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에서 온 통신
누구의 눈으로 보고 누구의 입으로 말할 것인가
끝없는 방랑 속에서 찾는 삶의 의미

누구의 눈으로 보고 누구의 입으로 말할 것인가

※본 기사는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79년 독일, 이스라엘 외교관 자택의 초인종이 울린다. 친절한 미소를 띤 백인 여성이 여행 가방을 건네고, 의심을 거둔 외교관은 가방을 집 안에 들인다. 잠시 후, 폭발음이 울리고 단란한 가족은 목숨을 잃는다. 길 건너편엔 긴장한 얼굴로 폭발을 지켜보는 아랍인 남성이 보인다.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리틀 드러머 걸》)은 영국 작가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을 원작으로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6부작 드라마다. 2018년 〈BBC〉에서 방영한 뒤, 국내엔 2019년 재편집을 거친 감독판이 공개됐다. 원작이 쓰인 1983년, 드라마가 제작된 2018년, 그리고 현재 2025년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테러’로 규정돼 학살의 명분이 되는 세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어떻게 비추고 있을까. 지금 《리틀 드러머 걸》을 다시 보며,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사진 설명 시작.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포스터. 마티, 찰리, 가디 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사진 설명 끝.

연극과 현실이 하나가 되다

1970년대는 팔레스타인 해방 세력의 국제 테러가 빈번히 벌어지던 시기였다. 군사력으로 이스라엘과 대등하게 맞붙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이들은 테러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요구하려 했다. 무장 투쟁엔 이스라엘의 철저한 보복이 뒤따랐다. 《리틀 드러머 걸》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을 추적하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첩보 작전을 그린다.

사진 설명 시작. 모사드 요원 마티의 모습. 정장을 입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사진 설명 끝.

작전을 지휘하는 모사드 요원 ‘마티’는 자신을 예술가라 여긴다. 스스로를 “제작자이자 감독이자 작가”로 소개하는 그에게, 작전은 곧 연극이고 스파이는 곧 배우다. 마티는 테러리스트 개개인을 잡는 데 급급하기보다, 테러의 조직적 기반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릴’과 그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에 침투하고자, 그는 이스라엘 스파이를 막내 ‘쌀림’의 연인으로 위장하는 작전을 꾸민다. 이에 따라 스파이로 섭외되는 건 영국의 무명 배우 ‘찰리’다. 재능과 야망의 크기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작은 극장을 전전하던 그에게 마티는 ‘이것이 당신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을 기회’라 말하며, 찰리가 작전에 참여하도록 설득한다.

이 연극은 세상 사람 모두를 관객으로 삼는 동시에, 관객이 아무도 없을 때조차 내내 상연돼야 한다. 모사드가 쌀림을 억류하는 동안, 찰리는 쌀림의 동료 조직원들을 속여야 한다. 자신이 쌀림의 연인이며, 그를 사랑해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그들을 속일만한 그럴싸한 각본 외에도, 찰리에겐 연기를 위한 실제 경험과 기억이 필요하다. 쌀림을 만나고, 쌀림과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 고향과 형제자매에 관해 들은 기억.

찰리를 스파이로 훈련시키며 그 기억을 심어주는 건 모사드 요원 ‘가디’다. 가디는 쌀림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반복해 듣는다. 그리고 대본을 외우듯 억양과 말투부터 사상과 취향까지, 쌀림에 관해 공부한다. 그와 똑같은 옷을 입고서, 가디는 쌀림으로 분해 찰리와 시간을 보낸다. 찰리에게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랑을 표현한다.

