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에 대한 찬반논쟁에 반대한다

photo1마음 한구석이 괜히 센티해지던 어느 날, 혼자서 녹두의 한 비디오방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비디오를 한 편 고른 후, 그 어두컴컴하고 좁디좁은 방안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울어댄 적이 있었다.눈물만 줄줄 흘린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그 때 내가 집어 들었던 영화가 바로, 나를 한없이 공포스럽게 했던 영화, 나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던 영화, 이었다.

photo1마음 한구석이 괜히 센티해지던 어느 날, 혼자서 녹두의 한 비디오방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비디오를 한 편 고른 후, 그 어두컴컴하고 좁디좁은 방안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울어댄 적이 있었다. 눈물만 줄줄 흘린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내가 집어 들었던 영화가 바로, 나를 한없이 공포스럽게 했던 영화, 나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던 영화, 이었다. ‘낙태’라는 것이 그녀들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시대에, 데미 무어(극 중 이름 :클레어)가 아이를 낙태하기 위해 자기 몸을 스스로 파괴하려는 극 중 그녀의 시도는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두통약을 다량 섭취하거나 화장실에서 기다란 뜨개질용 바늘을 질 속에 집어넣어 유산을 시도하는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낙태를 한 여성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에서, 여성이면서 가난하기까지 한 그녀가 결국 택한, 아니 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법은 수술비용이 싼 돌팔이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 뿐 이었다. 깨끗한 수술용 의자와 수술 도구가 아니라, 더러운 부엌 식탁에 몸을 눕히고 치마를 걷어 올리는 그녀를 보고 우리는 가슴 아픔을 넘어서서 감히 분노에 겨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그 곳, 그 더러운 식탁에 누운 채로 돌팔이 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그녀가 바로 우리의 할머니들이었음을, 어머니임을, 그리고 우리 자신일 수 있음을 알기에 말이다. 영화 속 그녀들이 얼마든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들의 고통에 지나칠 정도로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녀들을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사라져 가게 만든 그 모든 것에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내 일처럼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는 곧이어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 데미무어가 그렇게 사라져 간 그 집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여성들을 조명한다. 그녀가 그렇게 사라져갔던 그 집에서 다시금 둥지를 틀고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그녀들은, 과연 얼마나 달라진 세상에서 얼마나 더 인간답게 살고 있을까. 세월이 흐르고 따라서 시대가 변했으니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을 법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젠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라는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지금 시대’는 뭐 대단한 시대가 아니라, 그야말로 본질적으로 그 이전의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시대에 불과하다. 22년이 흘러 그 곳에서 살고 있는 바브라는 어머니로서 살아가기 위해 뒤늦게 시작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44년이 흘러 그 곳에서 살고 있는 크리스틴은 비혼인 상태로 임신을 하게 되지만 상대 남자에게서 낙태 수술비 몇 푼만을 받은 채 결국 모든 책임을 일방적으로 짊어졌다. 그리고 영화 속 그녀들이 속해있는 사회는, 낙태는 살인행위이며 낙태 수술을 받는 여성은 살인마라고 함부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널려있는 사회, 임신했다고 하면 낙태를 하는 것이 마치 그녀를 위한 일인 것처럼 설득하며 돈 몇 푼 쥐어주고 본연의 책임을 다했다고 착각하는 숱한 남성들이 깔려있는 사회, 내가 속해있는 바로 이 사회와 혐오스러울 만큼 닮아있다. 그리고 이 웃기는 세상 한 가운데 우리는 다름 아닌 ‘여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 듣게 된 한 수업의 강의 중 나는 임신중절과 관련하여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는 용감히 실명을 내걸고 얼굴까지 내비치며 한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는 피임에 대한 남편의 무책임과 수술 부작용에 관한 병원 측의 불성실한 정보 제공으로 인해 10년 동안 총 10회의 중절수술을 받은 여성이었다. 여러 차례의 중절수술로 인해 자궁이 유착되어 30대 중반의 나이로 이제는 생리까지 멎어버린 한 여성에 대한 방송을 시청하면서, 내 바로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생리 안 하니깐 이제 매일 ‘할 수 있어서’ 아주 좋겠네”라는 일부 남학생들이 우스갯소리라고 낄낄대며 떠드는 그따위 말들은 무시하려 노력했다. 사실, 나는 민망할 정도로 눈시울이 붉어져버린 상태였는지라 그들의 ‘개념 없음’에 대해 충고해줄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그렇게 프로그램 시청이 끝나고 이어지는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는 진부할 정도 익숙한 그 논의, 낙태에 대한 찬반 논의, 바로 그것 말이다. “당신은 낙태에 대해 찬성하시나요 혹은 반대하시나요?” 나에게 있어서 이 우스운 질문은 같은 맥락에서 우스울 수 있는 또 다른 질문 하나를 생각하게 한다. 예전에 KBS의 ‘100인 토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당신은 동성애에 대해 찬성하시나요, 반대하시나요?”라는 이슈를 주제로 다룬 적이 있었고, 이와 관련하여 한 인터넷 매체에서 이 질문이 갖는 폭력성에 대해서 기사화한 것을 본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는 항상 동성애자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이성애자와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이미 하고 있는데, 그들의 사랑방식에 대해 찬반논의를 하다니, 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무의미하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내가 바로 이 사회의 동성애자인데, 같은 사회에 속한 이성애자들끼리 모여 토론회를 열고 다른 이들의 사랑방식에 대해 찬반 논의를 한다는 것, 말 그대로 완전 코미디가 아닌가.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낙태에 대한 찬반논의를 사고할 수 있다. 내가 바로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수술대에 올라가는 여성인데, 임신한 여성의 낙태 결정에 대해서 겪어보지도 못한 이들이, 수술대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낙태 찬반논의를 하는 것, 웃기지도 않은 퍼포먼스이다. 물론 그것이 낙태에 대한 학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서, 별 악의 없이 편리하게 뚝딱 만들어 낸 질문이라고 할지라도, 그 질문은 그 자체로 여전히 폭력적이다. 감히 누가 어떤 권리로 그녀들의 낙태를 반대 혹은 찬성한다고 말하는가. 어떤 권리로 한 인간 주체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가. 낙태되는 태아의 생명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착하디 착한 당신들’이 그토록 많이 모여 있는 이 사회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토록 무관심하고 잔인할 수 있는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태아의 생명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착하디 착한 당신들’이 상대 남성의 피임에의 무책임과 그 결과인 임신의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써야 하는, 신체에 올 치명적인 충격과 후유증을 감수하고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혹은 어린 나이에 비혼모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그 많은 여성의 삶에 대해서는 그토록 개념이 없을 수 있는지, 수준 이하일 수 있는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전 기사

올림픽의 불을 밝히다

다음 기사

2004, 서울대 정보화를 점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