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다겸 (사회학과 석사과정) danika99@snu.ac.kr
사회학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지만, 아무튼 계속 사회학을 공부합니다.
다소 유난을 떨며 대학원 입시를 치르고 대학원생이 된 지 한 달쯤 지났다. 요새는 부쩍 ‘일’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어떨 땐 일과 생활을 분리하고 싶다가도, 어떨 땐 지금처럼 나의 개인적인 삶과 노동이 긴밀하게 연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교나 연구보조 같이 분명한 ‘임금노동’ 말고 대학원생으로서 하는 공부와 이러저러한 것들을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자주 고민해보다가 금방 그만두기도 한다. 그리고 이따금씩은 페미니즘과 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는 ‘일’에 대해서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사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일에 대해서 오랫동안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일 혹은 노동에 대한 페미니즘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유급노동 안에서의 성별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다. 여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임금을 받는 노동에 동등하게 참여할 기회를 받지 못했다. 임금노동에 참여하더라도, 노동시장의 체계적인 성별 분리(sex segregation)에 따라 여성들이 주로 일하는 (혹은 일할 수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주변적인 일자리인 경우가 많다.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의무로 여겨지며 여성들의 경력이 단절되는 것, 그리고 이와도 연결되는 성별 임금 격차의 문제, 일터에서의 성차별이나 젠더 규범의 작용과 같은 문제들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시장 밖의 사적 영역에서 여성들이 해온 무급노동, 이를테면 가족 안에서 여성들이 도맡아온 돌봄노동에 주목하는 논의다. 오랜 시간 돌봄은 여성의 몫이자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노동으로서도 제대로 인정받거나 가시화되지 못했다. 요약하자면, 페미니즘은 한편으로는 여성이 임금노동시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 것,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노동이 비가시화되고 평가 절하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상당히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의식이다. 당장 우리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말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OECD 성별 임금 격차 순위를 생각해보자. 관련된 통계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판이 ‘제대로 일하기 혹은 더 나은 일하기, 기존에 해왔던 일을 인정받기’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몇몇 여성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더 적게 일하기’의 문제, 즉 노동 시간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페미니즘·젠더 연구에서 덜 주목했던 주제다. 그렇지만 나는 노동 시간에 대한 논의, 더 정확하게는 일을 ‘덜 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페미니즘과 일을 둘러싼 논의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지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모성(motherhood)의 측면에서 젠더와 노동 시간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단적으로 말하자면, 장시간노동은 일하는 여성들에게 불리하다. 일련의 연구들은 장시간노동을 강조하고 일에 대한 ‘헌신’을 중시하는 조직의 노동환경이 돌봄과 가사를 여성의 몫으로 규정하는 가족 규범과 만나면서 여성들에게 체계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지적해왔다. 장시간 노동과 직장에 대한 헌신을 요구받는 조직에서, 돌봄과 가사의 부담을 짊어진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이와 같은 조직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기 어렵고, 자연스럽게 임금이나 승진, 조직 내의 평판이나 네트워크 등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장시간노동이 가능하거나 노동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은 결코 젠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일터의 규범 자체가 돌봄에서 자유로운 전형적인 남성-생계부양자를 ‘이상적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긴 시간을 일하며 업무에 몰입할 수 있고 직장에 헌신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자의 모습을 ‘바람직한’ 것으로 상상할 때, 그러한 노동자는 돌봄에서도 가사에서도 자유로운 남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다만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단순히 ‘오래 일하면 여성 노동자들에게 불리하니 다같이 적게 일하자’라거나, ‘여성들이 돌봄과 가사의 부담 때문에 일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으니, 그런 돌봄 부담에서 벗어나서 일에 더 힘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을 도출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에 대한 젠더화된 규범(남성-생계부양자를 이상적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두는 것)과 가족 영역에서의 젠더화된 규범(여성이 가족 안에서의 돌봄과 가사노동을 전담하도록 하는 것)이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장시간노동의 문제가 놓여있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는 장시간노동 혹은 과잉노동 자체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 즉, 장시간노동이 우리 사회와 삶에서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지, 이것을 지탱하고 있는 논리는 무엇인지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를 페미니즘의 차원에서 제기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의미에 대한 논의까지 문제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동 시간에 대한 페미니즘-젠더 관점에서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여성들, 혹은 그런 상태에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여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 시간에 대한 페미니즘의 질문 혹은 도전은 무엇보다도 일의 의미와 생산-재생산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다. 