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반올림’을 어떻게 낙인찍었나

당신이 몰랐거나 혹은 속아 넘어갔을 이야기들

 10월 22일,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삼성이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요구한 수령확인증을 공개했다. 수령확인증에는 보상금을 지급하는 대신 비밀 유지와 민형사상 소송 포기가 조건으로 명시됐으며, 그를 어길 시 보상금을 반환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삼성전자는 이날 바로 자체 블로그를 통해 서명을 강요한 적도, 보상당사자에게 그러한 각서를 받은 적도 없다고 해명에 나섰다. 다수의 언론들은 당일 바로 삼성의 입장에 충실한 보도들을 내놓았고, 그 다음날 언론시민단체인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삼성 블로그 베끼는 삼성의 시녀 언론”이라는 논평을 통해 ‘진실규명에 나서야 할 언론들이 삼성의 나팔수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말 언론은 삼성을 위한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일까?

반올림_사진1.jpg
 ▲ 은수미 의원이 공개한 수령확인증 문건. Ⓒ은수미 의원실

 

반올림_캡처.JPG

▲ 10월 22일 자 삼성의 입장을 전하는 뉴스들의 헤드라인. 언론개혁시민연대는 해당 언론들이 피해자 측은커녕 삼성 관계자를 직접 취재하거나 입장을 물어보는 것조차 하지 않은 채 삼성전자 블로그의 보도 자료를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다고 지적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반올림은 어떻게 출발했는가

 반올림은 2007년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대책위)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대책위는 피해자인 故황유미 씨의 아버지인 황상기 씨가 노동보건단체와 인권단체, 지역 노조들과 함께 발족했다. 황유미 씨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2003년 일하기 시작해 2년 만에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다시 2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산업재해(산재) 신청을 준비하던 피해 노동자는 황유미 씨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이처럼 참여한 피해자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십 여개 단체로 이뤄진 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었던 까닭에 대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한다는 공통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대위는 노동부 앞에서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백혈병 피해가족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반도체산업에 대해 분명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그들은 질병의 종류를 더하고, 다른 기업으로 범위를 확장하며 이름을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으로 변경했다. 출범한 지 8년이 돼가는 지금까지 반올림은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권 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반올림은 황유미 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은 근로복지공단과 긴 법정 싸움을 벌여 2014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직업병 인정 판결을 받아냈다. 지금까지 반올림이 제보 받은 첨단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의 수는 366명이고, 그 중 70명이 도움을 받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험 보상을 신청했다.

새로운 국면으로의 돌입

 반올림과 노동자들의 길고 힘든 싸움은 2014년 5월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사과하면서 탈출구를 찾는 듯 했다. 삼성의 첫 공식 사과였을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의 경영진이 직접 나서서 보상과 재발방지 대책의 수립을 약속했기 때문에, 삼성이 더 이상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낙관적 전망이 뒤따랐다. 그 이후 삼성은 반올림과 보상 및 재발 방지대책에 관한 교섭을 이어간다. 그러나 2014년 8월에 피해자 및 피해자 가족 중 6명이 반올림에서 나와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를 발족하게 되면서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가대위가 등장하면서 교섭의 참여 주체는 삼성전자, 반올림, 그리고 가대위까지 세 곳으로 늘어난다. 같은 해 9월 가대위와 삼성 측은 제 3자로 구성된 조정위원회(조정위) 설치를 적극적으로 제안했고, 양자는 별도의 실무협상을 갖기도 했다. 12월, 삼성전자와 가대위는 김지형 변호사(전 대법관)를 위원장으로 위촉했고 조정위원 2인의 추천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백도명 교수(보건대학원)와 인하대 정강자 초빙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김 위원장의 추천을 받았고 삼성과 가대위의 동의를 받아 김 위원장과 함께 3인의 조정위를 구성하게 됐다. 조정위는 사과, 보상, 재발방지대책이라는 세 가지의 의제를 함께 다루며 이 문제를 사회적 사안으로 파악하고 접근하겠다는 운영방향을 발표했다. 이에 직접 교섭을 주장하던 반올림은 입장을 양보, 조정위의 권고안 작성에 동의한다. 

 2015년 1월 조정위는 가대위, 삼성, 반올림 3자를 조정 절차의 참여체로 해 각각의 주장과 근거 자료 등을 수렴했다. 약 6개월의 논의 기간 뒤인 지난 7월 23일, 조정위는 권고안을 발표한다. 반올림은 권고안이 일부 수정될 필요는 있지만 큰 틀에서 올바르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가대위가 자신들이 설치를 주장했던 조정위의 권고안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공익법인을 설립하고 공익법인에 보상을 신청해 받으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삼성 역시 법인 설립을 통한 보상은 피해자에게 빠른 보상이 이루어지기 위한 방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언론의 공격이 시작되다

 가대위와 삼성의 말은 일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가대위가 반올림에서 나온 이유 역시 빠른 보상을 위해서였으며, 피해자들에게 신속한 보상 절차가 이뤄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분명 조정위 안에서 논의될 수 있었다. 3자 간의 합의로 구성된 절차를 느닷없이 뒤집은 행동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상하게도,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대상은 반년 넘게 걸린 조정위 안을 거부한 가대위와 삼성이 아니라 반올림과 권고안 그 자체였다.

