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호에서는 책 두 권과 드라마 한 편, 노래 한 곡을 소개합니다.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4.
김선우 기자 studysunwoo@snu.ac.kr

ⓒ현대문학
오늘 하루는 어땠나? 일기를 쓰며 스스로 묻고 답하는 질문이다. 마음에 품고 있던 감정과 미처 털어놓지 못한 말들을 적어 내려간다. 이때 하늘의 색깔, 마주친 사람, 동네 축제 같은 겉으로 보이는 사건은 내밀한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배경에 그친다.
미셸 투르니에는 이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산문집에선 작성자의 내면이 아닌 기억 그 자체가 주인공이다. 아끼던 들장미 관목이 태풍에 뽑혀 나간 다음 날, 저자는 나무를 잃은 슬픔을 쓰지 않는다. 대신 그날 오후 찾아온 수목 손질원에 의해 잘려나간 관목 가지의 외양을 묘사한다.
『외면일기』엔 심오한 내면 성찰도, 절절한 감정도 없다. 저자가 접한 외부 세계의 조각들이 담백한 문체로 기록돼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이 조각들은 그와 독자에게 새로운 상상과 생각을 불러온다. ‘나에게는 현실의 기록이 내면을 조각하는 원천’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마음 밖 현실에 주목해 보는 건 어떨까.
『폭주하는 남성성』
권김현영 외 7인,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동녘, 2025.
송수림 기자 songsurim@snu.ac.kr

ⓒ동녘
젠더 관점에서 폭력을 설명하려 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피해자가 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피해자가 여성이기만 하면, 혹은 여성이 아니기만 하면, 단번에 젠더와 유관하거나 무관한 사건이 될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대신 폭력을 젠더 관점에서 읽기 위해 남성성을 숙고해 보자고 제안한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러 종류의 폭력이 남성성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 폭력을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니다. 남성성 뒤엔 언제나 ‘들’이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남성성의 모양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친밀한 관계폭력, 딥페이크 성폭력 등 각종 젠더폭력부터 사이버 렉카, ‘벗방’, 안티페미니즘 운동, 제도권 정치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남성성을 살핀다. 그리고 그것들이 젠더 위계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분석한다.
‘폭주하는 남성성’이라는 제목에 유독 끌리는 이들에게, 혹은 제목이 유독 거슬리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미지의 서울》
〈tvN〉, 2025.
한정원 기자 hangrdne@snu.ac.kr

ⓒ〈tvN〉
고향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는 왈가닥 미지와, 서울에서 공기업에 다니는 모범생 미래. 반찬을 가져다주러 서울에 간 미지는 직장 내 괴롭힘을 버티고 있던 미래를 마주한다. 예기치 못한 조우의 순간, 똑같은 얼굴을 하고선 전혀 다른 표정으로 살아가던 자매의 삶이 다시금 얽힌다. 미지가 미래의 약을 대신 먹어주고, 미래가 미지의 수학 문제를 대신 풀어줬던 어린 시절처럼, 서른의 미지는 잠시 역할을 바꿔 지내자며 미래에게 손을 내민다.
미지와 미래는 뒤바뀐 자리에서 비로소 상대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이 영락없는 성장 드라마는 성장과 동떨어진 듯 보이는 가장 초라한 순간을 정확히 묘사하기에 훌륭하다. 미지는 후회와 두려움을 떨치고 문 밖으로 나가려 매일 주문을 외우지만,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언제고 다시 찾아온다. 넘은 줄 알았던 산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별안간 나타나고,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은 나를 마주한다. 그러나 도돌이표에 휩쓸리더라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미지 곁엔 이렇게 말해주는 이들과, 언젠가 같은 말을 돌려줘야 할 이들이 있다. 서른의 성장 드라마가 전하는 새삼스러운 진실, 그것을 믿고 오늘을 산다.
‘SHAME’
이랑, 2025.
손원민 기자 dnjsals1203@snu.ac.kr

ⓒ동녘
3년 전 ‘PRIDE’를 내보인 이랑이 ‘SHAME’으로 돌아왔다. 이랑은 긍지와 수치는 종이 한 장 차이라 말한다. 사랑의 다른 한 면엔 수치도 있다. 내가 ‘당신’을 무척이나 원할 때, 그토록 원하던 ‘당신’ 앞에서 내 얼굴은 얼마나 쉽게 붉어졌었나. 내가 나라는 사실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졌었나.
그러나 내가 가장 작아진 그때, 욕망하는 내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도리어 선명해진다. 이랑은 “나는 당신을 만나 비로소 몸을 의식”한다고 1분이 넘게 되뇐다. 그제야 태어난 사람같이, 심장박동 같은 비트와 함께. 몸이 먼저 있었기에 당신을 만난 것이 아니라, 당신을 만났기에 나의 몸을 안다. 당신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내가 있다. 당신이 내 삶을 추적하고 붉어진 내 몸을 만져주길 바란다. 수치심에서 출발해 볼 수도 있다고, 이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래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