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립방배숲환경도서관
※본 기사에서 표기하는 ‘도서관’은 별도의 언급이 없을 시 ‘공공도서관’을 지칭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공간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현대인에게 공간은 바쁜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피처일 수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만남의 장일 수도, 삶의 흔적이 쌓여가는 집일 수도 있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공간은 늘 우리 삶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도시가 성장하면서 일정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는 머물기 좋은 공간을 이용하기 어려워졌다. 치솟는 집값은 우리를 더 좁은 집으로 밀어내고, 나날이 비싸지는 커피값을 내지 않고는 좀처럼 만남의 공간을 마련하기 어렵다.
도시는 닫혀가지만, 여전히 열려있길 포기하지 않는 공간이 남아있다. 바로 도서관이다. 오늘날 도서관은 책을 빌려 읽는 공간을 넘어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공공성의 최전선에 선 도서관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봤다.
도서관은 살아있다
현행 ‘도서관법’은 도서관을 설립·운영 주체, 혹은 설립 목적 및 대상에 따라 분류한다. 후자의 분류에 따르면, 공공도서관은 ‘공중의 정보이용·독서활동·문화활동 및 평생학습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도서관’을 의미한다. 모든 시민이 이용자라는 점에서 대학도서관이나 전문도서관과 구분된다. 하지만, 도서관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열려있진 않았다.
먼 과거, 도서관은 지배계층과 학자들이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자, 지식을 사유화하는 거점이었다. 도서관이 대중에게 개방돼 오늘날의 모습에 가까워진 건 근대사회에 들어서다. 근대 도서관은 책을 소장하는 기능 외에도 문화교육이나 평생교육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이용자에게 자기계발에 필요한 자료와 열람실 등 교육환경을 적극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도서관은 누구나 와서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됐다. 건축사사무소 서로아키텍츠 김정임 건축가는 “도서관은 책을 보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아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거실 같은 공간”이라고 말한다. 김 건축가의 말처럼, 변화한 도서관은 단순히 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도서관 이용자에게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정독도서관 2동 안내판. 자료실뿐 아니라 세미나실, 동아리실 등 다양한 공간이 있다.
변화한 도서관은 ‘사회문화센터’와 ‘여가센터’로 기능한다. 사회문화센터로서 도서관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중심이다. 이용자는 도서관을 거점으로 지역사회 구성원과 상호작용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일례로 도서관은 음악회, 영화상영회 등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동아리, 주민자치활동에 필요한 공간을 제공한다. 여가센터로서의 기능도 확대됐다. 이는 이용자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공간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휴게실이나 북카페 공간 조성이 이에 해당한다.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
오늘날의 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끊임없이 그 역할을 더해가며 진화한 결과다. 그 기저에 위치한 사회적 배경은 변화의 동력이 됐다.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발생한 다양한 문제는 도서관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수익성을 위해 획일화·대형화 된 도시계획과 건축은 공공시설이 설 자리를 빼앗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없앴다. 지역 공동체는 해체됐고, 공동생활은 쇠퇴했다. 이 과정에서 집과 일터를 오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스트레스와 소외감에 쉽게 노출된다. 김정임 건축가는 “좁아진 집은 잠을 자고 생활에 꼭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공간”일 수는 있지만, “주말에도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은 아니”라며 대안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정임 건축가는 대안 공간으로서 ‘제3의 장소*’를 제시한다. 김 건축가는 “동네에 있는 술집이나 카페처럼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고, 편안하게 머물다 올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사회적 유대감을 증진할 수 있는 제3의 장소는 카페, 술집, 미술관, 도서관처럼 다양한 형태로 도시 곳곳에 존재한다. 김 건축가는 그중에서도 미술관·박물관은 그 수가 적고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점, 카페·술집·쇼핑몰 등은 돈을 내야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사유화된 공간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이들과 구별되는 도서관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도서관은 비교적 수가 많아 접근하기 쉽고, 돈을 내지 않고도 누구나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공시설이라는 점에서 제3의 장소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김 건축가는 “좋은 동네는 결국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가 많이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도달하지 못한 도서관
그러나 이런 가능성과는 별개로 도서관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도 있다. 도서관 이용 수요가 늘어난 데 비해 공급은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수 자체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이용자 수의 증가량은 이를 압도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매년 실시하는 「전국 공공도서관 통계조사」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4년 간 도서관 수는 124개가 증가했다. 하지만, 1관당 방문자 수*는 2020년 약 7만 6천여 명에서 2024년 약 17만 3천여 명으로 약 2.3배 늘어났다. 다양한 목적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크게 늘었지만, 도서관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양적 측면에서만 문제를 제기했을 때 간과되는 질적 측면도 있다. 도보 접근성이나 지역 간 격차는 도서관 이용자의 만족감과 직결된다. 강예린 교수(건축학과)는 우리나라의 도서관 접근성이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강 교수는 “우리나라는 도시가 이미 개발되고 성장한 후에 도서관을 짓기 시작했다”며, “상대적으로 땅값이 낮은 지역을 찾아서 도서관이 움직이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도서관 수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도서관에 방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주 지나가거나 여가시간을 보내는 곳처럼, 일상생활에 밀접한 공간은 주로 동네 중심지나 상업시설이 많은 곳이다. 하지만 이런 지역은 땅값이 높아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도서관이 지어지기 어렵다.
