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한 해는 한·미 FTA라는 이슈로 뜨거운 한 해였다. 이 과정에서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리고 이 논쟁은 2007년 대선과 맞물리면서 정치담론으로 확장됐다. 처음 포문을 연 것은 최장집 고려대 교수였다. 진보 정치학자인 최 교수가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로 규정하면서 비판했던 것이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유연한 진보’를 주장하면서 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제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닌 신자유주의 대 반(反)신자유주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차베스,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부각

그런데 이처럼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근 차베스가 주목받고 있다.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avez Frias)는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83년 결성한 사회주의 성격의 조직인 ‘혁명 볼리바르 운동-200’을 기반으로 이듬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차베스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의 베네수엘라 상황은 한국과 비슷하다. 1980년대 남미외환위기 당시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구제금융을 실시하는 조건으로 남미 국가에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요구했다. 이는 1997년 외환 위기 때 IMF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처방으로 내린 것과 유사하다. 이에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했지만 결과적으로 양극화의 심화만 초래하게 됐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1992년 차베스는 사회주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록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결국 재기하여 1998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했다. 당선 직후 차베스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이른바 ‘볼리바리안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헌법에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폐기하고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려는 차베스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이 헌법에 따라 그는 2000년 다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됐고 국회의원 선거, 주지사 선거, 사법부 재구성을 통해 인적쇄신을 단행했다.
석유산업 개혁을 필두로 한 차베스식 신사회주의 정책

그러나 차베스가 추진하려던 개혁법안들은 기존의 보수세력에 의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에 차베스는 비상대권(헌법에서 보장한 대통령의 권한으로 의회의 승인 하에 1년 동안 대통령이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이용해 49개의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중에는 탄화수소에 관한 법률이 있는데 이는 석유산업에 대한 민중통제를 강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법률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산유국으로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는 1960-70년대 정치권에 밀착되어 하나의 기득권을 형성하게 됐고, 석유 수입은 일부 계급으로만 집중됐다. 풍부한 석유자원이 양극화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진된 차베스 개혁의 일환인 석유산업에 대한 민중통제는 석유를 민중경제 발전을 위해 사용하려는 차베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PDVSA 안에 있던 보수세력들을 몰아냈다. 이러한 개혁에 반발한 보수세력들은 결국 2002년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군부 내 친(親)차베스 세력과 민중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보수세력들은 보수노조의 총파업, 대통령 소환투표를 통하여 차베스를 몰아내고자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2004년 8월 15일 소환투표에서 승리한 차베스는 사회주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2005년 1월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시행했으며 2005년 3월에는 볼리바르화(貨) 고정 환율제를 채택했다. 그 후 2006년 3월에 석유 등 천연자원의 국유화 선언에 이어 올해 1월에는 통신, 전기 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차베스는 국제적으로도 반(反)신자유주의와 반미를 외치며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석유자원을 이용해 국제적으로 반미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차베스의 노선에 많은 남미 국가들이 동조하고 있다.
차베스 집권 이후의 베네수엘라 경제상황
2007년 2월 9일 브라질 언론은 제너럴 모터스(GM)가 베네수엘라에서 철수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차베스 대통령의 외국 기업에 대한 규제 조치가 그 이유였다. 도요타 역시 지난 6일 베네수엘라 정부의 달러화 매입 규제를 이유로 철수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 두 다국적 기업의 철수는 베네수엘라 자동차 산업의 성장에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또한 차베스는 지난 8일 신임 각료 임명식에서 “민영화한 모든 통신, 전력 회사들을 국유화해야 한다”면서 베네수엘라 최대 통신업체 CANTV를 지목했다. 이 소식이 전해진 뒤 CANTV의 주가가 30.1% 폭락하는 등 베네수엘라 증시가 18.66% 폭락했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CANTV 주가도 27.6% 주저앉았다. 차베스의 전력산업 국영화 언급이 최대 전력회사인 카라카스전기(EDC)를 겨냥했다는 관측 속에 이 회사 주가도 20% 폭락했다. 달러당 2150볼리바르로 고정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화 가치는 이날 역외시장에서 17% 떨어져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일련의 베네수엘라 경제 상황은 신자유주의 학계와 한국 보수언론에서 차베스를 비판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차베스가 추진하고 있는 국유화와 사회주의 경제정책은 베네수엘라의 경제상황과 국가경쟁력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2006년 베네수엘라 경제 분석에서도 ‘1999년 하반기 이후 유가가 상승세를 타고 있어 자금 사정이 비교적 넉넉한 바 이를 투자 쪽으로 유인하는 것이 좋으나 이를 대중들의 복지를 위한 소비 쪽으로 분배하는 경향이 커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성장과 양극화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차베스

