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2015년 1월 14일로 28주년을 맞는다. ‘민주화의 길을 걷다’는 이를 기념해 박종철 열사의 행적 및 그가 촉발시킨 87년 민주화 과정을 되짚어 봤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재구성
1987년 1월 15일 오후, 1.5판으로 나온 중앙일보에는 짧은 기사가 하나 실렸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검찰청 출입기자 신성호는 그날 오전 우연한 계기로 박종철 씨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됐고, 경찰의 가혹행위로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검찰이 수사 중이라는 기사를 썼던 것이다. 경찰은 다음날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문을 통해 신속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부검결과 박종철의 죽음은 단순한 쇼크사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부검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는 사인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였음을 밝혀냈다. 물고문 과정에서 욕조 턱에 박종철 열사의 목이 눌렸고, 이것이 질식사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경찰은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박 씨가 물고문에 의해 사망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수사 중 그에게 고문을 가했던 조한경, 강진규는 구속됐고, 그들의 직속상관에게도 징계가 내려졌다.
안상수 검사를 비롯한 검찰의 수사 결과,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서울대저널> 129호 참조) 관련 수배자인 박종운 씨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후배인 박종철 열사를 연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종운 씨와의 접촉 사실을 알아낸 경찰이 1월 14일 새벽 박종철 열사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한 것이다. ‘용공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잔혹한 고문이 가해지던 그곳에서 박 씨는 경찰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연행 몇 시간 만에 숨지게 된다.
사건은 고문을 가한 경찰이 세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해 5·18 추도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조작·축소됐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경찰 및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방해로 인해 수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던 검찰은 이 발표를 계기로 재수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고문에 가담했던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경위가 추가로 구속됐다.
박처원 치안감 등 5명의 대공수사처 간부들 역시 범인축소조작 혐의로 구속됐으며, 국무총리, 안기부장, 치안본부장 등 공안관련 수뇌부가 모두 퇴진했다. 이후 부검의였던 황적준 박사에게 박종철 열사의 사인이 ‘고문에 의한 질식사’가 아닌 ‘심장마비’라는 감정서를 작성하도록 경찰 측에서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황 박사의 폭로는 결국 조작을 주도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그동안 심증으로만 존재해오던 군부정권의 잔혹함이 물증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동시에 이 사건은 끝까지 진실을 조작·축소하려 했던 전두환 정권의 ‘부도덕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박종철 열사, 민주항쟁에 불을 붙이다
80년대 중후반 민주화를 향한 움직임은 수세에 몰려있었다. 정권의 안정화 및 정당성 확보를 위해 실시됐던 일련의 유화조치들이 예기치 않게 민주화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1985년 무렵 다시 강경책을 꺼내들었다.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과, 신민당이 주도한 1986년 5·3 인천대회 등을 빌미로 재야세력과 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강경책은 86년 서울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더욱 노골화됐고, 이는 민주화운동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와 더불어 직선제로의 개헌을 위한 정치권의 노력은 개헌의 방향을 둘러싼 신민당 내부의 분열 및 국회의 협상결렬로 인해 그 힘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수세적 상황에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범국민적 저항을 촉발시켰다. 박 씨를 기리기 위한 2·7 추도회 및 3·3 국민대행진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 박 씨의 과 선배이자 그가 활동했던 학내 써클 ‘대학문화연구회’의 선배였던 남택범 씨는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시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에 굉장히 놀라워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의 분노는 4·13 호헌조치와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폭로를 거치면서 폭발했다. 이는 재야와 정치권, 종교계 및 학생사회를 총망라한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당시 국본 결성을 주도했던 유시춘 씨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산재했던 운동단체들을 하나로 모으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국본은 범국민적 민주항쟁을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본의 주도로 개최된 6·10 국민대회는 박종철 사건의 은폐조작을 규탄하고 민주헌법 쟁취를 외쳤다. 유 씨는 “직선제 개헌 쟁취라는 (참정권 회복을 위한) 국민들의 최소한의 목표를 향한 최대의 연합”이라는 말로써 6·10 국민대회의 의의를 설명했다. 6·10 국민대회에서 촉발된 6월 민주항쟁은 20여 일 간 지속됐으며,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남택범 씨는 “87년 일련의 민주화 투쟁에서 박종철 사건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씨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대학 동기였던 김치하 씨는 “누군가는 했어야 할 역할을 종철이가 맡은 것”이라 설명했다. 범국민적 민주항쟁이 촉발되어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로 이어진 역사적 흐름의 중심에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박종철 열사에 대한 기억
박종철 열사는 1964년 부산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 씨의 형 박종부 씨는 “어릴 적 종철이는 마냥 귀여운 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동생에 대한 형의 애정은 각별했다. 초등학생 시절 박종부 씨는 유도를 배웠는데, 하루는 동생이 유도 도장에 찾아왔다. 형의 낙법을 지켜보던 동생은 집에서 낙법을 따라하다 그만 어깨뼈가 부러졌다. 이후 박종부 씨는 유도가 싫어져 유도를 그만뒀다고 한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형은 동생의 현실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중학생이던 박종철 열사는 학생운동가로 활동하던 형을 보며 현실참여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김치하 씨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종철이는 부마항쟁 시위에 참여하는 등 일찍이 사회에 대한 나름의 인식을 지녔었다”고 말했다.
