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세계의 주인》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폭력 소재를 다루고 있으니 관련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은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종이 울린다. 왁자지껄한 외침. 호탕한 웃음소리. 익숙한 교실 풍경. 그리고 여기, 열여덟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주인’이 있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커다란 소리로 웃는 주인. 체육 시간이면 친구들과 짓궂은 몸싸움을 벌이고, 절친과 야한 농담을 주고받고, 쉬는 시간엔 애인을 만나 키스하는 주인. 우리가 이 명랑하고 활기 넘치는 열여덟 여자애의 세계를 제대로 목격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수호’는 주인과 같은 학교 방송반 친구다. 여동생 ‘누리’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길, 그는 골목에 래커로 쓰인 ‘성범죄자 꺼져’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수호의 얼굴에는 짙은 걱정이 어리고, 얼마 뒤 그는 서명운동을 시작한다. 내용은 성범죄자가 출소 후 학교 근처에 사는 것을 막아달라는 것. 학생들은 ‘성범죄는 피해자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상처를 남긴다’는 그의 호소에 공감하며 서명을 남긴다. 단 한 사람, 주인을 제외하고.
주인은 성폭력이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수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나 하나쯤 빠져도 괜찮지 않냐며 수호의 요청을 완강히 거부한다. 어떻게든 서명을 받아 내려는 수호와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주인의 갈등이 몇 차례 반복된다. 갈등은 결국 큰 싸움으로 번지고, 주인과 수호는 나란히 교장실로 불려 간다. 하지만 교장실에서도 주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주인이 수호의 주장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주인 역시 성폭력 피해자기 때문이다. 주인은 담담히 고백한다. 자신도 성폭력을 당했다고. 그러나 자신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다고. 이렇게 삶이 이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교장실은 일순간 고요해진다. 카메라는 주인뿐 아니라 수호, 선생님들, 그리고 학교로 불려온 주인의 엄마 ‘태선’의 얼굴을 비춘다. 태선은 고개를 푹 숙이고, 수호와 선생님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관객석에도 긴장감이 감돈다. 주인이 자기 삶의 진실을 고백하는 순간, 세계는 요동친다.
주인의 고집을 답답해하던 수호도, 선생님들도, 관객도 주인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 주인의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으레 피해자의 일상을 중단하는 범죄로 그려진다. 평범히 굴러가던 피해자의 삶이 끔찍한 사건 이후 멈춰버렸다는 식이다. 이 서사는 피해자에게 불행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그를 성폭력 피해 순간에 영원히 고립시킨다. 하지만 피해자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시간이 흐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중요한 건 피해자의 삶을 재단하는 대신,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인이 만들어 낸 최초의 흔들림은 매우 중요하다.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우리는 성폭력 생존자들이 이 사회를 바꿔온 힘을 쉽게 무시하거나 없던 걸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변화는 언제나 사회가 자신을 함부로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피해자들의 말하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주인이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던 강렬한 순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친족 성폭력의 복잡함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에 대한 납작한 재현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동시에, 친족 성폭력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새롭다.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대부분 초면인 가해자가 피해자를 납치해 벌인 범죄의 잔혹함에 주목한다. 이러한 재현은 사람들의 현실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지의 성범죄자로부터 누리를 지켜야 한다는 수호의 두려움은 성폭력을 상상하는 전형적 방식을 보여준다. 이 경우 ‘정의 구현’을 위한 최우선 과제는 사회에서 성범죄자를 격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는 그의 삼촌이다. 상당히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주인과 유사한 경험을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2024 상담 통계」에 따르면,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전체 성폭력 피해의 82%를 차지했고, 그중 친인척에 의한 피해가 15%에 달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친족 성폭력을 다룬 작품은 턱없이 부족하고 대개 피상적인 재현에 그친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사건을 소화하는 방식은 매우 복잡다단하다. ‘미도’는 성폭력 피해자 자조 모임에서 활동하는 주인의 친한 언니다. 아버지에 의한 친족 성폭력 피해자기도 하다. 미도의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재판에서 가해자 측 변호사는 미도를 추궁한다. 왜 곧바로 아버지를 신고하지 않았는지. 왜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고, 하트를 붙인 문자를 보냈는지. 어떻게 사건 이후 태권도 대회에 출전해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지. 왜 피해자에게 응당 기대되는 모습대로 행동하지 않았는지.
