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영
영영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열심히 읽고 쓰고 있습니다. 서로의 용기가 되고 싶습니다.
광장 정치에서의 소외
12월 3일 밤, 나는 기숙사에 친구와 함께 있었다. 하필이면 기숙사가 계엄군 헬기가 지나는 길목이었는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났다. 덕분에 심한 ‘불안 씨’가 찾아와서 공황을 마주했다. 결국 자나팜*을 먹었다. 병원에 가 계엄령 때문에 공황이 왔다고 하니, 의사가 한숨을 쉬면서 지금 환자들이 다 난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계엄령이 특히 아프고 미치고 신경 비전형적인 사람**에게 가져온 충격이 얼마나 깊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자나팜: 알프라졸람, 항불안제의 일종
**신경 비전형적인 사람: 전통적 또는 평균적인 신경 발달 경로와는 다른 인지적·행동적 특성을 지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황장애, 우울장애, 자폐 스펙트럼, ADHD, 난독증 등 다양한 신경 발달 차이를 포함한다.
계엄과 탄핵 이후 지금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광장은 전통적인 집회 모습에서 벗어난 케이팝과 응원봉, 2030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까지 다양한 정체성이 만나고 얽히는 공간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 광장이 모두에게 열린 공간인가?
한 정치인은 윤석열에게 ‘망상 장애’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광장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깊은 분노와 실망을 느꼈다. 안전과 다양성을 표방하는 광장에서조차 정신질환자를 폭력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요하나 헤드바는 「아픈 여자 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요하나 헤드바, 「아픈 여자 이론」, 허지우 옮김, 〈매거진오프〉
시선의 바깥으로 치워진, 주먹을 치켜들고 있는 모든 신체들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주류 담론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견해를 따라서 ‘정치성’을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어떤 행동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 그것이 함축하는 배제와 다퉈야만 한다. 정치적이기 위해서는 공공장소에 현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단지 몸을 거리에 옮기는 것이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인구집단이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처럼 내가 행진하거나 팻말을 들거나 구호를 외치는 등 전통적으로 정치적 존재의 능력이라고 여겨지는 활동은 전혀 할 수 없이 누워있는 상태에서, 아픈 여자 이론의 중심적인 문제의식이 다음과 같이 형성되었다. 침대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은행 창문에 벽돌을 던지지?
거리에 나갈 수 없고, 구호를 외칠 수 없는,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나도 이따금 이러한 상태에 있다. 집회에 나가면 각종 소음과 빛, 밀집된 인파 때문에 자극을 받아서 불안이 찾아온다. 심하면 공황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집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정신적인 고통이 더욱 심해진다. 지금 광장만을 조명하는 투쟁은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 중심으로 이뤄져 있고, 이런 구조에서 광장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느끼게 된다.
노/프라이드의 세상에서 존버하며 저항하기
이런 수치감, 자기비난, 자기혐오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존버하기’로써 ‘노/프라이드’*의 세상에서 저항하기를 제안한다. 난 나 자신이 미친 게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수치스럽기도 하다. 병원에서 나는 불안장애, 우울장애, 공황장애, ADHD를 진단받았고, 최근엔 강박장애가 의심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러나 내가 겪는 존재의 고통은 이런 진단명으로는 다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구조적 차별과 싸우고 저항한 결과다. 나는 내가 미쳤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저항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게 자랑스럽다.
*‘프라이드(pride, 자긍심)’는 성소수자 운동에서 시작해, 소수자가 자기 정체성에 자긍심을 갖고 세상에 드러냄을 의미한다. ‘노프라이드(no pride, 반자긍심)’는 이러한 프라이드 정치에 내재된 정상성, 체제 순응성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됐다. 이 글에서 ‘노/프라이드’는 프라이드와 노프라이드 둘 중 하나, 또는 둘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됐다.(편집자 주)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이 미쳐서 스스로 수치스럽기도 하다. 제대로 미치면 인지기능이 완전히 손상돼서 일상생활을 이어가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나는 미친 내가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전혀 자랑스럽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프라이드만큼이나 노프라이드, 즉 자부심이 아니라 수치와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의 공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자신이 자랑스럽고, 때로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노/프라이드다.
광장 정치 너머의 대안적 저항을 상상하기
다카시마 린은 『이불 속에서 봉기하라』(2023)*에서, 저항의 의지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혁명이며, 광장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만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는 혁명은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배제하고, 결국 또 다른 배제와 수치심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런 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저항이 될 수 없다.
*다카시마 린, 『이불 속에서 봉기하라』, 이지수 옮김, 생각정원, 2023.
따라서 나는 광장 정치 너머의 대안적 저항을 상상하고자 한다. 현대사회는 생산적이고 건강하며 행복한 ‘정상적 존재’가 될 것을 강요한다. 존버하기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과 생산성에 대한 ‘적극적 거부’다. 적극적 저항, 즉 광장 정치에 참여할 수 없고 때로는 존재 자체가 벅찬 상황에서, 존재하며 버티는 것은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저항이 된다. 존재하며 버티는 행위는 정치적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못한 취약한 사람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새롭게 인정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헤드바식의 ‘아픈 여자’로서 서로 돌봄받고 돌보면서 세상과 불화하는 미친 상태로 존버하는 것 또한 광장에서 구호를 외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인 실천이 될 수 있다.
존버하기로 정치행위를 재정의할 수 있다면 어떨까? 12월 3일 계엄 당시로 돌아가 상상해볼 수 있다. 당일에 많은 시민이 용기를 내 국회 앞으로 모였다. 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방 안에서 약을 먹고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거리에서 목소리 내는 순간, 나는 침대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벌벌 떠는 모습이어도, 자나팜을 몇 알씩 먹고 있어도, 저항심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다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약이 부족한 친구에게 약을 나눠주고, 공황이 온 친구와 전화하며 친구를 붙들고, 친구 집에 쳐들어가 밥을 달라고 졸라대고, 서로를 돌보고 돌봄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존버하는 행위도 정치적인 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의 장벽에 적힌 말을 나누고 싶다. 존재하는 것이 저항하는 것이다. 미친 사람을 광장에서, 일상에서, 시민의 경계에서 내몰고 가두고 격리하는 세상에서, 이렇게나 미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엉엉 울고 바들바들 떨고 소리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기 이렇게 아프고, 미치고, 이상한 상태로 서로를 돌보고 붙들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존재 자체가 강력한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