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몸, 시선의 시장에 놓이다

사진 설명 시작. 워터밤 현장 사진. 무대 화면에는 하얀색 직사각형 테두리 안에 영어로

서울을 비롯한 지역 곳곳에서 열리는 ‘워터밤(WATERBOMB)’은 어느새 여름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물대포와 물총, 화려한 무대 연출 속에서 연예인들이 공연을 펼친다. 관객들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환호한다. 한 참여자는 “콘서트와 물놀이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터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워터밤이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전시하고 소비하는 장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워터밤 사진과 영상을 자주 접해온 A씨는 “워터밤은 ‘누가 더 벗나’를 겨루는 대회가 된 것 같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워터밤 무대 위, 젖은 몸을 둘러싼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섹슈얼리티(Sexuality): 성(性)에 관련된 정체성, 욕망, 행위, 태도, 사회적 규범 등을 복합적으로 이르는 개념어. 본 기사에서는 특히 특정 성별 정체성과 강하게 연결된 성적 규범과 사회적 시선, 욕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노출, 자유와 압박 사이에서

사진 설명 시작. 2024년 워터밤 무대에서 가수 권은비가 흰색 스커트와 흰색 탱크탑 위에 파란색 비키니 상의를 입고 한 손은 허공에 들고 한 손으로는 마이크를 든 채 공연하고 있다. 그녀의 양옆에는 흰색 의상을 맞춰 입은 남성 댄서들이 팔을 들어 올린 포즈로 함께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배경에는 녹색과 파란색의 대형 스크린과 조명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대 뒤편에서는 불꽃 특수 효과가 터지고 있다. 사진 설명 끝.

워터밤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건 여성 연예인의 ‘노출’이다. 관객들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채 진행되는 화려한 퍼포먼스에 환호한다. 이 가운데, 여성 연예인에게는 ‘더 벗어야 한다’는 압박이 은연중에 가해진다. 워터밤에 참여했던 B씨는 “가수 권은비가 주목받은 이후 노출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더 강해진 것 같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과감한 의상이 연예인의 자발적 선택인지도 의문이다. 2024년 워터밤에 참여했던 B씨는 가수 권은비가 노출이 적은 의상을 입자 ‘워터밤 여신 다 죽었다’는 식의 반응이 일었다고 회상했다. 걸그룹 에스파의 무대에 ‘워터밤인데 노출이 많이 없어서 실망스러웠다’는 후기가 따른 점 또한, 워터밤에서 연예인들의 노출이 당연시됨을 보여준다.

연예인의 성별에 따라 노출에 대한 반응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 A씨는 무대 영상에 달린 댓글을 언급하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남자 연예인이 무대에서 상의를 벗으면 운동과 노력의 결과라며 감탄하는 댓글이 달리지만, 여자 연예인은 성희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 연예인의 노출이 자기표현과 압박의 결과 중 무엇인지는 딱 잘라 나눌 수 없다. 사회비평가인 이진송 작가는 “여성의 몸이 몸 자체가 아닌,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현실”을 꼬집는다. “대상화될 때만 주목받고 성취를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노출의 자발성과 강제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작가는 왜 여성에 한해서만 노출 여부가 문제시되는지, 그 불평등에 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노출 앞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여성의 몸을 둘러싼 부당한 시선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진송 작가는 여성은 다른 여성이 성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보면 본인이 수치심과 불안함을 느낀다고 짚는다. 여성의 몸이 마치 상품처럼 소비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알기 때문이다. 20대 여성 C씨는 여성 연예인의 노출에 대해 “그들의 몸이 어떤 식으로 소비될지 예상이 가서 불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체를 노출한 여성을 마냥 피해자로만 바라볼 건 아니다. 이진송 작가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관음하는 시선과 연예 산업 등에 의해 대상화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매력적인 신체를 타인에게 보여주길 원하는 것 또한 여성의 욕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이는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여성 D씨 역시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노출이 불편하다”면서도, “자기 표현의 일종으로 느껴지는 노출은 그렇게까지 불쾌하거나 수치심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2차 소비, 파편화된 몸

워터밤 무대에 선 여성의 몸은 2차 가공을 통해 온라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확산된다. 공연 직후 수많은 직캠, 숏츠, ‘움짤’이 쏟아지고, 이는 유튜브·틱톡·엑스(구 트위터)를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영상 속 여성 연예인의 몸은 슬로모션, 특정 부위 강조, 선정적 자막과 함께 재가공된다. 축제의 현장성은 지워지고, 선정적인 이미지만 남아 소비되는 것이다.

