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개의 얼굴이 새로 태어나는 일

한창 해가 뜨겁던 7월 말,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연 대학언론인 강좌를 듣기 위해 일주일간 서촌을 찾았다. 세 시간 남짓한 강의가 끝나면 반쯤 풀이 죽은 채 짐을 챙겼다. 호되게 혼났기 때문이다. 강사로 온 현직 언론인들의 눈에 우리 기사는 허점투성이였다. 길고 어렵다. 추상적이다. 무엇보다 ‘현장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기사에서 현장성이란 현장의 상황과 당사자의 목소리가 얼마나 생생하게 담겼는지를 뜻한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전체 인용구에서 당사자보다 전문가의 비중이 높은 기사는 보고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좋은 기사를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그곳에 발붙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매일 강의가 끝나고 저널러들과 밥을 먹으며, 그날 배운 걸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지 상의했다.

그리하여 이번 호 최대 화두는 현장성이 됐다. 소재를 확정하기 전 사전 취재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기사의 윤곽을 그리기 전 당사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려 했다. 처음으로 정보공개청구를 신청하고, 관련 부처에 전화를 걸고, 좁고 어두운 자취방과 관악구 주거상담소의 문을 두드렸다. 카메라를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를 만났다.

현장에 다녀온 저널러들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중요한 취재원을 만나고 온 한 기자는 “인터뷰 후에 기사를 보는 시야가 바뀔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느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우리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 눈물이 찔끔 났다.

완전히 새로운 진실을 직면한 이들은 대체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노트북을 열어 인터뷰이의 말을 받아 적었다. 이제껏 조사한 내용을 잠시 밀어둔 채, 현장에 몸을 내맡겼다. 나는 옆에서 턱을 괴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며칠 새 이들에게서 수만의 얼굴이 새롭게 태어나는 걸 목격했다. 기쁨과 슬픔과 근심과 분노 속에서 전에 없던 표정으로 차분히 다음 할 일을 찾아 나서는 몸짓을 발견했다. 수십 겹의 이야기를 짊어진 채 계획에 없던 곳으로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이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이번 호 기사들엔 시큼한 땀 냄새, 깊게 파인 발자국, 아스팔트 위로 올라온 열기, 습기를 견디지 못해 우그러진 종잇조각, 출처를 알 수 없는 모래 알갱이 같은 것들이 유독 많이 묻어있다. 어딘가 꿉꿉하고 오돌토돌한 글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한 편의 기사를 써내기까지 우리가 발 디딘 곳을 모두 잇는다면 커다란 조각보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그 안에 담지 못한 발바닥이 기억하는 이야기는 또 얼마나 무수할지, 다 헤아릴 자신이 없어서 눈앞에 놓인 글을 몇 번이고 읽는다.

우리 좋은 기사 한 번 써보자, 그 말 딱 하나 붙잡고 여름을 보냈다. 무엇이 좋은 보도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구색이라도 갖추고 싶어서 무진장 애쓰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구차한 변명과 섣부른 의심 없이, 닮고 싶은 것과 해내고 싶은 것 사이를 성실히 오가다 보면 어느 부분은 ‘진짜’가 돼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지면 밖에선 모두의 얼굴이 거듭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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