이런 시선은 현실에서도 빈번히 발견된다. 하지만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각기 다른 복잡한 이유로 가해자를 신고하지 못하거나, 신고 이후 가해자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술을 바꾸기도 한다. 가족을 파탄 내고 싶지 않아서, 나만 참으면 될 것 같아서, 가해자에게 ‘이것은 사랑’이라는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내게 벌어진 일을 해석할 충분한 자원이 없어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 『나눔터』 94호에 글을 실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 공차 씨는 아버지의 성폭력을 4년간 신고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잘못한 게 아닌 데도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 ‘다 사랑해서 미리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라는 아빠의 말. 나만 참으면 평화로울 것 같은 상황. 용기 내서 엄마에게 말해 보았지만 가슴 만져 본 것 정도는 장난이겠거니 하고 넘어간 일. 맨날 혼나기만 하다가 처음 받아 보는 관심. 지금 일어나는 이 일(성폭력)이 뭔지 아직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점.
설령 가해자를 신고하고 처벌하더라도 이는 끝이 아닌 시작에 가깝다. 주인을 가해한 삼촌은 실형을 받고 수감됐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물리적으로 분리됐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상흔이 남는다. 주인은 자신을 삼촌에게서 떼놓지 않은 태선을 원망한다. 주인의 아빠는 자신의 동생이 딸에게 행한 일에 죄책감을 느껴 가족의 곁을 떠난다. 주인은 삼촌이 싫지만 아빠가 떠난 것은 슬프므로 외려 아빠의 눈치를 본다. 주인의 남동생 ‘해인’은 삼촌이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를 주인이 보지 못하게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려 애쓴다.

머무는 자들의 실패
가족도, 친구도, 성폭력 자조 모임 동료도, 심지어 주인 자신도 상처를 다루는 완벽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함부로 건드리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대응하거나, 두려워 회피한다.
특히 주인의 친구들은 주인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후 혼란스러워한다. 주인의 절친한 친구 ‘유라’는 한동안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자신이 그리던 야한 만화가 주인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지 걱정한다. 주인은 이전처럼 남자애들과 장난스러운 몸싸움을 하지만 친구들은 주인을 과하게 보호한다. 주인이 사과를 싫어하는 이유가 트라우마 때문일지 모른다고 함부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들은 주인이 없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고백한다. 이제 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친구들의 말과 행동에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덧씌운 편견이 일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서툶을 마냥 비난할 수 있을까. 나와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던 가까운 이의 상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실수한다.
주인이 교장실에서 피해 사실을 고백한 날, 태선은 주인을 태우고 자동세차장으로 향한다. 조용한 차가 세차장으로 진입한다. 새하얀 거품이 차 겉면을 뒤덮고, 소음이 커진다. 주인의 감정도 점차 격해진다. 주인은 왜 나를 지키지 않았냐고,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냐고 태선에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태선은 운전석에 앉아 꿋꿋이 앞을 바라본다. 세차가 끝나가고 소음이 줄어들며 주인의 눈물도 서서히 잦아든다. 태선은 주인에게 물을 건네고 묻는다. 한 바퀴 더 돌까. 주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은 이 장면이 모녀에게 숱하게 반복됐으리란 것을 짐작한다. 주인과 태선이 그들의 상처를 끌어안고 얼마나 많은 순간 헤맸을지. 태선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주인을 부둥켜안아도 봤을 것이다. 주인과 함께 엉엉 울어도 봤을 것이다. 어느 날엔 주인에게 화내거나 그를 타박했을지도 모른다. 미동 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태선과 홀로 울음을 그치는 주인, 냉담하게 집에 들어온 모녀에게 별다른 것을 묻지 않는 해인까지. 관객은 이 가족에게 이미 여러 번의 실패가 있었음을 본다.
주인이 속한 성폭력 자조 모임에서도 몇 차례의 실패를 짐작할 수 있다. 주인은 모임에 남자친구 ‘찬우’를 데려간다. 이를 본 미도는 왜 말도 없이 애인을 데려오냐며 화를 낸다. 외부인을 데리고 올 때는 미리 알리고 동의를 구하기로 하지 않았냐며. 이러지 말자고 약속을 만든 거 아니었냐며. 모임 반장인 ‘인주’가 말려보지만, 미도는 그칠 기색이 없다.