워터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 또한, 2차 소비에 대해서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D씨는 “영상 자체는 그렇게 불편하지 않은데, 그에 대한 반응을 보는 게 힘들었다”는 감상을 전했다. C씨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 연예인 노출’이나 ‘출렁’, ‘묵직’ 같은 저속한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영상을 추천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A씨, C씨, D씨는 모두 성희롱 표현인 ‘ㅗㅜㅑ’를 가장 불쾌한 댓글 중 하나로 꼽았다.

온라인상에서 여성 연예인의 몸은 조각난 채 소비된다. 일부 움직임만 잘라내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편집된 영상은, 알고리즘을 타고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된다. 이 과정에서 연예인의 몸은 성적인 이미지로 재생산되고, 댓글은 당연하다는 듯 성희롱을 일삼는다. 이처럼 여성 연예인의 노출은 시각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계속해서 성적으로 소비된다. 여성들은 이러한 굴레를 지켜보며 노출 자체에 대한 수치심과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진송 작가는 이런 2차 소비를 “디지털 성폭력의 한 양상”이라고 지적한다. 이 작가는 “영상과 이미지로 재확산되는 과정에서 여성 신체는 조각나서 인격성이 제거된다”고 말한다. 이를 지켜보는 다른 여성은, 자신 역시 언제든 이런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내면화한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검열하고, 노출을 망설이는 결과를 낳는다.

여성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워터밤은 한국사회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대하는 모순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진송 작가는 한국사회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착취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강력히 억압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더 자극적인 영상일수록 주목과 조회수가 보장된다. 여성 연예인의 무대는 상품이자, 관객의 성적 시선을 먹고 자라는 콘텐츠가 된다. 이렇듯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구조가 존재하는 한편, 벗은 여성에겐 ‘품위가 없다’는 낙인이 따라붙는다. 남성의 노출이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것과 달리, 여성의 노출 뒤엔 성희롱과 조롱의 반응이 포착된다. 이 속에서 여성은 ‘벗지 않으면 주목받지 못하고, 벗으면 욕을 먹는’ 모순적인 상황에 갇힌다.

그렇다면 워터밤은 주체적인 퍼포먼스의 장일까, 혹은 성적 대상화의 장일까. 확실한 구분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명료한 기준을 제시할 수도 없다. 여성학자 바버라 프레드릭슨과 토미-앤 로버츠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대상화하는 사회적 시선을 내면화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에도 사회의 억압이 스며있을 수 있다. 여성이 해방의 의미로 당당하게 몸을 드러내도 누군가는 그것을 성적인 이미지로만 소비할 수 있다. 결국 ‘벗는 행위’는 자유의 표현인 동시에 대상화의 틀에 갇히는 모순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양면성을 인정하고, 여성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시선이다.

누군가는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틀에 저항하고 있다. A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워터밤 무대에 오른 방송인 재재가 인상깊었다고 말한다. 재재는 워터밤에서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수영복에 준하는 노출’이라는 도식을 깼다. 대신 수영장에서 볼 수 있는 복장 중 하나인 구명조끼를 선택했다. C씨는 재재가 구명조끼를 입고 워터밤에 등장한 것이 신기하고 반가웠다고 답했다. 재재의 퍼포먼스는 노출이 당연시되던 현장에서 여성이 색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워터밤에서 누군가는 “물총을 쏘며 함께 놀아 너무 즐거웠다”는 기억을 가져가지만, 다른 누군가는 “여성 연예인의 몸이 성적으로 소비되는 게 불쾌하다”는 경험을 안고 돌아온다. 워터밤은 여성의 몸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양가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장이다.

하지만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어디까지나 여성의 것이다. 이진송 작가는 “어떤 여자가 벗어서 주목을 받았다고 해서, 육체 그 자체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하는 인격체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대에서 짧은 의상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노출하는 존재’, ‘성적 대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존재’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동시에 노래하는 가수이고, 무대를 기획한 아티스트이며,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기도 하다.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활용해 돈이나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그 섹슈얼리티의 ‘주인 자격’을 잃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언제나, 온전히 여성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당연한 명제가 인정될 수 있도록,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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