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송
시에 대한 글로 2020년 평론 활동을 시작했고, 2023년부터 연극에 대한 글도 쓰기 시작했다.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한국 근현대 시를 공부하고 있다.
※ 이 글에서 쓴 ‘우리’는 ‘성노동자와 성노동자에 연대하는 사람들’로서의 ‘우리’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나 이 사람들이 각자 상상하는 ‘더 나은 세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섣불리 나를 포함하는 범주로서 ‘우리’라는 단어를 쓰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매끄러운 읽기를 방해할 것을 감수하고 모든 ‘우리’에 작은따옴표를 붙였다. 또한 ‘성노동자와 성노동자에 연대하는 사람들’을 감히 묶어버린 ‘우리’라는 범주가 그 내부에서 ‘성노동자’와 ‘성노동자에 연대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기를 바랐다.
〈서울대저널〉에서 받은 기고 요청 메일을 읽던 중 나는 “기록으로 폭력에 맞선다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고 마치 인류사 모든 시대를 아우를 만큼 거대한 ‘우리’의 역사에 접속하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다. ‘우리’의 기록이 폭력에 맞서 승리한 적이 있었던가? 당연히 ‘우리’에게도 작은 승리의 경험들이 있었겠지만 곧바로 이렇다 할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희망의 실마리를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이 아득한 기분은 단순한 패배감이나 무력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패배’보다 훨씬 초월적인 차원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 아득함이었다. ‘죽음’처럼.
임사 체험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초월적인 아득함을 나는 놀랍게도 일상에서 꽤 자주 경험한다. 각종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온라인 성명서의 텅 빈 양식을 마주할 때. 대선 토론을 보며 어떤 후보를 찍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고민조차 할 수 없게 됐을 때. 사람이 얼마 모이지 않은 시위 현장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든 시위 현장에서 속내를 알 수 없는 경찰의 굳은 얼굴을 마주할 때. 나는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뭔가를 한다. 정치를 운운하며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으나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역사적으로 과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은 나를 자꾸만 역사 바깥의 초월적인 곳으로 밀어냈다. 그곳에는 패배가 없다. 실패도 무력도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는 역사도, 역사의 실패나 패배의 역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클라우(Ernesto Laclau)는 『이 시대 혁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New Reflections in the Revolutions of Our time)에서 특정 종류의 시간(들)을 시간이 아닌 공간 개념에 포함시킨 바 있다. 그에게 “주기적 시간, 재생산의 시간”, “소작농에게 있어서 계절의 주기가 펼쳐지는 것, 즉 지구의 자전을 묘사할 때 쓰는 그러한 시간”과 “우리의 일상이 펼쳐지는 시간”은 공간의 일종이다.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역사적 시간(Grand Historical Time)”뿐이며 역사의 시간 바깥에서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그가 역사적 변화를 이뤄내지 못한, 그래서 시간이 될 수 없는 공간의 예시로 든 것들이 ‘돌봄’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을 여성적 노동의 시간이라는 점은 몹시 공교롭고도 절묘하다. 돌봄이 여성의 것으로 자연화돼 역사 바깥에 배치되기도 하거니와, 역사에 ‘진정한’ 변화를 꾀하려는 여성들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도린 매시, 『공간, 장소, 젠더』, 정현주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4), 452쪽에서 재인용.
4월 말 웨이브(Wavve)에서 방영 중인 레즈비언 연애 예능 프로그램 《너의연애》 출연자 리원이 과거 인터넷에서 성인방송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일부 누리꾼에 의해 유출됐다. 리원을 향한 심각한 수준의 사이버 괴롭힘과 혐오가 쏟아졌다. 한편 리원에 대한 공격과 성노동자 혐오에 대항하려는 발 빠른 움직임도 있었다. 사회학자 연혜원은 4월 29일 엑스(구 트위터)에서 “#너의연애_리원과_함께하는_퀴어연대” 해시태그 운동을 제안하고*, 5월 2일 5,064개 개인·단체가 참여한 연대 성명을 조직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5월 4일에는 ‘너의 연애 리원과 함께하는 기록 연대(기록 연대)’가 글 53편이 실린 동명의 웹페이지***를 공개했다.
*연혜원의 엑스 포스트, 2025.04.29, (https://x.com/una_in_reality/status/1917207626150264994)
**「[연대서명문] 사이버불링과 혐오에 맞서 《너의 연애》 출연진 ‘리원’님과 함께 합니다」, 2025.05.02 최초 공개.
***웹페이지 ‘너의 연애 리원과 함께하는 기록 연대 Written Solidarity with ‘ToGetHer’ Liwon’, (https://liwontext.pages.dev/), 2025.05.04. 최초 공개.
발 빠를 뿐 아니라 몹시 정확하고 예리한 문제의식 하에 이뤄진 연대자들의 대응은 감동적이기 이전에 감탄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또한 촌각을 다투는 상황의 긴박함과 엄중함, 촉박한 기한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아낌없이 내줬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노동자와 그에 연대하는 이들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과 역량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편, 5월 1일 리원이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그래서 저는 약속드립니다. 프로그램이 종영된 후, 한국에서 다시는 미디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불편이나 부담이 되지 않도록, 숨어서 살겠습니다*”라는 다소 가혹한 입장을 발표한 후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너의연애》 제작사 디스플레이컴퍼니는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방송에서 리원의 분량을 “원칙적으로 최대한 삭제하는 방향으로 편집을 재조정”**하겠다는 사실상의 ‘통편집’을 예고했다. 그리고 ‘우리’는 방송과 《너의연애》 공식 소셜미디어에서 리원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여성이 역사의 시간 바깥에 배치되고 그리하여 역사에서 지워지듯이, ‘거대한 역사의 시간’이 성노동자의 존재를 지우듯이, 리원의 분량이 삭제됐고 성노동자와 성노동자로서의 리원에 대한 혐오와 공격은 아직도 여전하다.
