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버마에 평화를!’

우리에게 ‘버마’라는 국가는 친숙하지 않다.동남아시아에 있다는 버마를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어렵다.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나라를 ‘버마’라고 부른다.1988년 8월 8일,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총궐기(8888항쟁)를 총칼로 진압한 군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세우고자 버마를 ‘미얀마’로 개명했다.

우리에게 ‘버마’라는 국가는 친숙하지 않다. 동남아시아에 있다는 버마를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어렵다.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미얀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나라를 ‘버마’라고 부른다. 1988년 8월 8일,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총궐기(8888항쟁)를 총칼로 진압한 군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세우고자 버마를 ‘미얀마’로 개명했다. 현재 버마의 모든 시민들이 군부의 일상적인 인권 유린 앞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최소한의 정치적 의사표현만으로도 불법 체포와 감금을 당할 만큼 폭압적인 독재 속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정치범의 숫자만 해도 1천여 명에 이른다. 소수민족들에게 행해지는 ‘초토화작전’은 매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고 있으며 국경 근처의 난민캠프에 머무르고 있는 난민들은 최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군부의 탄압을 피해 이 곳, 머나먼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이들도 있다. 정확한 수치를 알기는 어렵지만,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버마인은 약 3000여명 정도. 이 중 한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경우는 18명에 불과하다. ‘타는 목마름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소망하는 버마인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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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 진행되는 ‘Free Burma Campaign’.

Free Burma Campaign, ‘버마에 자유와 평화를!’

3월 27일 낮 12시, 종각역 1번 출구 제일은행 앞에는 작은 현수막이 걸렸다. 서너 명의 활동가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Free Burma Campaign(in Korea) : 버마에 자유를! 버마에 민주주의를! 버마에 평화를!’ 올해 1월 2일에 시작해, 매주 화요일에 진행된 Free Burma Campaign이 벌써 12차를 맞이했다. 매월 첫째 주 화요일에는 한남동에 위치한 버마 대사관 앞에서, 나머지 주에는 종각역 근처에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이 날 참여한 허창영 인권실천시민연대 간사는 “정치적 난민만 있는 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에 머무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적인 정치 활동을 하는 버마인들은 고국에 돌아가면 상당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더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행인들이 버린 일부 전단지들은 공허하게 거리를 나뒹굴고 있었다. 꽃샘추위에 새초롬한 봄바람이 쌀쌀할수록, 버마의 평화를 건네는 이들의 손길은 더욱 더 간절해진다. ‘지학순평화상’ 수상한 버마 민주화운동가 살라이 박사와의 만남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고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방인으로 한국에 머무는 버마인들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셈이다. 이런 버마인들에게 커다란 경사가 생겼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해외로 추방당해 79세의 고령에 타국을 떠돌고 있는 살라이 툰 탄 박사가 제10회 ‘지학순정의평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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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한 모색’ 워크샵에서 살라이 박사가 발언하고 있다.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다. ‘지학순정의평화상’은 한국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생애를 바쳤던 고(故) 지학순 주교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7년 제정됐으며, 세계 평화, 인권 향상에 헌신한 개인과 단체들에게 매년 시상하고 있다. 수상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살라이 박사를 3월 29일,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실에서 열린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한 모색’ 워크샵에서 만날 수 있었다. 10여명이 참석, 조촐하게 꾸려진 이 날 워크샵에서는 NLD(버마민족민주동맹)한국지부에서 활동 중인 조모아 씨가 통역을 맡았다. 살라이 박사는 상금으로 올 5월부터 미국에서 유럽까지 평화순례를 하며 전 세계에 버마 민주화를 호소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한국과 버마의 현대사는 비슷한 측면이 많다”며 서로의 연대와 나눔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협박 편지도 받아, 그러나 버마 민주화를 위한 연대투쟁은 계속할 것용산2동에 위치한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버마활동가 뚜라 씨가 일하는 곳이다. ‘버마행동’의 대표이기도 한 뚜라 씨는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다국어 뉴스의 PD로서 촬영 및 편집을 도맡아 하고 있다. “제작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는 못해 방송을 만드는 게 만만치 않다”며 그는 수줍게 웃어보였다. 버마에서 기계를 공부하던 뚜라 씨는 1994년에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고국에서 88년부터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해외 경험이나 한 번 해보자고 생각하던 차에 그는 한국에서 기술을 배우며 돈을 벌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처음에는 2년을 생각하고 왔는데, 이후에도 버마의 상황이 변하지 않았어요. 그러는 동안 버마 문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국제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는 13년 째 한국에 남아 버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뚜라 씨는 2004년 5월에 난민 신청을 했고 결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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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민주화를 위한 연대 활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뚜라 씨.

