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중앙도서관 터널에 인권헌장에 대한 지지서명이 붙었다.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학추위)’에 따르면 학내 892명의 구성원 및 학외 94개의 단체에서 인권헌장 지지에 서명했다. 인권헌장에 담긴 정신에 동의하는 학내외의 여론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하지만 인권헌장을 제정하는 것만으로 서울대에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을지 의구심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직원은 “당장 수많은 자체직원이 법인직원과의 근로조건 차별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데, 그에 비해 ‘학내 구성원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헌장의 조항은 ‘공허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인권헌장이 제정되더라도 추상적인 선언에 그칠 것이란 지적이다. 인권헌장은 정말로 서울대를 바꿔낼 수 있는 걸까.
인권헌장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실효성에 관한 물음은 인권헌장 연구팀에서도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연구를 이끌었던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인권헌장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효성 있는 규범이 되려면 학내 거버넌스(governance) 구조에 편입돼 그 위치가 명확히 정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권헌장이 제정된다 해도 서울대 정관, 학칙 등 다른 학내 규범과의 관계가 불분명하게 남는다면, 헌장에 담긴 정신이 실제 사건에 곧바로 적용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인권헌장에는 학교 당국에 후속 조치를 요구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인권헌장은 제17조 1항에서 ‘서울대학교는 이 헌장의 이행을 위하여 필요한 규정·제도·정책을 마련하고 이를 책임 있게 시행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2항에서 구성원들이 규범의 내용을 숙지하도록 서울대 측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연구팀은 ‘인권헌장의 규범적 지위 확보와 실효성 보장을 위해서는 규정 및 제도 정비를 위한 추가적인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성원들은 인권헌장이 끝이 아닌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학추위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권헌장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입장이다. 학추위 권소원 위원장은 “인권헌장이 제정된다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인권헌장이 제정돼야 학교 당국에 구성원 인권 보장의 적극적인 이행을 요구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4년 전 인권 가이드라인(가이드라인) 제정을 주도했던 당시 총학생회 임원들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김민석 당시 부총학생회장은 인권헌장의 선언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가이드라인부터 인권헌장까지, 차별금지조항에 대한 반대에 부딪혀 몇 년째 선언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김 부총학생회장은 “학내에서 권력형 성폭력, 교수 갑질 사건 등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데도 지금껏 공동체가 어떤 것을 지향하고 지양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규범조차 없다는 것은 이를 방치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인권침해 사건에 일관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규범의 존재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인권 규범, 타 대학에선 어땠나
이미 인권 규범을 제정한 대학에선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졌을까. 카이스트(KAIST)는 2014년에 이미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제정해 평등권, 건강과 휴식 및 안전에 대한 권리 등 기본권부터 공정한 평가를 받을 권리, 조교 활동에 대한 권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권리를 선언했다. 권리장전이 만들어진 지 6년, 대학원생들은 권리장전으로 인한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카이스트 대학원 총학생회(원총) 최동혁 회장은 “열악하디 열악한 연구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론화되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것이 문서로 남게 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며 “원총에서도 학교 당국에 연구환경 개선을 요구할 때 권리장전을 근거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선언으로 시작했던 권리장전은 구체적인 제도 변화를 이끄는 마중물이 됐다. 2015년에는 ‘대학원생 육아임신지원에 관한 지침’을 만들어 출산·육아로 인한 휴학 시 최대 1년 동안 지원금을 지급하도록 근거를 마련했고, 생후 12개월 미만의 유아를 가진 여성 대학원생에게 1일 2회 이상 각각 30분 이상의 수유 시간을 보장했다. 지난해 5월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학원생의 휴가를 명문화한 ‘교수와 학생의 신의존중 헌장’이 제정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카이스트 인권윤리센터 측은 “권리장전 그 자체만 두고 본다면 구속력이 약했을지 몰라도, 지금 돌이켜보면 변화의 불씨를 잡아당긴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했다.
인권헌장에도 비슷한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인권센터 이주영 전문위원은 “그동안 학내에서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구성원들 간에 인식 차이가 있지 않았느냐”며 “인권헌장을 제정함으로써 어떤 것을 최소한의 인권 기준으로 설정할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거친다면 더 나은 대화가 가능할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직은 ‘선언’ 단계인 인권헌장이 열어젖힐 미래에 희망을 거는 셈이다.

지난 12월, 중앙도서관 터널에 ‘인권헌장 제정 서명운동 결과’가 게시됐다.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서울대 학내외의 폭넓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인권헌장 추진은 더디기만 하다. 지난해 1월 연구팀에서 내놓은 인권헌장은 1년이 넘도록 의견수렴을 거쳤다. 지난 12월에는 학추위가 천 개에 가까운 서명을 받아냈다. 이제는 평의원회 상정을 기다리는 분위기다. 평의원회 심의를 통과해야만 인권헌장이 공식적인 규범으로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다. 매달 열리는 평의원회에서 심의를 받기 위해서는 학내 부처에서 인권헌장을 안건으로 상정해야만 한다. 추진 단계까지는 학내 구성원의 지지로 힘을 보탤 수 있었지만, 앞으로의 심의 단계에서는 학교 당국의 의지 없이 나아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평의원회 측은 여전히 “인권헌장이 상정된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인권헌장 검토를 책임지고 있는 서울대학교 학생지원과에서는 “헌장의 일부 쟁점 조항들에 대해 학내 구성원 간에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어 이를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중”이라며 주저하는 듯한 답을 내놨다. 이를 두고 ‘시흥캠퍼스 반대 학생시위 폭력진압 사건 손해배상청구 소송인단’ 이시헌(자유전공 15) 대표는 “오세정 총장은 국정감사 등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인권헌장을 지지하는 듯 말하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실천이 있긴 했느냐”고 꼬집었다. 4년 전 가이드라인이 평의원회 심의까지는 발을 내디뎠다면, 인권헌장은 그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이드라인의 좌절을 경험했던 김보미 당시 총학생회장은 “지금 단계에서는 누구보다 본부에서 (인권헌장이) 평의원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강하게 책임져야 한다”며 학교 당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카이스트 인권윤리센터 측에서도 “대학원생 권리장전은 총장을 비롯한 본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제정이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인권헌장은 가이드라인과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을까. 인권헌장 제정조차 미뤄지고 있는 지금, 학내 인권의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기까지는 수많은 과제가 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