노동, 그러니까 ‘생산’으로서의 일은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와 위상을 갖는가? 무엇이 노동 혹은 일로 생각되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개별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개인의 휴식과 일상이라는 차원에서든, 인구 재생산을 위한 출산과 양육이라는 차원에서든, 우리는 재생산을 단순히 생산을 위한 부차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인간이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할 때, ‘(자기 돌봄을 포함한) 돌봄’과 ‘일’의 의미는 어떻게 다시 생각돼야 하는가? 나아가, 끊임없이 더 많은 생산-성장을 통한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해서 페미니즘-생태주의의 언어로 어떠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가? 짐짓 거창하게 늘어놓은 이 질문들의 무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식의 논의는 다소간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서 제기되는 ‘상상’ 혹은 ‘도전’이 아니냐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제까지고 상상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론적이고 규범적인 논의를 구체적인 현실의 의제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 시간 단축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 같이 적게 일하자고 땅땅땅, 법을 통과시킨다고 해서 앞서서 늘어놓은 여러 질문과 과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좋긴 할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 시간 단축이라는 과제는 이처럼 이론적인 수준의 논의를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그리고 사람들이 매일의 삶에서 아주 중요하게 느끼는 이슈와 곧바로 연결지어준다. 그리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일터와 일터 밖에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여러 규범과 전제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왜 참관수업이나 상담주간 같은 학교의 여러 보호자 참여 활동이나 학교의 돌봄 서비스는 직장인 보호자의 스케줄에 맞지 않게 짜여있을까? 아니, 사실은 우리가 너무 길게 많이 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아이의 돌봄을 위해서 일을 당연히 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하기 위해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모두 나의 삶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의 연장선에 결국 앞서 말했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상상’이 놓여있는 것일 테다. 안타깝게도, 현재 윤석열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주 69시간 근무제로의 노동 시간 제도 개편은 이런 식의 질문들과는 정확히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책안이 가리키는 미래는 암담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오히려 노동 시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기폭제가 돼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굳이 복잡한 정책과 학술의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노동자에게 제대로 된 노동권과 노동조건이 보장되지 않고, 전체 노동 시간 감축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 시간 유연성’이 가져올 암담한 결과를 한국 사회에서 일했고·일하고 있고·일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미 쉽게 감각하고 있다. (초)장시간 노동이 우리의 삶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공감하고 분노하는 이야기와 경험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쌓이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는 말은 뻔하고 진부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이야말로 더 과감한 상상을 밀어붙일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제안을 슬쩍 내밀어본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케이시 윅스는 ‘페미니스트 시간 운동’을 제안하며, 돌봄에서부터 자유로운 남성 노동자를 기준으로 삼으며 여성의 무급노동을 배제하고 돌봄을 가족 내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는 노동-가족윤리에서 벗어나, 임금노동과 무급노동을 모두 아우르는 노동 시간을 설정하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도 상상해보자. ‘끊임없는 생산과 발전’이라는 자본의 논리 바깥을 상상해보자. 일과 돌봄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상상을 현실에서 정말로 시작해보자. 더 적게 일해야 한다고 함께 이야기하자. [참고문헌]안숙영 (2020), ‘젠더와 노동: 탈노동사회를 향한 상상’, 『사회과학연구』 59(1).케이시 윅스 (2016),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제현주 옮김, 동녘.Cha (2010), ‘Reinforcing separate spheres: The effect of spousal overwork on men’s and women’s employment in dual-earner household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75(2).Weeden, Cha&Bucca (2016), ‘Long Work Hours, Part-Time Work, and Trends in the Gender Gap in Pay, the Motherhood Wage Penalty, and the Fatherhood Wage Premium’, The Russell Sage Foundation Journal of the Social Sciences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