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하고, 비상행동이 해체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무대가 설치되고 각양각색 깃발이 나부끼던 광화문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들이 쌩쌩립니다. 응원봉을 들고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아주 예전 같습니다.
이쯤에서 〈서울대저널〉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지난겨울 광장의 불씨는 어디로 갔나요. 우리는 12.3 내란 이전보다 나아진 세상에서 살고 있나요. 광장을 달궜던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두 손 모아 염원하던 것들이 이뤄졌나요. 오늘 당신의 하루는 안녕한가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눠준 이들과 답을 찾아가려 합니다. 기고는 하반기에 발행되는 세 호에 나눠 수록됩니다.

변현준(사회 20)
6년 차 활동가. 비정규직없는서울대만들기공동행동, 서울대학교 배리어프리 보장을 위한 공동행동 등 다양한 학내 활동에 참여했고, 최근엔 정의당에서 주로 활동했다.
빛의 혁명은 왜 빛의 혁명이 되지 못했는가?
지난겨울 우리는 광장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보내며 새로운 민주주의를 외쳤다. 우리가 외친 새로운 민주주의는 그저 계엄 이전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계엄 이전에도 이미 계엄 아래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구호가 보여주듯, 광장에 모인 우리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고 외쳤다. 그러나 빛의 혁명은 빛의 혁명이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광장의 목소리는 실질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아직도 ‘나중’으로 미뤄지고 있으며,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는 여전히 고공에서 농성 중이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는 아직도 ‘특정 장애인 단체의 열차 지연 행위’로 치부된다.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고 말해선 안 되겠지만, 광장을 빛낸 수많은 응원봉들, ‘키세스’들이 꿈꾸던 변화는 아직 다 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빛의 혁명은 빛의 혁명이 되지 못했는가?
기존 정치체제와 질서 자체를 뒤엎는 진짜 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현존하는 정치제도 내에서 그를 이용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의 지상과제다. 광장의 목소리와 실제 변화를 잇는 현실정치 안의 가교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제도가 대의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정당민주주의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갖지 못했던 그 가교는 결국 ‘광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해 줄 수 있는 정당’, 다시 말해 힘 있는 독자적 진보정당이다. 물론 우리 정치에 독자적 진보정당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너무도 힘이 없어 광장의 목소리와 함께 지워지고 묻혔다. 조금 더 힘 있는 진보정당들도 있었지만, 기존 보수정당과 야합해 힘을 얻었기에 그 보수정당이 광장의 목소리를 지우고 묻는 행위를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다. 만약 우리에게 더 힘 있는 독자적 진보정당이, ‘광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해 줄 정당’이 있었더라면, 광장의 목소리가 이처럼 손쉽게 지워지고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더 힘 있는 독자적 진보정당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더 좁은 의미의 정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광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대변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 광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해 줄 정당에 힘을 모아주는 데는 망설이는 이들이 자주 보인다. 아예 탈(脫)정치화된 채 기계적 중립을 표방하는 이들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어떤 경로로든 인권사회의제에 관심 갖고 학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참여를 이어가는 이들(이제부터 이들을 ‘우리’라고 부를 것이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본다. 왜일까? 여러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진보정당에 대한 효능감과 신뢰감을 상실한 탓일 수도 있고, 앞서 내가 역설한 진보정당의 필요성 자체에 이념적·이론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또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한다. 누구보다 정치적 상상력이 극대화돼 있다고 믿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실은 제약됐을 가능성을.
우리 내부에선 이미 탈정치화가 문제고, 좋은 정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 우린 이제 모든 게 정치적이라고 믿으며, ‘정치적’이란 단어를 낙인찍기에 활용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정치가 항상 다원적이어야 하고 화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견고한 믿음에 도전장을 내밀며, 약자와 소수자의 편을 드는 ‘편향된 정치’가 필요하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나아가 우리는 때로는 그 정치 ― 기후정치, 노동정치, 평등정치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장에서 직접 실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충분히 자유로운가?