도서관 접근성의 측면에서 지역 간 격차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토연구원의 「지역 간 삶의 질 격차: 문화·보건·보육균형발전」(2022)에 따르면, 수도권에만 전체 도서관의 45.3%가 위치한다. 시·도별 평균 도서관 접근성은 서울이 도보 14분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는데, 2위인 부산은 도보 32분으로 2배 이상 접근성이 낮았다. 최하위인 강원은 도보 122분, 그 뒤를 잇는 경북은 도보 113분이었다. 수도권 내에서도 도서관 접근성이 낮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격차는 더욱 크다.
이처럼 도서관의 양적·질적 부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도서관은 점차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작은도서관’과 ‘숲속도서관’은 그 일환이다.
작은도서관, 점점이 퍼져나가는 ‘우리’의 공간
‘작은도서관’은 모든 지역에 큰 도서관을 지을 수 없기에 등장했다. 작은도서관은 이름 그대로 규모가 작다는 물리적 특성을 가지며, 도시 구석구석에 촘촘히 퍼져있는 생활권 도서관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행 ‘작은도서관 진흥법’은 ‘주민의 참여와 자치를 기반으로 지역사회의 생활문화 향상에 이바지하는 공간’으로 작은도서관을 정의한다. 생활권과 맞닿아 있는 작은도서관은 주민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놀자 내부 모습
‘아차산아래 작은도서관 놀자(놀자)’의 김여숙 관장은 놀자의 설립 배경으로 도서관 접근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든다. 김 관장은 “놀자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광진정보도서관이 광진구의 유일한 도서관이었다”며, “지하철역에서도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라 차가 없으면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이에 가까운 곳에 주민들이 모일 공간을 마련하고자 설립된 놀자는 공동육아 모임에서 시작돼 지금은 작은도서관이란 이름을 내걸고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주로 이어가고 있다.
놀자는 주민들이 주체가 돼 직접 운영한다. 정부의 소규모 지원과 후원금으로 각종 비용을 충당하고, 자원자들이 장서 관리부터 활동 기획까지 도서관 운영에 참여한다. 전문 사서들이 운영하지 않는 만큼 어려움도 많지만, 김여숙 관장은 자발적으로 도움을 보태는 사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며 이를 ‘작은 기적’이라 표현한다. 김 관장은 “고장나거나 필요한 것이 생기면 꼭 누군가 나타나 해결해주곤 한다”며, 집수리를 해오던 이가 고장난 전등을 수리하고 체육교육과 학생이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쳐 준 일화를 소개했다.
다양한 도구와 재료로 가득한 놀자의 어린이작업실 ‘모야’
작은 기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놀자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있다. 놀자는 동네 아이들이 머무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자, 다양한 시도의 장이 되고 있다. 김여숙 관장은 “아이들이 직접 바자회를 열거나, 여러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며 다양한 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서관 이용자들을 격려한다고 말했다.
작은도서관이기에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김여숙 관장은 작은도서관이 대출률이나 방문자 수 등의 평가 지표로부터 자유롭기에 “찾아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여기고, 아이들이 안락한 공간을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연결되는 것도 놀자의 목표다. 놀자는 지역 음악가들과 협업해 음악회를 열거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초청해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도서관은 새로운 방식으로 지역 공동체와 만나고 있다. 높은 자율성을 통한 유연한 운영으로, 대형 도서관에선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내고 있다. 작은도서관의 의미는 생활권 안에 있다는 점에 그치지 않고, 지역성과 공동체성의 새로운 실험실로 확장되고 있다.