하지만 연기와 진심은 구분되지 않는다. 찰리는 쌀림의 연인을 연기하며, 쌀림을 연기하는 가디와 사랑에 빠진다. 가디를 사랑해서, 점점 더 위험해지는 작전에 덤벼들 결심을 한다. 이런 찰리의 마음은, 쌀림을 사랑해서 목숨을 건 싸움에 뛰어든 연극 속 찰리의 마음과 꼭 겹친다. 찰리는 가디에게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연기를 제대로 하는 방법은, 진짜로 그 안에 사는 것뿐이에요.” 가디를 더 알고 싶다는 요청으로도 들리는 이 대사는,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과 누군가로 사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연극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가운데 찰리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무엇을 위해 누구의 편에서 싸워야 할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가디의 진심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이 점점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배우가 현실과 연기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역할에 동화되는 것은 이 작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지만, 그런 찰리를 보며 모사드 요원들은 초조해진다. 작전의 성패가 걸린 찰리의 의중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의 입으로 말하는가

드라마는 중심인물인 찰리와 가디, 마티를 따라 모사드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적이자 표적이다. 그러나 《리틀 드러머 걸》은 ‘현실연극’이란 장치를 통해, 역설적으로 작품 전반에 걸쳐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구축한다.

가디는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지만, 팔레스타인인 쌀림을 재현한다. 전선의 가장 앞에 서는 가디에겐 적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의 입장을 대신 발화할 임무가 있다. 드라마는 가디가 연기하는 쌀림과 그것이 구현하는 픽션 속 쌀림의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제시한다.

사진 설명 시작. 찰리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길을 걸어가는 가디의 모습. 찰리는 남색 코트를, 가디는 빨간색 셔츠에 녹색 자켓을 입고 있다. 사진 설명 끝.
사진 설명 시작. 썬글라스를 끼고 있는 쌀림의 모습. 빨간색 셔츠와 녹색 자켓을 입고 있다. 사진 설명 끝.

가디는 쌀림을 연기하기 위해 쌀림의 연설을 반복해서 듣는다. 좌파 젊은이들이 모인 비공식 워크숍에서 쌀림은 자신과 가족이 1948년 나크바* 이래 팔레스타인에서 겪은 일을 설명하고, 무장 투쟁의 이유와 정당성을 소리 높여 주장한다. 쌀림이 직접 말하는 장면이 초반부 회상으로 등장하지만, 그 이후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발화하는 주체는 내내 가디, 또는 모사드가 조작한 쌀림의 편지다.

*나크바: 1948년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토착민 수십만 명을 강제 추방하고 팔레스타인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 사건

관객은 연기하는 가디에게서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이에 공감하게 된다. 반면 작품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정당성이 무엇인지 대놓고 언급되는 순간은 찾기 어렵다. 그들의 임무는 ‘테러’를 막는 거라는 전제가 당연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전제된 이스라엘의 도덕적 우위는 작전이 전개될수록 흔들리며, 끝내 의심의 대상이 된다.

관객은 왜 이스라엘의 입을 통해서만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는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뒤흔들며 첩보극 특유의 긴장을 조성하는 형식이지만, 동시에 서구 자본이 제작한 작품이 팔레스타인의 발화를 승인하는 제한적 방식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의 역사 인식과 그들이 주장하는 저항의 정당성은 이스라엘인을 통해서만 안전하게 재현될 수 있는 ‘불온’한 진실처럼 보인다.

이는 《리틀 드러머 걸》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서로 다른 신념의 대립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중요해진다. 마지막 화, 찰리가 이스라엘의 스파이임을 알게 된 칼릴은 ‘당신은 어떤 신념을 가졌기에 이런 일을 했냐’고 묻는다. 이 결정적 순간이 드러내듯, 이 작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신념의 충돌로 바라본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는 구조적 폭력과 집단학살이 갈등 구도 속에서 은폐될 위험이 발생한다.

일각에선 드라마가 팔레스타인인을 테러리스트로 재현하는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이스라엘 당국이 선전해 온 거짓 서사를 걷어낸 팔레스타인을 보여준 점은 이 작품이 지니는 분명한 의의다. 그러나 신념의 대결이라는 프레임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로부터 발생하는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팔레스타인 해방이 일방의 신념으로만 간주될 때, 어느 쪽과도 무관한 이들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찰리는 누구인가

“나는 배우예요.” 칼릴의 마지막 질문에 찰리가 눈물을 참으며 내뱉는 말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다. 이를 통해,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찰리를 움직인 근본적인 동기가 배우로서의 자의식이었음을 깨닫는다. 찰리는 배우기에, 팔레스타인 조직의 일원으로서도, 그것을 연기하는 이스라엘 스파이로서도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이는 찰리의 능동성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론 그의 ‘신념 없음’을 선명히 드러낸다.

