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영화에 대한 접근성과 관심도가 높은 시대다. OTT 서비스가 대중화되며 누구나 쉽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됐고, SNS에서는 영화에 대한 리뷰를 공유하는 일이 흔해졌다. 영화의 대중화에는 새로운 기술과 플랫폼의 기여도 크지만, 무엇보다 ‘내러티브’의 지분이 크다. 내러티브는 줄거리, 개연성, 주제 의식 등 영화에서 텍스트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들을 총칭하는 영화 용어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평가하며, 창작자들 역시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작품의 구성을 결정한다. 영화계에서는 내러티브를 영화 대중화의 일등공신으로 꼽으면서도,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가 영화계를 지배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내러티브가 바꾼 영화계의 모습과 그 한계를 알아봤다.
우리가 사랑하는 내러티브
내러티브는 영화의 핵심 요소다. 초기의 영화는 단순히 사물의 움직임을 담은 영상에 불과했다. 단편영화 《겁》(2021)을 연출한 차수연 감독은 “영화는 내러티브와 결합하면서 예술의 영역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영화에 줄거리와 메시지가 담기며 다양성과 대중성이 크게 확장됐다는 얘기다. 차 감독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관객이 좋아하는 특정한 요소들이 모여 체계적으로 구조를 이루면 장르가 된다”며 “장르가 생기며 다양한 취향을 가진 관객이 더 많아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씨네21> 김병규 평론가는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는 우리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갈 법한’ 사람을 담는다”며 “관객은 현실을 전제로 하는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 자신이 겪은 듯한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고 말했다. 내러티브가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람객들에게 있어 ‘영화를 봤다’는 말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해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혜원 감독은 “영화는 크게 이미지, 사운드, 내러티브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이미지는 촬영, 편집, 미술 등을 칭하고, 사운드는 음악, 음향 등을 칭한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이미지와 사운드보다는 내러티브에 집중한다. 의 영화 가이드 프로그램 ‘출발! 비디오 여행’은 ‘출발! 스포일러 여행’으로 불렸다. 줄거리 중심으로 영화를 설명하느라 영화를 보지 않은 시청자에게도 줄거리를 전부 설명해주는 ‘스포일러’가 된 탓에 붙은 별명이다.

스포일러라며 비판받던 줄거리 요약본은 현재 대중적인 감상방식이 됐다. ‘결말포함’ 요약본을 내세우는 영화 유튜브 채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병규 평론가는 “요약된 줄거리만 취하는 영화 컨텐츠가 증가한 대중들이 내러티브 중심으로 영화를 감상한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창작자에게도 내러티브는 중요하다. 주인공을 선정하고, 주인공의 대사를 고르는 일도 내러티브를 만드는 과정이다. 《K대_○○닮음_93년생.avi》(2019)의 정혜원 감독은 “창작자는 기획 단계부터 상영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야기될만한 주제를 던져야한다”며 “(내러티브에) 평소 가지는 문제의식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경우도 꽤 있다”고 설명했다. 정 감독은 “내러티브는 영화를 왜 찍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표현했다.
내러티브, 영화산업의 중심에 서다
내러티브는 영화산업을 이끌고 있다. 작품의 제작과 투자가 시나리오, 즉 내러티브를 토대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마요네즈》(1999), 《더 게임》(2007)을 연출한 윤인호 감독은 “과거 제작과정과 비교할 때 시나리오 작업에 투입되는 인력이 4배 이상 늘었다”며, “작품의 성공이 내러티브에 달렸다고 보는 분위기가 강해졌다”고 전했다.
작품 투자에 있어서도 내러티브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유명 연출자나 배우가 섭외된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투자는 내러티브에 기반해 이뤄진다. 윤인호 감독은 “제작과정에서 많은 결정이 화면보다 텍스트에 근거해 이뤄진다”며 “영화 제작의 중심이 현장에서 사무실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작자와 작품에 대한 검증이 내러티브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SNS에서 대중들이 남기는 리뷰는 관객의 관심을 내러티브로 유도한다. 시장조사전문기업 트렌드모니터에 따르면 인터넷 이용자의 76%가 온라인 리뷰를 작성한다. 평소 영화를 즐겨본다는 김주혜(소비자 18) 씨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전후에 다른 사람의 리뷰를 많이 참고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 평론가가 아니라면 내러티브 외의 요소를 분석하기 어렵다. SNS에 감상을 남기는 대중이 늘어날수록 내러티브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다양성을 잃어가는 내러티브
영화계에서는 내러티브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영화 제작이 성공할 만한 시나리오 작업에 편중되면서 ‘흥행공식’을 따르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윤인호 감독은 “액션, 코미디, 멜로 이외의 장르는 검토도 못 받는 경우도 있다”며 시나리오 작업이 대중적인 내러티브를 따라 관습화되고 있음을 비판했다. 대부분의 시나리오가 검토와 수정을 거치며 보편적인 내러티브를 따라갈 것을 사실상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흥행 가능성이 높은 내러티브에 투자가 쏠리면서 제작비가 양극화되는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한국영화산업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총제작비 100억 원 이상의 한국영화는 2008년 4편에서 2019년 17편으로 늘었다. 한국영화 전체 평균 제작비는 같은 기간 30.1억 원에서 29억 원으로 감소했다. 투자 기준을 충족한 영화에 투자액이 집중되면서 대규모 영화와 저예산·독립영화의 제작비가 양극화된 결과다.