*리원 개인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5월 1일 게시됐다가 현재는 사라졌다. 전문은 금빛나, 「‘너의 연애’ 리원 “한결에 부적절 만남 제안 사실 아냐…앞으로 숨어 살 것” [전문]」, 〈매일경제〉, 2025.05.01.
**《너의연애》 엑스 공식 계정 포스트, 2025.05.04, (https://x.com/gay__zip/status/1918923588045783363/photo/1)
나는 기록 연대가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나갈 가능성을 비관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는 새로운 낙관의 태도를 발명하고 싶고, 그것이 이미 발명됐다고 쓰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기록을 실천으로 삼습니다”라는 문장의 뒤를 잇는 기록 연대 웹페이지의 머리글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리원을 즉각 지지하고 응원하기 위해 긴급히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리원에게 쏟아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함께 겪으며 우리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 충격과 무력함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SNS상의 진 빠지는 싸움이 공식적인 퀴어 페미니스트 역사에 포함되기 힘듦을 알지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속 싸우기 위해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잘쓴 글이 아니라도 괜찮은, 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리원에게, 우리 자신에게, 여성 퀴어 페미니스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인정하고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기록 연대가 ‘무엇을 위해’ 기록하고자 하는지 그 목적을 밝히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목적들에는 목적성이 희박하다. 기록 연대는 “진 빠지는 싸움”이 “공식적인 퀴어 페미니스트 역사에 포함되기 힘듦”을 알고 있음에도 기록하고자 하며, 정치적 효능감이 아닌 “무력함”을 기록하고자 한다. 기록 연대는 “잘쓴 글”을 목표로 삼지도 않고, ‘거대한 역사의 시간’이 아닌 “리원에게, 우리 자신에게” 인정을 구한다. 53편의 글들 중에는 리원과 성노동자가 처한 현실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통찰이 드러난 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글도 많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저 리원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 한 자 한 자 어렵사리 쓰인 편지들, 일기들. 위험을 감수하면서, 혹은 위험에 대한 고민 따위 건너뛴 채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와 가장 취약한 상처까지 아낌없이 내주는 다정한 문장들. 그 글들은 오로지 서로의 곁에 있는 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서로의 곁에 있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역사적 기록의 형식으로서 부적절하다고 간주될 게 분명한 그 글들을 보면서 나는 역사라는 것이 한없이 작고 소박하게, 심지어는 보잘것없고 무력하게까지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단지 서로의 곁에 있기’가 탈정치적이고 탈역사적인 방식으로 위축된 역사의 낙오자들의 소박한 태도에 불과하다면, 역사는 단지 (‘우리’를 포함하지 않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봉사할 뿐 잔혹하고 무정하며 지금 이 순간 도처에 널린 죽음(들)에 대해서조차 무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원권을 요구하고 싶은 역사는 그런 식의 역사가 아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서로 만나지 않는 시간성을 결합하는 “살아지는 관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우리가 역사에 대한 인식에 가닿을 수 있다고 썼다. 그는 역사적 진보가 아닌 “역사의 ‘나쁜 방향’”**까지도 다룰 수 있는 철학을 모색했다. 진보를 추구하는 목적론적인 역사관에서 나아가 역사를 관계적인 것으로 재정립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가 지니는 의미를, 나는 역사에 기록되기를 목표하지 않는 글들이 서로를 돌보는 모습을 목격하며 비로소 뼈저리게 이해했다. 굳이 알튀세르의 논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본디 역사는 과거·현재·미래로 분절된 시간들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서로 떨어진 시간대에 흩어진 사건들의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명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를 뒤로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아니라 단지 서로의 곁에 있기를 원하는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기 위해 관계를 발명해 내는 이곳에 있다.
*루이 알튀세르, 「피콜로 극단」,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2017), 236쪽.
**위의 책, 229쪽.
라클라우의 주장과는 달리 ‘거대한 역사적 시간’의 바깥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진보적 발걸음의 바깥에 있는 ‘우리’의 세상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절망과 공포, 죽음의 위기에 노출되면서도 서로를 만나고자 하고 돌본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역사를 허하라.
‘역사 기록’이 되지 못하는 일기에, 편지에, 구겨서 버린 종이에, 저자가 글을 다 쓰고 죽어버린 유서에 역사를 허하라.
임신에, 출산에, 유산에, 낙태에, 섹스에, 태아가 되지 못하고 허옇게 말라붙은 정액에 역사를 허하라.
실패에, 반복에, 돌봄에, 흐르는 눈물에, 이미 말라붙은 눈물의 자국에,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눈물의 자리에도 역사를 허하라.
용주골에, 동두천 기지촌 성병관리소에, 미아리 집창촌에, ‘우리’의 공간에 역사를 허하라.
성노동자에게 역사를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