했다. 먹고 살기조차 힘든 시절 언론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시대 상황 중에 아버지가 기자였다는 것은 신경민 씨가 언론의 중요성과 메커니즘을 조금이나마 알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신문을 만든다는 것이 멀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아버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신 전 앵커가 어렸을 때부터 기자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미제 물건과 먹을거리에 대한 환상은 미국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외교관이라는 막연한 꿈을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출세하려면 판검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판검사나 관료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대학에서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외교관이 되기에 좋은 외교학과도, 판검사가 되어 출세하기 좋다는 법학과도 아닌 사회학과였다. “사실 사회학과에 간 건 특별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때 법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 법대에 가지 않았고, 숫자와는 안 맞는 것 같아 상대에 가지 않았죠. 유학이 여의치 않아 외교학도 어려웠고요” 우연히 결정한 전공 사회학은 그에게 기자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줬다.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나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상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수많은 조직을 이해해야 하죠.” 사회학은 그가 개인으로서의 인간, 사회, 이를 잇는 중간자적 조직을 사회학적으로,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기자생활을 위해서는 언론과 사회 맥락을 빨리 읽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는 “현실은 슬로건으로 꽉 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현상 밑에 흐르는 진실을 파악하는 것을 대학 시절부터 연습한 것이 기자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독재를 경험한 대학시절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에는 그가 대학시절에 독재를 경험했다는 것도 영향을 줬다. 그가 대학 생활을 한 70년대 초는 독재 정권이 한창일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책들이 금서였어요. 경제학개론이나 모택동의 모순론 같은 금서들을 복사해서 돌려 읽었죠.” 학기를 제대로 끝낼 수도 없었다. 1학기가 3월에 시작하면 학교가 4월이면 닫혔고, 2학기가 9월에 시작하면 10월이면 닫혔다. “장갑차가 매일 학교 앞에 있고 학교도서관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당시 문리과대학 앞에 있는 학림다방이나 법대 앞의 대학다방 같은 곳에서 커피 한 잔 놓고 친구, 선후배들과 네 시간씩 이야기하곤 했죠. 주로 한국사회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서양사회의 이론으로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독재를 경험하면서 공부에 회의를 갖게 됐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말살됐음을 느끼고 현실사회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옆에 있는 중요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기회가 불공평하게 배분된다는 것에 부조리를 실감했어요.” 그가 생각하기에 언론인, 정치인, 학자들이 이 시대를 잘 정리하고 넘어가야 했다. 이에 신 전 앵커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훼손을 정리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느끼게 됐다.기자라는 직업신 전 앵커의 기자 생활은 1981년 MBC에 입사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주로 외교, 법조 분야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워싱턴에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올해로 기자 생활이 30년째인 셈이다. 그 동안 신 전 앵커는 박종철 사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기소, 남북한 총리 회담, 9.11 테러, 이라크전 발발, 최근에는 신영철 대법관 사건과 촛불집회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직접 관찰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이 천직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기자가 내 천직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죠. 자기가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잘할 수 있는 직업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명예와 부를 함께 얻는 직업도 잘 없고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그러나 “기자라는 직업은 장점이 많은 직업”이라며 장점을 말했다. 그가 말하는 기자의 장점 중 하나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유명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묻는 것이 기자에게는 권리가 되니까 참 멋진 직업이죠. 다만 이를 기사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검증과 책임의 의무가 남달라야 하긴 합니다.” 신 전 앵커는 기자라는 직업이 갖는 어려움도 토로했다. 그는 “기자는 여러 개의 주제를 짧은 시간에 섭렵해야 하기 때문에 기자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깊이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라며 걱정을 내비쳤다. 이 뿐만이 아니다. 기자는 늘 타협의 유혹과도 싸워야 한다. 기자라는 직업상의 특성 상 돈의 유혹이나 자리의 유혹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클로징이 아닌 오프닝이번 주에는 눈에 띄게 친절했던 기관들이 많았습니다. 대법원은 몰아주기 배당한 서울 중앙 법원 조사에서 끝없이 친절했고요. 대교협이 의혹 받은 고려대 판정에서 망외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국회 문방위원장은 기습 상정에서 누군가 위해 몸을 던지는 친절을 보였습니다. 총 맞은 것처럼 친절했던 배경이 궁금합니다.(2009.2.27)회사의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일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힘은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억울했습니다. 구석 구석과 매일 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었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 하겠습니다. 월요일 뉴스데스크 마치겠습니다.(2009.4.13)신경민 전 앵커는 기자나 특파원 뿐 아니라 많은 시간을 앵커로 활약했다. 특히 대중에게는 2008년부터 약 1년 동안 진행한 뉴스데스크 앵커로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촌철살인’ 클로징 멘트로 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다. 신 전 앵커에게 클로징이란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한 문제의식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통로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오프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 국민, 집단의 압력이나 언론 내부나 회사 내부의 압력이 있어 어떤 문제를 지적하는 데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기도 했어요. 방 안에 코끼리가 있어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상황과 비슷한 격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본인 개인의 판단과 문제의식을 공중파 메인뉴스의 클로징멘트로 쓴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다. “클로징멘트와 관련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어요. 정권과 대립해 인기를 얻으려는 수작이라는 말도 있었죠. 하지만 출세하려고 했으면 그런 행보를 걷지는 않았을 거에요”라고 당시 심경을 토로한 신 전 앵커는 “개인적 경험의 일반화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자꾸 검증해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했습니다”라며 그간의 고충과 노력을 말했다.당시 자신의 클로징멘트가 연일 화제가 되는 것을 보는 것도 신 전 앵커에게는 굉장한 압박이었다. 자신의 멘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분 좋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클로징 멘트를 쓰는 것이 정치적 압력에 있어서나 화제성에 있어서나 저에게는 부담스럽고 힘든 작업이었어요. 클로징을 작성하는 것 자체가 소재 선택에서부터 논리구성, 용어선택까지 어려운 작업이기도 했고요”라며 그래도 사람들이 미처 볼 수 없었던 측면, 논리를 지적해 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고 자평했다. 이 결과 나온 클로징 멘트는 10대, 20대 등 젊은이들에게도 큰 공감을 얻었다. “내 멘트에 찬사를 보낸 사람은 아마 내 시각과 용기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종의 소통을 한거죠.”사실과 진실의 차이‘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신경민 전 앵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다. 2009년 1월 1일 뉴스데스크 클로징에서 그는 “(제야의 종 행사 KBS보도와 관련해)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며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주지하고 진실을 추구할 것을 시청자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진실을 알 수 있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개인적인 관계나 공적인 관계에서 끝까지 진실을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학생 때는 진실이 있긴 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당연히 진실은 존재한다고 답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인식론적 얘기일 수 있지만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도 확신하기 힘들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럼에도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는 항상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가 없으면 사회는 허위에 가득차게 됩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 자체가 사라져버리면 존재가치나 의의 역시 사라지는 거에요.” 사안은 변하지만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항상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같다. 슬로건이 넘치는 꽉 차 있는 현실 사회에서 현상 밑에 흐르는 진실을 봐야 한다는 신 전 앵커의 말이 변함없이 의미를 갖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