기다리는 중이다. 그동안 그는 ‘버마행동’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에 버마의 사정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인권단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버마 사람들이 대부분 이주노동자들이니까 노동법 관련 교육도 하고, 버마 민중가요도 가르치고 있어요.”96년 군부의 폭력진압 이후 버마 내의 민주화 운동은 비폭력 운동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버마의 다양한 종교단체에서는 가택연금중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석방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편지쓰기 캠페인 등에 참여하고 있다. “정부가 인정하든지 말든지 간에 가슴 속에 있는 말들을 종이에 다 써서 정부에 주는 거죠.” “버마 대사관으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를 많이 받았어요.” 생명의 위협을 감수한 채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 중인 뚜라 씨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빨리 버마의 민주화가 이뤄져서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버마에 남아있는, 민주화 운동가의 가족들이 해를 입곤 했는데 미디어를 통해 이런 사실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군부가 함부로 행동하진 못해요. 국제 활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죠. 한국 사회도 버마 문제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함께 연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올 봄부터 성공회대에서 공부하게 된 버마 난민 내 툰 나잉 씨“버마에서는 군부 탄압 때문에 대학이 자주 폐쇄되고 정치학, 사회학 등을 배울 수가 없는데, 여기서 공부를 해 보니 참 재미있네요.”NLD한국지부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내 툰 나잉 씨는 올 봄 학기부터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공회대 박은홍 교수와의 인연으로 ‘아시아 시민사회 지도자과정’에 대한 정보를 듣고 지원서를 작성, 3: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합격 통보를 받고 버마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했는데 ‘13년 만에 처음으로 들은 기쁜 소식’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마음이 아팠습니다.”내 툰 나잉 씨가 한국에 온 것은 1994년의 일이다. 비밀경찰의 일상적인 감시활동과 압력은 열혈 민주화 운동가인 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졸업 후 외국행을 결심한 내 툰 나잉 씨가 한국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한국 사회에 관심이 많았어요. 버마 사람들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의 인권 상황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뉴스위크나 타임지를 통해 꾸준히 접해 왔죠. DJ하면 버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에요. 그리고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 망명했던 인도,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는 버마독재에 대항하는 단체가 있었는데 한국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가서 민주화 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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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D한국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내 툰 나잉 씨. 버마의 빨간 깃발 만큼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뜨겁게 타오른다.

상황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렵게 한국에 도착했지만 당장 생활의 문제가 눈앞에 닥쳤다.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했던 열악한 현실은 ‘버마 민주화’에 대한 그의 희망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내 툰 나잉 씨는 전국의 버마 운동가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7년, 인천, 서울, 평택, 부천, 수원 등지의 버마 대표들이 모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다음 해에 NLD한국지부가 결성됐다. 한국에서 배운 경험들로 조국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싶어“난민 신청을 하라고 조언해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우리가 난민 신청을 하고 싶어서 한국에 오는 건 아니거든요. 우린 조국이 있으니까 난민이 아니다, 몇년 내에 버마가 민주화가 되면 돌아갈 것이다, 줄곧 생각했죠.” 그러나 99년, 2명의 동지가 체포됐다. 그 중 1명이 버마로 송환될 위기에 처했다가, 태국을 거쳐 가까스로 한국에 돌아왔다. 다른 1명도 불법체류자로 체포됐는데, 피난처 이호택 대표, 박찬운 변호사, 나와우리, 좋은벗들 등의 도움으로 3개월 후에 석방됐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내 툰 나잉 씨와 그 동지들에게 극심한 불안감을 안겨줬다. “언제 체포될지 모르니까 가방 안에 옷 두 세 벌, 읽고 싶은 책 2~3권을 넣어 다녔어요. 잡혀간다면 제발 버마에 보내지 마라, 차라리 한국 감옥에 있겠다고 주장할 생각이었죠.” 언제까지나 불안한 도피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의 버마 민주화운동을 안정적으로 계속하기 위해 결국, 내 툰나잉 씨는 2000년 5월 16일에 난민 신청을 했고, NLD한국지부 회장, 부회장과 함께 2004년 1월 29일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당시 함께 신청했던 NLD한국지부의 버마인 20명 중 단 3명만이 난민 인정을 받았다.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함께 인정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가족, 친지, 동료들이 기대를 많이 하고 있어 책임감이 느껴진다는 내 툰 나잉 씨는 버마 민주화 이후에 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의 경험을 버마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논문을 쓸 생각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조국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싶어요.” 그의 한결같은 바람처럼, 빼앗긴 버마에도 곧 봄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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