이들은 서로의 상처 앞에서 자꾸 실수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실수를 탓하는 대신 어쩐지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곁에 머무르는 자만이 실수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주인을, 주인이 성폭력 자조 모임을 떠난다면 더는 실수할 일도 없을 것이다.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떠나버린 아빠가 가족 내의 지리멸렬한 역동으로부터 조금은 해방될 수 있던 것처럼. 곁에 머무른다는 것은 작은 진전뿐 아니라 지난한 실패까지도 끌어안는다는 의미다.
나아가 이들은 실패를 거듭하며 배우고 변화한다. 상대를 잘 돌보는 방법을 깨닫고, 해야 할 말과 삼켜야 할 말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슬퍼하는 주인을 조수석에 태우고 동네를 돌다 들어가는 태선의 습관, 외부인을 데려올 때 서로에게 허락을 구하자는 자조 모임의 약속 모두 구체적인 실패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이들은 실패할 때마다 스스로를 수정하고, 갱신하고, 성장한다.
느린 이동
수호의 동생 누리는 태선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태선은 어린이집 CCTV를 확인하다가 주인이 누리를 꼬집는 장면을 발견한다. 그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이어지는 장면을 재생한다. 화면 속 주인은 누리를 꼬집으며 묻는다. “이래도 안 아파?” 누리가 고개를 젓자 더 세게 꼬집으며 묻는다. “이래도?” 주인은 누리에게 알려주고 싶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고.
‘회복’은 피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최란 부소장은 〈여성신문〉 기고문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회복은 ‘피해의 경험을 본인의 자원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 밝힌다. 우리는 누리를 꼬집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하는 주인을 보며, 그가 상처를 깨끗이 지우는 대신 그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어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원히 새로 태어나는 이 세계의 주인은, 언제까지나 주인 자신이다.

주인을 지지하는 단단한 곁이 주인이 만들어 가는 세계를 함께 지탱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회복에는 신뢰할 만한 주변 사람, 전문 기관, 단체 등을 포함하는 ‘주변 지지 체계’가 매우 중요하다. 주인에게는 친구, 가족뿐 아니라 자조 모임이 있다. 나이도 배경도 다르지만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은 ‘우리 아빠 몫까지 복수’할 거라는 농담을 주고받고, 밥을 나눠 먹고, 함께 봉사 활동을 하고, 서로의 재판을 방청하며 곁을 지킨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가 성폭력 자조 모임에서 진정으로 이해받는다는 감각을 찾거나 이어질 삶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성폭력 고발과 지원의 오랜 역사가 주인을 돕기도 한다. 성폭력에 대한 이해와 제도적 대응은 피해자들의 말하기에 기반해 끊임없이 확장돼 왔다. 피해 이후에도 삶이 망가지지 않고 계속된다는 믿음은 성폭력을 둘러싼 통념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성폭력 피해자 자조 모임에서 함께 청소 봉사를 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윤가은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원치 않게 자기 삶과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던 사람들에게 청소나 설거지는 다시 무언가를 통제하고 정리하는 감각을 되찾아 준다’고 설명한다. 피해자의 경험 위에서 만들어진 지식이다.
자신의 세계에서 진정한 주인이 되는 건 혼자만의 힘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세계를 차근차근 회복해 나가려면 피해 당사자와 피해자의 주변인, 성폭력 지원 단체, 연구자, 의료기관, 상담 시설, 다른 성폭력 피해자 등이 서로의 말을 듣고 되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윤가은 감독이 만든 세계엔 주인의 말을 듣고, 믿고, 이에 응답하는 이들이 여럿 존재한다. 이곳에서 주인은 조금씩 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 기적을 현실에서 찾고 싶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이 올라간다. 젖은 눈으로 영화관을 나와 사람들의 관람평을 확인했다. 꺽꺽대며 오열했다. 수많은 주변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화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가 이 영화에게 세게 꼬집혔다. 너무 힘들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영화가 불러낸 이토록 수많은 세계가 그동안 다 어디에 있었는지. 스크롤을 내리며 시인 뮤리얼 루카이저의 시구를 떠올렸다.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