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신’의 사전적 정의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 또는 ‘벌로 일정 기간 동안 출근이나 등교, 집무 따위의 활동을 하지 아니하고 말이나 행동을 삼감’(표준국어대사전)이다. 이수빈 전 인문대학생회장(이하 수빈)이 받은 징계 처분이 바로 이 ‘근신’이다. 징계위는 그가 서어서문학과 A교수의 연구실 점거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그에게 3주간 근신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애초에 기울어져있는 권력관계
학생들이 사용했던 점거(본래 ‘학생 자치공간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그리고 징계위원회의 판단을 강조하기 위해 ‘점거’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라는 수단에 비해 근신이라는 처분은 꽤나 고상해보인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만 하면 ‘잘못’했던 것을 퉁쳐주겠다니 말이다.
하지만 학교와 학생의 관계는 애초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학교가 학생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은 징계규정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정리되어 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이든 총장의 이름으로 공식 적으로 발표된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총학생회장은 총장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없고, 학생이 학교를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고, 의사를 전달할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학교를 압박할 수 없고,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 다닐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학내에서의 권력 차이로 인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협상의 자리에서도, 학교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여러 장이 있었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교수들이 사용하는 우아한 방식을 학생들이 썼을 때 별다른 효과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학생회의 역사를 통해 이미 수없이 증명되었다. 징계위원 들이 수빈에게 내린 ‘근신’이라는 처분이 일견 고상해보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징계 기록이 남고, 장학금 수혜가 어려워지는 등의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학교는 학생을 위하는가
물론 학생들도 충분히 ‘우아한’ 방법을 쓸 수 있다. 다만 이것은 학교가 학생 들의 문제제기에 공감하고 성실하게 협력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학내 갈등은 대개 그렇지 않은 경우에 발생했다.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지난 1993년 이후 끊이지 않고 공론화되어 왔다. 당연히 학생들은 저항했다. 때로는 조직적으로, 때로는 개별적으로, 또 때로는 법의 힘을 빌리며 대학에서 권력형 성폭력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 당국의 협조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설령 파면이나 해임이 되었더라도 그것은 법원의 판결에 기반한 결정이었다. 사회학과 H교수 때에도, 서어서문학과 A교수 때에도 학생들은 언제나 그래왔듯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았고 단식, 점거, 학생총회 등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그러다 2019년, A교수가 해임되 면서 서울대학교 공동체에 희망이 생겼다. 공동체 안에서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정당한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는 희망. 기실이 희망은 학생에게나 교수에게나 직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학내에서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든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사람이며, 각자의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몇 주 간의 점거로 지쳐가던 긴 여름의 끝에 맞게 된 A교수의 해임은 우리에겐 단비와도 같았고, 파면 투쟁에 앞장섰던 학생들은 학교가 드디어 학생들의 문제제기에 공감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기뻐했었다. 하지만 겨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수빈을 징계하겠다는 학교와 맞서야 했다. 우리는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학교가 내린 해임 결정은 과연 진심이었는가? 학생을 위한 결정이었는 가? 진정으로 서울대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학생들의 문제제기에 공감하여 내린 해임 결정이라면, 도대체 왜 그 뒤에 투쟁을 주도한 학생에 대한 징계가 뒤따라야 하는가?
현상 뒤에 숨어있는 맥락과 본질
우리는 세계사 속에서 가진 자에게 우아한 방법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수많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예시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러시아 혁명이, 그리고 3.1운동이 가지지 못한 자들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고 있고, 그렇기에 이 사건들에 대해 적어도 ‘올바르지 못한’ 방법이었다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서울대학교의 학칙상 학내 시설물을 무단으로 점거하면 징계를 받게 되어 있다. 2019년 7월 한 달 간의 연구실 점거만 살핀다면 수빈은, 그리고 수빈과 함께 A교수의 연구실에 발을 들인 모두는 징계 대상자가 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징계위의 판단 근거와 거의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판단을 내릴 때에는 현상 이면에 숨어있는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 같은 행위라도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건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징계위가 수빈에게 내린 근신 처분은 의도적으로 맥락을 삭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절박하다. 그들이 쓸 수 있는 ‘우아한’ 수단은 사실상 가진 자들이 만들어 둔 틀 안의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틀 안에서 해결을 보지 못한다면 틀을 벗어나 더 강력한 방법을 찾게 된다. 2019년의 A교수 파면 운동에서 학생은 ‘가지지 못한 자’였다. 세 명의 학생들이 연달아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고, 전체학생총회에서 2,000명의 학생들이 A교수의 파면을 요구했음에도 학교 당국은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교수들 스스로가 그토록 신성시하는 연구실에 학생들이 발을 들였을 때에야 비로소 ‘반지성’을 운운하는 답변을 보냈고, 보직교수들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기 시작했다.
과격하다는 비난보다 두려웠던 것은 성폭력 교수가 학교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A교수가 해임되기까 지의 과정에서 연구실 점거가 매우 결정적인 한 수였다고 확신한다. 즉 가지지 못한 자로서 학생들은 최선,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서울대학교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고 구성원들을 안심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이러한 맥락과 함께 연구실 점거를 바라본다면 수빈은 징계를 받을 이유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수빈이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이는 인문대 학생총회와 전체학생 총회에서 내린 학우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절차였으므로 이에 동조한 수천의 학우들이 함께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다. 뒤집어 말하면 굳이 수빈만 콕 집어 징계를 내릴 이유가 너무도 빈약하다는 것이다.
학생을 위한 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바라는 건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학생들이 정당하게 문제제기를 해올 때 경청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해결에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학교 스스로가 학내의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직시하고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스스로가 보여준 비협조적인 태도, 가해자를 비호했던 작태를 반성하지 않은 채 학생의 표면적인 잘못만을 끄집어내 징계하는 학교는 학생을 위하는 학교라고 할 수 없다. 이는 특정 한 명을 본보기 삼아 다른 모든 이들에게 겁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학생들이 가면 갈수록 위축되도록 만들 것이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겁을 주고 정당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공동체는 절대 건강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건강한 학교,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는 학교를 원한다. 학교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대표자가 징계를 받은 이학교는 아직 건강하지 않다. 학생을 위한 학교는 우리 서울대 학생들에게는 아직 없는 셈이다. 학생들은 이미 건강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노력해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의 협력없이는 이 노력이 빛을 보기 힘들다. 학교가 언제쯤 학생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공감할지, 오늘도 한 가닥 희망을 점쳐볼 뿐이다.
신귀혜(국사17)
현 인문대학생회장이고, 지난 한 해동안 수빈과 A교수 파면운동에 함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