반올림_사진2.jpg

 ▲ 방희경 연구원이 분석한 유형에 각각 해당하는 기사의 제목을 발췌했다. 

반올림_사진3.jpg
▲ 반올림을 노골적으로 공격했던 기사들.

 삼성과 가대위가 조정안에 반대를 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올림에 대한 공격적 기사가 쏟아졌으나 방송사는 침묵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분석에 따르면, 7월 22일부터 8월 13일까지 지상파 3사(KBS, MBC, SBS)와 종편 3사(JTBC, TV조선, 채널A)는 반올림 이슈에 대해 KBS, SBS, JTBC가 각 1건씩 보도하는 데에 그쳤다. KBS와 JTBC는 조정권고안 발표 사실만 간단히 전했고 SBS는 삼성전자가 수정안을 내놓자 삼성 측을 대변하는 리포트를 1건 내보냈을 뿐이었다.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공영방송을 포함한 방송사들이 사실상 이 문제에 대해서 손을 놓고 있다”고 일갈했다.

 신문사들의 태도는 어땠을까. 서강대학교 언론문화연구소 방희경 연구원은 “조정권고안이 발표되자 주류 보수언론을 비롯해 경제지들은 권고안은 물론 반올림을 향한 노골적인 공격을 쏟아냈다”고 지적했다. 전 대표 역시 “기존의 삼성 전략은 반올림을 언론이라는 공론의 장으로부터 배제해 직업병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설정되지 않게 하던 것”이었다고 지적하며, “가족들과 소수의 활동가들이 수년간 치열하게 싸워 여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자 이젠 ‘반올림 죽이기’라는 두 번째 작전에 나섰다”고 비판했다.

 방희경 연구원은 언론매체들이 조정권고안에 쏟아낸 공격을 다섯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했다. ▲ 권고안이 제시하는 보상의 범위가 업무와의 연관성을 입증하지 않은 질병을 포괄하고 있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비판 ▲ 보상의 범위가 퇴직 후 잠복기 최장 14년까지 확장돼있다는 비판 ▲ 공익법인이 “3인 이상의 옴부즈맨을 추천해 회사의 안전보건 관리 상황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도록”하는 권고안의 옴부즈맨 제도가 삼성의 경영권 침해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비판 ▲ 공익법인 구성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판 ▲ 교섭에 참여한 세 주체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았다는 비판. 그는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캡처.JPG

반올림_사진4.jpg

▲ 농성을 시작한 지 17일 째이던 10월 23일. 피켓 뒤로 황상기 씨가 농성장 위에 앉아있는 모습과 반올림 활동가들이 보인다. 천막도, 텐트도 치지 못하게 하는 이곳에서 반올림과 피해자들은 돌아가면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김대현 사진기자 

반올림은 여전히 싸운다

 지적된 바와 같이, 조정 권고안은 반도체 문제의 사회적 해결, 투명한 해결이라는 긍정적인 취지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반올림은 언론의 비상식적인 왜곡 보도는 물론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피해자(가대위)의 보상 절차를 방해하고 있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한편 조정안 권고안을 사실상 거부한 삼성이 9월 3일 독단적으로 보상위원회(보상위)를 발족시키자 반올림은 함께하고 있는 직업병 피해자 55명과 함께 성명을 내 “삼성의 기준으로 삼성의 범위 내에서 풀어내려 한다”, “공정성과 투명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 보상위는 9월 18일 보상 신청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반올림은 10월 7일부터 ▲ 진정성 있는 사과 ▲ 피해자들의 배제 없는 보상 ▲ 투명하고 실효성 있는 재발방지대책이라는 세 요구사항을 들고 삼성전자 홍보관 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했다. 11월 20일로 삼성에 대한 직업병 투쟁이 8주년을 맞았다. 적대적인 언론 환경과, 삼성의 암묵적인 압박, 그리고 나날이 추워지는 날씨. 곧 한겨울이 오는 지금, 반올림과 피해 노동자들, 가족들은 무슨 생각으로 농성장에 머물러 있을까.

 이 날 황상기 씨는 이렇게 말했다. “반올림이 탄생한 지 8년입니다. 그런데 8년 전과 삼성이 달라진 거라곤 늘어난 피해자 수밖에 없어요. 여전히 공장에서 사람들은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화학물질에 노출돼서 죽어갑니다. 그러니 계속 싸울 겁니다. 유미 같은 사람, 나 같은 사람 더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마음이 가신다면 한번쯤은 이곳을 찾아 주십시오. 우리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들어주시고, 마음을 보태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힘이 날 겁니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전 기사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다음 기사

저 한국에서 살아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