사진 설명 시작. 작업복을 입고 쿠피예를 머리에 두른 찰리가 폭탄 조립을 배우고 있다. 사진 설명 끝.

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자적 인물이다. 찰리는 과거 반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한 전력을 지녔고, 쌀림의 워크숍에 참가하기도 했다. 모사드 요원들은 찰리가 반시온주의 워크숍에 여섯 번이나 갔다는 기록을 들이밀며 그를 몰아세우지만, 이러한 배경은 모사드가 찰리를 선택한 이유기도 하다. 찰리는 잘 모르고 워크숍에 참여했다고 잡아떼고, 관객은 그 말이 사실임을 이후 전개를 보며 짐작하게 된다. 요컨대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동조할 수 있는 모호한 입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관객과 가장 가깝다.

쌀림이 잡힌 사실을 알게 된 후 찰리는 모사드가 그를 재판에 회부하리라 예상한다. 그 막연한 이상과 달리, 모사드는 쌀림과 그의 동료를 사고로 위장해 살해한다. ‘테러범’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순진한 발상은 찰리가 첩보전의 현실에 얼마나 무지한지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이러한 찰리의 무지는 곧 관객의 시선을 대리한다.

찰리가 영국인이란 점도 우연이 아니다. 드라마는 자신들이 깊게 관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타자의 신념’으로만 거리 두려 하는 영국의 모순적 태도를 비판한다. 원작 소설과 달리 마지막 작전의 배경이 런던이란 점은 이러한 비판과 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처음 유럽에 왔을 때 제일 놀란 게 뭐였는지 알아? 아무도 신경 안 쓴다는 거.” 모사드 사무실에 감금된 쌀림은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는 창문 밖 뮌헨 사람들을 멍하게 바라보며 말한다. 영국, 나아가 유럽 사회는 식민지배와 학살에 공모한 책임을 부정하며 팔레스타인이 겪는 폭력을 회피해 왔다. 이러한 서구 사회의 무관심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대하는 오늘날 한국 관객 다수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몰랐기에 뛰어들었고, 몰랐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쌀림이 살해당할 것도, 자신의 행동이 더 많은 죽음을 불러오리라는 것도 몰랐다. 찰리의 시선에서 서사를 따라가는 관객 역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찰리와 관객은 마지막 화에 이르러 비로소 알게 된다. 찰리가 작전에서 행한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첩보전’으로 보였던 싸움이 실은 얼마나 비대칭적이고 부정의한지. 찰리가 레바논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군인이 왜 “한두 해면 우리도 모두 죽을 거”라고 했는지. 드라마는 테러에 가담한 칼릴의 조직원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이 장면의 끝은 찰리가 짧게나마 머물렀던 레바논 난민 캠프에 개시되는 공습이다.

라디오로 전해지는 뉴스를 들으며 눈물을 참지 못하는 찰리에게, 네덜란드에서 또 팔레스타인이 테러를 벌였다는 마티의 말은 기이하게 들린다. 그 순간 관객이 느끼는 위화감은 찰리의 허망함과 공명한다. 첩보전의 서사 아래 놓인 점령과 학살의 세계를 더는 못 본 체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다. 관객은 자신이 누구의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봐왔는지 깨닫고, 모든 것을 돌아보게 된다.

다시 첫 화로 돌아가자. 마티가 독일 수사 본부에서 독일인 수사관을 매수할 때, 그는 의도적으로 팔뚝에 새겨진 여섯 자리 숫자의 문신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은 “서구인이 유대인에게 한 짓을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에게 하는 것”이라는 쌀림의 목소리를 듣는다.

결코 대칭적이지 않은 폭력을 ‘균형적’으로 본다는 말은 얼마나 이상한가. 《리틀 드러머 걸》은 ‘균형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균형’이라는 말에 안도해왔는지 비춘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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