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수줍은 고백 하나. “사실 난 지금 이 순간, 어렸을 때부터 꿈꿔 온 소원 하나를 이루고 있어요. 아, 행복함에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 그래, 칼럼을 쓰고 싶었다. 내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깔끔하고 사색적인 글을. 아주 오래 전 봤던 ‘소친친’이라든가 ‘런어웨이 브라이드’ 따위의, 제대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 영화들 속 주인공이 세련되고 여유로운 인상의 칼럼니스트였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내게 이렇게 한 장의 지면을 허락해 준 나의 『서울대저널』에 감사의 말씀 한마디. 앞으로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소중한 이 한 장의 공간에 무슨 말을 담아야 할지 고민했다. 고민에 고민을 더하다 급기야 주특기인 몽상의 바다 속에 빠져들 찰나, 이번 호에 완성하지 못해 아쉬움만 남아 버린 기사 이야기를 이 지면을 통해나마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고백과 소원 성취와 한풀이를 합한 한 토막의 수다인 셈이다. “소설이 서사와 담론을 통해 사회를 고민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작고 가벼운 일상의 것을 속닥거리듯 말하는 시대가 열렸다.” 얼마 전 모 주간지에 ‘한국 소설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끝부분이다. 최근 몇 년 새 한국 소설 판매가 부진하고 이는 ‘한국 소설의 위기’로 진단할 수 있다는 기사의 결말이었다. 출판되는 소설을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읽는 편도 아니요, 문학에 대한 대단한 식견을 갖추지도 못했지만 어쩌다 소설 한두 권쯤은 사 읽으며 한두 번은 감동 섞인 눈물도 흘려 본 평범한 독자인 내게 그런 진단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기사를 읽고 나니 기자가 제시하는 ‘한국 소설의 나아갈 방향’이 어렴풋이 느껴졌는데 아마 그 방향에 동의할 수 없기에 불편했던 것 같다. 여기서 기자가 한국 소설계를 대하는 ‘진정성’을 의심한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기사에 따르면 마치 우리 시대는 과거와 엄청나게 다른 세상, 작고 가볍고 밝은 일상만이 그득한 세상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물론 일부는 맞는 말이다. 곱고 바른 나와 당신의 눈에 보이는, 아니 보고 싶은 세상은 분명 밝은 색일테니까.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70년대 난쏘공의 영희네가 지금 2006년에는 어떤 모습일까? 이 좋아진 세상엔 부당한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는 이들은 없나? 해야 하는 이야기가 밝고 맑은 이야기들 뿐일까? 나 역시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고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서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기에. 지금 여기는 모든 사람이 행복에 겨워 웃고만 지내는 세상인걸까? 아니 어쩌면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그게 다가 아님을 알면서도 형언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두려워 애써 무언가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건지. 문학의 여러 역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감성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세상의 아픔과 두려움을 건드려 어루만지고 또 소박하게나마 인간 존재의 다양한 의미를 얘기하는 것. 바로 이것이 문학이 다가가야 할 지점이 아닐까. 이런 나를 어리숙한 고집덩어리라고, 멋모르고 시비 거는 애송이라고 뭐라 한대도 어쩔 수 없지만. 문학이 이런 역할을 놓치고 그야말로 ‘소비자 대중이 바라는 것’만을 만들어 내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진정 ‘문학의 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어줍잖은 수다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