그러나 거시경제지표를 보면 베네수엘라의 경제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2-2004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고 2004년 차베스가 소환투표에서 승리한 이후 GDP 성장률은 10%를 웃돌고 있다. 2005년 들어 인플레이션 역시 10%대로 떨어졌으며 실업률은 11%로 감소했다.( 참조) 이러한 경제상황에 대해 차베스 비판자들은 고(高)유가의 덕을 본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의 현재 경제상황은 오일머니에 의존해 빈민을 위한 무상의료, 국가일자리를 공급하는 포퓰리즘 정책을 편 결과라는 것이다. 그들은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이 줄어들고 있고 유가가 작년에 비해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경제 활기는 계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차베스의 경제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석유다. 석유 수입이 정부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베스의 경제정책은 석유산업에만 의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PDVSA는 석유 수익을 바탕으로 ‘거시 경제 안정화 기금’과 ‘사회 경제 발전 기금’을 운용하고 있다. 곧 석유 부문의 수익을 비석유 부문으로 재투자하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석유산업에 의존하고 있는 비율 역시 낮은 편이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2006년 11월 17일 그 해 3분기 경제성장률을 10.2%로 발표하면서 성장을 추동하는 힘은 비석유 부문에 있다고 강조했다. 지표를 보더라도 2005년 석유 부문의 성장률은 2.4% 인데 비해 제조업의 성장률은 9.5%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부문의 성장률 역시 10%를 훨씬 상회한다.( 참조) 물론 거시경제지표가 좋다고 해서 그 나라의 경제 상황 전체까지 좋다고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거시경제지표와 체감경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양극화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차베스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빈민과 대중 복지정책에 중점을 두고 있다. PDVSA의 ‘사회 경제 발전 기금’은 ‘미션’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프로젝트에 주로 사용돼 공중보건, 무료교육, 문맹퇴치, 맹인개안 등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복지 정책 외에도 비석유 부문의 경제 성장은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 제조업은 고용 창출 효과가 크고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부문이다. 이러한 제조업의 성장률이 전체 성장률과 비슷하다는 것은 빈민층에게 실질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표상으로도 차베스의 소환투표 승리 시점인 2004년 하반기에 빈곤율(최저 생계비 이하 수입) 47%, 극빈율(기초 식료품비 이하 수입) 18.6%였던 것이 2006년 전반기에는 빈곤율 33.9%, 극빈율 10.6%로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차베스는 과연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차베스는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볼리바리안 대안운동을 통해 빈부의 양극화라는 사회적인 모순과 베네수엘라가 겪었던 구조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등 발전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전 세계에 21세기형 신사회주의를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차베스식 신사회주의에 호응한 몇몇 남미 국가들이 그의 노선을 밟으려 했다. 올해 초 집권한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대외채무 상환을 유예해 복지예산을 편성하겠다고 했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또한 취임 이후 천연가스전의 국유화, 경제 통제력 강화를 위한 새 헌법 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현재 난관에 봉착했다. 라파엘 코레아의 의회 해산 계획은 의원들의 거센 반발로 주춤한 상태다. 채무유예 역시 대외채무 100억 달러 중 만기가 돌아오는 1억3500만 달러 상환 계획을 밝히며 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에보 모랄레스 또한 천연가스전 국유화 정책은 자금과 전문가 부족이라는 한계에 부딪혔고, 새 헌법 제정 노력도 지방정부의 반발로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차베스식 신사회주의를 단순히 베네수엘라에만 적합한 모델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차베스 대통령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하면서 차베스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대신 진보적 사회경제정책을 끝까지 추진한 점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차베스는 같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 더욱 미국의 입김을 심하게 받는 남미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조국과 민중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이는 한·미 FTA를 비롯한 각종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 시점에서 요청되는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