제작비 양극화에 따른 상업영화의 규모 증대는 창작자에게 부담이 된다. 정혜원 감독은 “상업영화의 규모가 점점 커져 50~60억이 투자의 최소 단위가 됐다”고 말했다. 윤인호 감독은 “흥행 실패에 대한 부담이 커질수록 ‘중간만 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진다”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창작자는 정형화된 내러티브의 문법을 따르게 된다”고 꼬집었다.
상업영화보다 영화적 실험에 대한 자유도가 높은 독립·예술영화도 내러티브에 있어선 과감한 도전을 하기 어렵다. 독립영화인들의 등용문인 영화제에서도 내러티브를 위주로 영화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영화인에게 독립영화는 상업영화계로 진출하기 위해, 혹은 명망 높은 예술영화인이 되기 위해 거쳐가는 단계다. 정혜원 감독은 “영화제 역시 선호하는 내러티브를 따르는 영화에 높은 점수를 준다”며 “수상을 위해선 영화제에서 선호하는 내러티브를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의 관람권은 ‘풍요 속 빈곤’에 빠질 수 있다. 흥행에만 초점을 맞춘 특정 장르의 영화들은 넘쳐나지만, 특색있는 작품들은 부족해지는 것이다. 표면적으론 관객이 기호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작품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윤인호 감독은 이러한 다양성의 감소가 다양한 관객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해 일부 관객의 이탈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윤 감독은 “단기적으로는 소수의 관객이 떠날 뿐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영화산업 전반이 침체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내러티브에 치중하는 영화는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할 우려도 크다. 김병규 평론가는 “내러티브에 의존하는 작품일수록 관객을 쉽고 빠르게 설득하기 위해 현실 속 보수적·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을 이용해 개연성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조선족을 범죄집단으로 묘사하고 ‘대림동은 무법지대’라는 대사가 나오는 등 차별적 묘사로 비판을 받았던 《청년경찰》(2017)이 그 예다. 어떤 인물이 ‘조선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알고 보니 범죄자였다는 설정이 자연스러워지는 식이다. 손쉬운 줄거리 전개를 위해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하는 내러티브에 의존하는 것이다.
더 넓고 건강한 영화를 위해
내러티브와 영화의 건강한 공존을 위해선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우선 창작자가 흥행 공식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영화인들이 상업적 성공의 부담에서 벗어나야만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영화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혜원 감독은 “젊은 연출자가 관객 앞에서 창의성을 인정받을 기회가 필요”하다며 “10~20억대 소규모 영화가 늘어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정부 지원이 필수적이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 따르면 2022년 영화제작지원 예산은 2021년에 비해 22억 원 감소했다. 독립예술영화 제작지원예산도 예년보다 4억 원 감소했다. 지방의 영화 제작 지원은 더욱 열악하다. 김재한 감독은 “경남은 독립영화 제작 지원 사업 예산이 4천만 원에 불과하다”며 “매년 지원이 줄더니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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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의 활발한 제작과 도전을 위해선 상업영화계의 협력도 필요하다. 독립·예술영화 창작자들은 인맥 없이는 제작인력과 촬영장소 등 영화 제작을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정보를 구하는 것조차 어렵다. 차수연 감독은 “촬영에 동원할 수 있는 제작진, 배우, 장소에 대한 지역별 데이터베이스가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제작진들 사이에서 공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이터베이스의 공유를 통해 새로운 창작자의 등장과 원활한 영화제작을 도와야 한다는 얘기다.
한편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에서 차별적 묘사는 줄어드는 추세다.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영화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는 등장인물 설정과 대사 등에서 차별적 묘사를 없애고 등장인물들의 다양성을 높이거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이는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최근 할리우드의 많은 제작사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배우의 인종과 성별의 비율을 실제 인구 구성을 고려해 설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백인·남성 중심으로 영화가 제작돼 온 것을 개선하려는 시도다.
영화계는 작품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모두 잡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백델 테스트’, ‘마코 모리 테스트’가 대표적이다. 두 테스트는 내러티브에 드러나는 여성 인물의 비중이나 능동성, 독립성을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표다. 이러한 지표의 적용은 창작자에게 명확한 제작 지침을 줌으로써 관객에게 차별적이지 않은 묘사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동진 평론가는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작품 《귀향》(2016)의 만듦새를 혹평했다가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 영화에서도 작품성과와 영화의 메시지가 가진 가치는 별개의 항목이지만,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라는 새로운 내러티브가 두 항목을 뒤섞어 객관적 평가를 어렵게 하는 것이다.
내러티브는 영화의 대중화를 이끌며 영화산업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영화는 내러티브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지나친 내러티브 편향은 창작자의 자율성과 관객의 관람권을 해칠 수 있다.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적극 활용될 때, 영화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