숲속도서관, 초록이 비추는 자리
한편, 자연과 함께 숨 쉬는 도서관도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를 벗어나 쉴 수 있는 공간, 타인은 물론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숲속도서관’ 이야기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녹지 공간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흐름에 맞춰 도서관 역시 변한 것이다. ‘한내 지혜의 숲’, ‘넘은들공원 책쉼터’ 등 여러 숲속도서관을 설계해 온 두 건축가의 목소리를 빌려 숲속도서관의 매력을 톺아봤다.
양천공원 책쉼터
숲속도서관은 공원과 같은 녹지 공간과 상생한다. 공원은 사람들을 숲속도서관으로 이끄는 유인책이 되고, 도서관은 날씨에 따라 이용에 제약이 따르는 공원의 한계를 보완한다. 건축사사무소 운생동의 장윤규 건축가는 “공원의 기능을 더 활성화하거나 돕는 방향으로 도서관을 짓는 것이 적절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김정임 건축가도 “악천후 때는 공원을 이용하기 어렵기에 일종의 대피처로 숲속도서관같이 작은 시설을 짓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숲속도서관은 공원의 역할을 보완하는 동시에 실내 휴식 공간이자 커뮤니티 공간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장윤규 건축가는 숲속도서관이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에 가까운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삶을 돌아볼 수 있는 휴식 공간”인 동시에 “우연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간”이라 설명한다. 김정임 건축가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자, 주민 커뮤니티 센터로서 영화제 등 다양한 행사를 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외부를 조망할 수 있는 오동숲속도서관 내부(위), 지붕만 설치된 경계공간(아래)
자연과의 연결성, 휴식과 커뮤니티 기능을 모두 담아내려는 발상은 두 건축가의 실제 설계에 잘 녹아있다. 장윤규 건축가가 설계한 ‘오동숲속도서관’은 자연과 하나된 공간으로 숲속도서관을 구현했다. 장 건축가는 “숲속도서관은 도서관 건물이 자연과 연결되는 공간으로 확장되는 게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하나의 공간, 경계 없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실제로 오동숲속도서관은 유리창으로 내부에서 외부 자연을 조망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외부엔 벽면 없이 지붕만 설치한 공간도 있어, 흐릿한 내외부의 경계 사이에서 자연과 도서관의 연결을 경험할 수 있다.

접이식 문을 개방한 양천공원 책쉼터 ©서로아키텍츠
김정임 건축가가 설계한 ‘양천공원 책쉼터*’도 비슷한 맥락을 공유한다. 김 건축가는 설계 과정에서 “내부 공간을 자연과 연결해 자연스럽게 풍경을 접하고, 다양한 행사를 열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을 고민했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책쉼터 한 면에는 유리로 된 접이식 문이 설치돼 있다. 이용자는 접이식 문 너머로 외부 자연을 조망할 수 있고, 문을 열면 안팎으로 하나된 공간에서 영화제나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즐길 수 있다.
숲속도서관은 단순히 자연 속에 위치한 도서관이 아니다. 책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잇는 징검다리다. 공원 한편에 자리 잡은 숲 안의 도서관은 일상을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르는 이들을 위한 쉼터로서, 자연과 조응하는 느슨한 공동체의 장으로서 도서관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고 있다.
도서관은 여전히 책을 품고 있는 ‘책의 집’이다. 하지만 오늘날 책의 집은 책을 내주는 역할을 넘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관계를 엮어낸다. 안팎으로 곁을 내주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누군가는 도서관을 찾아가 책장을 넘기고, 누군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 누군가는 느린 속도로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쉼을 허락한다.
도시 한복판에서, 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마을 길모퉁이에서, 공원 안에 들어찬 푸른 초목 사이에서, 도서관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행복을 건네기 위해 조용히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햇살 좋은 날, 동네 도서관에 잠시라도 들러보자. 도서관이 우릴 위해 열려있기도 하지만, 우리의 발걸음이 도서관을 여는 힘이기도 하니까.
오동숲속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