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2018년에 시작된 스쿨미투를 계기로 각기 다른 세대의 두 인물이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짚어보는 이야기다. 두 명의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1976년생 김이박은 1992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1992년에 태어난 김이박은 2008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조명이 두 사람을 비춘다. 이제 오래된 기억이 돼버린 고등학교 시절을 다시 꺼내기 위해서. 어쩌면 그 기억들이 알아서 폭발하듯 다시 올라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건 스쿨미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쿨미투 소식을 듣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스쿨미투는 ‘김이박’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그 이전 세대의 학창 시절을 끌어올린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은 과거를 벗어나 무대에서 다시 살아난다.
어떤 깜빡이는 비명
김이박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고 재구성하지만, 하나의 일관된 서사는 없다. 김이박의 회고는 학창 시절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둘은 불완전한 기억의 조각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머릿속에 기억이 스칠 때마다 무대 위의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두 김이박은 특정한 상황을 재연하며 여러 인물이 된다.
서로 다른 기억들은 두서없이 마구 떠오른다. 때때로 어떤 기억은 두 김이박 중 누구의 기억인지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지금 막 번뜩이는 김이박의 기억들은 닮은 듯 다르지만 무대 위에서 뒤섞이며 하나의 장을 이룬다.
두 김이박은 먼저 학교를 떠올린다. 짧은 단발을 하고 교복을 입은 단정한 김이박의 모습이 묘사된다. 공부가 제일 중요하던 시절이다. 이내 선생님의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이박은 “공부 못하면 콱 죽어!”라고 소리치는 선생의 모습으로 분한다.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었을 두 김이박은 같은 기억을 이야기하듯 대사를 주고 받는다. 2인극의 형식에서 김이박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인 동시에 그 기억에 등장하는 사람이 된다. 김이박의 목소리는 그 사람을 묘사하는 동시에, 김이박의 삶에 그 사람이 미친 영향을 드러낸다.
김이박은 모범적인 학생으로 지내기를 요구받는다. 그건 쉴새 없이 “그런 거 할 시간에 책 한 자를 더 봐”라는 소리를 듣는 일이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는 친구를 따라 다 같이 우는 것을 금지 받는 일이다.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그만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지금’은 학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유예되는 시기다. 대학을 잘 가기 위한 행동이 아니면 모두 쓸데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질책받는다. 그래서 김이박은 마음껏 슬퍼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어둠과 그 안의 밝게 켜진 전구들 사이로 두 김이박이 움직인다. 두 사람은 팔을 뻗고 몸을 비튼다. 김이박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그게 어떤 기억이었는지 소리친다. 김이박에게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다른 부분들을 제거하길 강요당하고, 폭력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면에 첩첩이 쌓여가는 일이었다.
“너희가 나중에 대학에 가고, 어른이 돼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선생님도 있었다. 철저히 침묵하길 강요하는 선생님에 비하면 학생들을 존중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을 철저히 제한하는 여느 선생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목소리를 내라는 말은 김이박에게 공허한 메시지가 된다. 김이박은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차분하게 말해본다. 네가 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대학에 가야만 얻어지는 권한이라는 듯 말하는 목소리다.

김이박이 겪어왔던 억압은 예상치 못한 사건을 통해 폭발적으로 드러난다. 뉴스를 보던 김이박은 2008년 숭례문이 활활 타오르는 장면을 목격한다. 김이박은 “국보 일호. 뭐 어쩌라고!”라고 외친다. 화재 소리와 함께 강렬한 음악이, ‘숭례문 밖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가사가 들려온다. “나도 더 불에 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한 김이박의 외침이 음악의 리드미컬한 장구 소리와 함께 무대를 압도한다. 또 다른 김이박은 “나같이 더러운 건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규한다.
김이박의 이야기는 단순한 추억이 아닌 한 시대상의 일부다. 두 김이박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배제와 억압이라는 공통적인 경험으로 맞물린다. 한편 둘의 학창 시절은 학교 밖의 세계와는 묘하게 단절돼있는 인상을 준다. 숭례문 방화뿐 아니라 다미선교회 휴거 사건, 2008년 촛불집회 등의 시대적 사건들이 등장하며 김이박의 경험은 현대사의 흐름 위에서 서술된다. 그러나 김이박은 교육정책 반대 집회에 중고생이 대거 참여했다는 것을, 광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다고 말한다. ‘숭례문 밖에 사는 사람’이라는 가사처럼 학생 김이박은 사회 밖에 있는 사람, 목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름답기보다 솔직하게
학창 시절은 일방적인 억압과 폭력만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김이박의 기억은 그 시절을 이룬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 소환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쉽게 ‘어떤 애’로 정의되며 수많은 ‘어떤 애’들과의 미묘한 관계는 김이박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친구들이 모습이 떠오르며 기억 전구가 계속해서 켜진다.
한 축에는 친구들에 대한 불편한 기억들이 가득하다. 김이박은 비싼 젤롤펜을 여러 개 갖고 있었던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 애가 시험시간에 그 펜을 시끄럽게 사용하는 것에 화가 났다. 거친 락 음악이 나오고 김이박은 그 애를 펜으로 쉼 없이 찌르는 동작을 한다. 예민하게 삼켜져 있던 감정이 극대화되어 표현된다.
다리를 못 쓰고 공부를 잘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애에게 아이들이 못된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김이박은 “약오르잖아!”라고 소리친다. 그 애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고 느꼈던 날것의 감정을 꺼낸다. “대걸레”라 불리던 애, 온갖 소문의 한가운데에 있다 학교를 자퇴했던 아이를 떠올린다. 김이박은 그 애를 힐난하는 아이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애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울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엔 여느 때와 같이 야자를 했다. 김이박은 계속해서 자랑스럽지도 않고, 굳이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말한다. 김이박은 미성숙했고 폭력적이기도 했던 자신을 마주한다.