모든 것이 정치적이지만, 어떤 것들은 더 정치적이다. 현실정치, 또는 제도정치·의회정치·정당정치라 불리는 것들이 그렇다. 이와 같은 좁은 의미의 정치는 우리에게 기존 정치질서를 상징하며, 저항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정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많은 경우 현실정치로부터 탈주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나도 그 탈주의 필요성에 대체로 공감한다. 현실정치의 기존 문법은 기득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정치의 문법에서 벗어나 보다 운동과 현장에 맞닿은 언어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 탈주 와중에 중요한 것 하나를 두고 오지 않았냐고 묻고 싶다. 즉, 우리가 구상하는 대안정치에서 진보정당이 사라져 버렸다. 기존 현실정치 문법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우리가 만들어 갈 대안정치에 대한 상상력이 오히려 억눌린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진보정당을 아예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선거철마다 진보정당에 표를 던지거나 후원금을 보낸다. 한편으론 진보정당에 쉽게 적극적 지지를 보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진보정당 자신이 단호하게 진보적 태도를 보이지 못하거나, 대중에게 효능감을 전혀 주지 못하는 순간이 비일비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가 단지 표와 후원금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치는 비판적 지지만이 아니라 적극적 참여와 변혁 의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다시 말해, 진보정당이 우리의 대안정치 구상에 들어있었다면,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어야 한다. 입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연결되려고 노력하고, 팔짱 끼고 관망하기보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안으로부터 변화를 일궈내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나 아마도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진보정당도 결국 기존 현실정치 질서 안에 머물러 있다고 치부하고 넘겼으니까.
진보정당의 과오들, 그러나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우리뿐
물론 우리가 그렇게 진보정당에 회의적으로 굴게 된 데는 상당 부분 진보정당들의 책임이 있다. 첫째, 진보정당이 아니라 진보정당‘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가 우리에게는 골칫거리일 것이다. 내부의 차이를 억지로 누르고 봉합하는 것만큼 부적절한 태도가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로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오늘날 진보정당‘들’의 모습은 그들 사이에서 왜 원한이 생겨났는지를 알지 못하는 우리 중 대부분에겐 큰 진입장벽이다. 둘째, 진보정당이 기득권 세력과 야합하는 모습은 더 큰 거부감을 일으킨다. 이러한 비판은 비단 소위 ‘위성정당’에 대해서만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 독자적 진보정당이라고 자부하는 정당도 조국 사태를 비롯한 여러 국면 속에서 현실정치 문법에 매몰돼 진보적 태도를 놓쳐왔다. 이런 야합은 우리가 진보정당까지도 기존 현실정치의 일부로 묶고 그로부터 탈주하게 하는 태도의 근본 원인이 된다. 셋째, 지금 진보정당들은 우리에게 효능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여러 독자적 진보정당이 원외로 밀려난 지금, 구체적인 변화를 보수정당이 주도하는 지금, 결국 현실정치란 보수정당들과 잘 타협해 내는 것이라는 오해가 퍼지기 쉽다. 이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다면 나는 그 타협을 하기보다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진보정당 없는 대안정치의 영역에서 힘을 키우는데 기여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사회운동과 현실정치의 이분법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앞서 거듭 강조했듯 ‘광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해 줄 정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망가지고 부서져 생사의 기로에 선 독자적 진보정당을 ‘광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해 줄 정당’으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참여밖에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독자적 진보정당을 당신의 ‘우리’ 안에 포함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우리가 쌓아온 ‘우리’의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가 ‘우리’ 안에 무언가를 포함한다는 것은 정말 큰 의미를 갖는다. 시험기간 한가운데 군인의 발포를 두려워하면서도 여의도로 달려가고, 한겨울 경찰의 온갖 인권침해를 뚫고 남태령으로 달려간 것은, 모두 우리가 서로를 ‘우리’로 여겼기에 가능했다. 그 뜨거운 연대의 시선을 이제 독자적 진보정당에도 보내주시라. 그것이 무조건적인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격렬한 비판과 분노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적 진보정당들에게는 우리가, 당신이 보내는 그 격렬한 비판과 분노가 필요하다. 독자적 진보정당을 우리의 일부로 여기면서, 더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