형은 80년 군 입대를 하면서 《전환시대의 논리》, 《민족경제론》 등의 사회과학서적들을 부산 집에 놔두고 갔다. 박종부 씨는 “나중에 알고 보니 종철이가 그 책들을 모두 읽었다더라”며 “형(본인)이 동생에게 끼친 영향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친구 김치하 씨에 따르면 박종철 열사는 굉장히 성실했다. 김 씨는 “머리가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끝까지 해냈다”면서 “남들 다 노는 고2 겨울방학 때 종철이는 독서실에서 방학 내내 살다시피 했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동시에 박 씨는 흥을 아는 사람이었다. 대학 선배인 남택범 씨는 “종철이는 기타도 잘치고 노래도 잘 불렀다”며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쾌활한 친구”라고 설명했다.

고등학생 박종철(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치하 씨는 “종철이는 아주 깔끔하고 멋쟁이었다”고 회상했다. ⓒ 김치하
재수생활을 거쳐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박종철 열사는 곧바로 학내 언더써클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남택범 씨에 따르면 그는 ‘준비된 활동가’였다. 남 씨는 “종철이는 굉장히 의식이 깨어있었고, 과·써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면서 “외모도 상당히 깔끔해 선배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운 후배”였다고 회상했다. 박종철 열사는 학생운동에 열정적이고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아크로폴리스의 집회에선 언제나 그를 찾아볼 수 있었고, 농촌 활동과 공장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거리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1986년 4월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가두투쟁에 나섰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종철 열사는 결코 투쟁에만 매몰되진 않았다. 그는 포용적인 태도로 주변사람들과 소통했다. 김치하 씨는 “굉장히 고집이 셌던 종철이가, 대학 입학 후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배려심도 지니게 됐다”고 회상했다.
군부정권이라는 시대 정황상 학생운동 참여는 위험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은 박종철 열사를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박종부 씨는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며 “종철이도 시간이 흐르면 학생운동을 그만둘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치하 씨 역시 “종철이가 운동가로서 마음을 굳힌 상황은 아니었기에 그리 우려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박종철 열사는 예기치 않게 그들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민주항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를 지켜보며 김치하 씨는 “하필 종철이가 죽었다는 생각에 처음엔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지만, 종철이가 장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박종부 씨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유족이라기보다는 이 땅을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숙연해진다”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
1989년 설립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는 해마다 박종철 열사 추모제를 주최하고 있으며, ‘박종철 인권상’ 시상 및 장학사업 등을 실시하고 있다. 누나 박은숙 씨가 기념사업회 설립에 앞장섰다. 형 박종부 씨는 2008년 퇴직 후 현재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아버지 박정기 씨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통해 민주화운동 과정 중 희생된 ‘아들들’의 뜻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치하 씨를 비롯한 지인들 역시 박종철 열사를 기리는 추모·기념활동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 중이다. 박 씨의 선배 김태호 씨는 ‘박종철출판사’를 설립하여 박 씨의 동기 최인호 씨와 함께 《박종철 평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중앙도서관 옆에 세워져 있는 박종철 열사의 흉상. ⓒ 최서현 촬영기자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박종부 씨는 “민주주의는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으며, 그 근간이 다시 위협받고 있는 것이 작금의 세태”라며 “박종철 열사가 왜 죽었는지,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를 고민하고 그 정신만큼은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치하 씨는 “종철이는 사람과 옳음에 대한 신뢰를 우리에게 가르쳐줬다”며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전파될 필요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국본을 주도했던 유시춘 씨는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스스로 획득한 우리들에게 이제는 평등하고 풍요롭게 살 권리를 향해 일어서라는 메시지를 오늘날 박종철 열사가 던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1987년 국민들은 한 사람의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역사를 이뤄냈다. 27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죽음은 여전히 기억돼야 한다.

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실에 걸린 그림. ‘전두환’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박종철을 표현하고 있다.
ⓒ 최서현 촬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