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시작, 제2한강교와 말죽거리 신화 史
오늘날 ‘강남’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19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3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강남, 서초구 지역은 서울시에 편입됐다. 강남은 63년 말까지만 해도 인구 2만 7천명 정도의 조용한 농촌이었다. 66년 김현옥 시장 때 영동 1, 2 지구 대규모 구획정리사업을 시작으로 강남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이와 발맞춰 전시 피난 용도라는 군사적 필요에 의해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만들어졌다. 제3한강교는 이후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68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서울~수원 구간)의 출발점이 되면서 강남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때부터 서초구내의 주시가지로 함께 정비되기 시작했다. 제3한강교 착공 당시 평당 2백원 정도였던 강남구 신사동 일대 땅값이 1년 뒤 3천원으로 뛴 것도 이 시기다. 땅 투기 바람은 66년부터 그 조짐을 드러냈다.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의 동남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당시 복덕방촌은 문정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말죽거리에 가서 땅을 사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퍼졌고 하루에도 수십 명이 말죽거리를 찾았다.66년 초 평당 2백~4백원 정도이던 말죽거리의 땅값은 68년 말 평당 6천원으로 크게 뛰어 올랐다. 그 후 경기의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 주춤한 적도 있었지만 강남의 땅값 상승률은 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았다. 63년~73년 사이 강남구 학동의 땅값은 1천 3백배, 압구정동은 8백 90배, 신사동은 1천 배 뛰었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구 신당동과 용산구 후암동의 땅값은 각각 25배 상승했다. 강남 지역의 땅값이 급상승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photo1강남 개발은 강북 억제를 위한 정부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전문가들은 강남 개발에 정부의 역할이 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70년대 서울시정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강북 인구집중 억제였다. 72년 초 양택식 당시 시장은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강북 주요지구 내에서는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각종 유흥시설 등의 신규 시설 일체를 불허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또한 종로구, 중구, 용산구, 마포구, 성북구, 성동구의 전지역 혹은 일부 지역을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묶어 개발을 제한했다. 이어 취임한 구자춘 시장은 한 발 나아가 75년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를 발표하여 아예 한강 이북 지역의 모든 전답이나 임야를 택지로 전환할 수 없도록 한다. 이에 따라 강북의 유흥시설이 강남으로 옮겨갔다. 지금의 강남 일대가 화려한 유흥가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 이때다. 이런 움직임과 함께 정부는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교량 건설가 강남지역의 격자형 도로구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련의 철저한 강북억제책이 거꾸로 강남 개발촉진책으로 작용한 것이다. 아파트 공화국의 신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전북대 강준만 (신문방속학)교수는 예전 한 신문에 실었던 ‘아파트 공화국의 미스테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한국인의 아파트에 대한 열광을 분석했다. 그는 ‘집에 대한 정서가 각별한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단지 주거공간의 의미를 넘어 현대성의 상징이자 성공의 징표다’고 지적한다. 71년 논현동의 영동 공무원 아파트 입지는 강남 아파트 단지 조성의 시작이었다. 이어 72년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가 건설됐다. 7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만들어진다. 76년~77년 영동아파트지구 개발기본계획이 수립됐고 78년 반포 우성아파트 4개동을 시작으로 강남구, 서초구에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압구정동, 대치동, 반포동, 도곡동, 서초동 등지의 대단위 아파트단지는 이 시기 건립됐다. 정부의 강북인구 분산정책들과 맞물려 강남은 아파트 결집지가 돼 중산층의 주거 중심지가 돼갔다. 78~79년 한보주택은 영동구획정리사업 2지구와 인접한 곳인 강남구 대치동에 은마아파트 대단지를 조성했다. 80년대 아파트 투기 붐의 중심에 있던 압구정 현대, 한양 아파트와 함께 이른바 대치동 빅3인 대치동 우성, 선경, 미도 아파트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90년대 이후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또다시 유명세를 타며 인기를 구가했다. 전두환 집권 초기인 80년 12월 재산권 침해의 소지가 다분한 택지개발촉진법이 제정돼 이후 아파트 개발은 더욱 힘을 받아 이어졌다. 이 법은 지금까지도 신도시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아파트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변해 웰빙 개념이 도입된 아파트가 등장하는가 하면, 소위 브랜드 아파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99년 6월 착공해 2002년 10월 완공한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는 아파트의 고층화, 고급화를 극명히 드러내며 그 이름 자체로 부와 욕망의 상징이 됐다. photo2 지하철 2호선의 파급효과 커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접근성을 빼놓을 수 없다.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은강남을 서울 중심권과 엮는 역할을 했다. 서울시의 지하철 노선계획은 당시 ‘서울 3핵도심 개발구상’ 계획과 관련돼 있다. 3핵도심 개발구상은 간단히 말해 옛도심, 영등포, 영동 등 3개 구역을 서울의 3개 핵심도심으로 만드는 도심 다핵화 정책이었다. 애초 2호선은 영등포부터 왕십리까지로 계획되었으나 3핵도심 개발구상과 궤를 함께 하며 을지로를 출발하여 영등포~영동~잠실~왕십리를 거쳐 을지로로 돌아오는 대순환선으로 건설됐다. 78년 3월 착공한 지하철 2호선은 84년 5월 전 구간이 개통됐다. 지하철 2호선의 파급 효과는 컸다. 77년 말~85년 사이 강북지역 인구는 32만 7천여 명이 늘어났으나, 강남 지역은 1백 79만 3천여 명이 늘어났다. 이 중에서도 지하철 2호선이 지나는 구간의 인구 증가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하철 건설이 인구 변화에 주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을바탕으로 향후 강남권은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8학군의 탄생으로 강남은 더욱 공고해지고강북 개발 억제책과 맞물려 서울시의 강남 개발은 강북 명문 고교의강남 이전으로 이어졌다.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은 3핵구상 실현과도심 교통난 완화를 명분으로 교고의 강남 이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중앙정부 고관들이 대개 명문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명문학교를 옮기는 것은 서울 지배층의 추억과 향수를 파괴하는 일로 인식돼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1972년 10월 28일 문교부가 종로구 화정동의 경기고등학교를 영동 제2구획지구인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긴다고 발표했을 때 여론의 저항은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결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76년 3월에 당시 전국 최대의 명문고 경기고등학교가 강남구 삼성동의 새로운 교사로 옮겨갔다. 그 후 70, 80년대에 걸쳐 강북 소재의 휘문, 숙명, 중동, 동덕여자, 경기여자, 서울세종고등학교 등의 명문 중고등학교가 강남에 둥지를 트게 된다. photo3이처럼 ‘강남 8학군’의 형성은 전통적인 명문 고등학교의 강남이전이라는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와 더불어 강남지역에 신흥 명문 학교들이 생겨났다. 강남구와 서초구는 74년 이래 시행된 고교평준화 정책 하의 이른바 강남8학군 지역으로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은 명문대 진학률을 보이며 교육의메카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강남 지역은 점차 경제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사회의 상층부에 위치한 ‘그들만의 공간’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