다른 한 축에는 “사는 게 모래 지옥 같았어도” 김이박을 살게 하는 즐거운 순간들이 있었다. 한 김이박은 하루종일 친구들과 장국영 얘기를 했고, 또 다른 김이박은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소녀시대의 춤을 연습했다. 두 김이박은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박자에 맞춰 힘차게 춤을 춘다. 헐떡거리는 호흡이 섞인다. 이런 날들 때문에 김이박들은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했다. 진부하지만 뜨거웠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던 때가 있었다.
김이박의 기억은 부드럽게 펼쳐보는 일기장의 페이지라기보다, 손끝을 아프게 찌르는 가시처럼 찾아온다. 어떤 기억들은 줄곧 잊고 살았음에도, 꺼내기 시작하면 마음의 핵심적인 한 구석을 건드린다. 미묘한 순간들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연극은 김이박의 생각과 감정을 매끄럽게 다듬지 않는다. 툭툭 거칠게 튀어나오는 기억은 김이박이 거쳐 온 학창 시절 그 자체다. 두 김이박은 하나의 이야기라 부르기에 턱없이 작은 기억들이 파도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름답지도 정돈되지도 않았지만 그저 “그땐 그랬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다.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분명히 어떤 일이 있었는데 없던 것처럼 흘러갈 때가 있다. 이상하다.” 한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에서 김이박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필사적으로 어둠 속에서, 기억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기억을 복기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쓰려는 것처럼 보인다.
김이박에 따르면 “우리는 나쁜 기억들만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것을 가장 아픈 방식으로 기억해서 소비한다.” 혹은 “나쁜 기억들을 체에 치듯 걸러내고 좋은 기억만 남기고 전부라고 믿고 싶어한다.” 김이박은 나쁘기도 좋기도 한 것, 중요하기도 사소하기도 한 것들을 모두 말한다. 김이박은 그 기억들이 얼마나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인지 보여주면서도 또 다른 사실을 깨닫는다. 그 시절 안에는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있었고,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있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김이박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일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사방에서 여러 개의 전구들이 높게 떠오르고, 김이박이 전구를 만지는 순간 불이 켜진다. 움직이며 빛나는 전구들이 김이박을 감싸며 무대를 채운다. 전구는 이제 비행기가 되고, 김이박은 비행기를 날리듯이 전구를 움직인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접어서 창 밖으로 날리며 학교를 향해 시위를 벌였다. 다 같이 목소리를 내는 순간이었다. 그날로 학교가 달라지지는 않았어도 김이박은 이를 “작은 승리”로 기억한다. 미약한 변화의 순간이 격렬한 진동처럼 무대에 퍼진다.
두 김이박은 서로에게 손을 건넨다. 힘껏 포옹한다. 다르지만 닮아있는 그들은 아프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두 김이박이 닿아있다는 사실은 위안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둘이 시간을 건너뛰어 이토록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비극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김이박은 그 시절을 더듬으며 기억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물리 선생님께 들었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해 말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사람이 모두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순간 우주와 나는 서로 모르는 채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나와 나의 세계가 조금은 변한다.”
변한다. 변한다. 지금. 지금. 한 김이박이 단어를 뱉으면, 또 다른 김이박이 같은 단어를 반복한다. 이어서 말하는 두 김이박의 목소리가 겹쳐지듯 들린다.

지금껏 기억들은 사라져 왔다. “그다음은 몰라”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김이박은 불완전한 기억의 끝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를 그리며 ‘있었다’ 위에 ‘변한다’는 단어를 겹쳐 쓴다. 무대에는 우주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점차 더 커지며 움직임이 없는 무대 위 동적인 리듬이 흐른다. 김이박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동안 점멸을 반복했던 우리의 기억을 곱씹는다. 우리는 짧은 사이 각자의 전구를 밝히고, 서로와 닿으며 연결되는 느슨한 공동체가 됐다.
무대가 암전됐다 밝아지자 객석에 앉아있던 세번째 김이박이 일어나며 말한다. “김이박은 2006년 태어나 2022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김이박은, 다시 말해서 김이박이 가리키는 익명의 우리들은 또 다른 세대를 마주한다. 김이박들은 함께 모르는 결말로 간다.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일자 2021.09.02. ~ 2021.09.19.■ 장소 선돌극장■ 작 이오진 연출 이래은 출연 백소정, 최희진■ 제작 달과아이극단■ 협력 호랑이기운, 페미씨어터&플레이포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