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이주자는 인간이 아닌 신으로 불린다

신 자신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외국인이다. 신은 슬프다. 이제 곧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아글라야 페터라니, 배수아 옮김,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워크룸프레스, 2021.

암전도 없이, 신(神) 여섯이 나타나 관객 앞에 마주 선다. 저 먼 메소포타미아부터 현대 카타르, 베트남, 네팔,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으로 온 신들이. 그들은 모래색 옷을 입고 정착 끝에 이주, 이주 끝에 정착하는 삶을 반복한다. 사회에서 그들은 다양한 말로 불린다. ‘불법체류자’. ‘외국인 노동자’. ‘난민’. 누구 하나 그들을 어엿한 고유명사로 불러주지 않는다. 인간이 되지 못해 신이 된 이들은, 무대에서 각자의 해방을 찾아 나선다.

사진설명 시작. 연극 〈묵티〉 포스터. 사진설명 끝.

세계 끝의 ‘연근밭’

「묵티」는 김윤식이 쓰고 극단 동이 올린 연극이다. 극은 한국의 연근밭을 배경으로, 여섯 명의 (미)등록 이주민과 선주민이 갈등하고 공존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극의 제목인 ‘묵티(मुक्ति) ’는 해방, 자유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다. 묵티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주노동자들이 각자 떠나보낸 소중한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여섯 주인공은 각자의 ‘묵티’를 찾아 연근밭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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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근밭의 하루는 단상 위에 올라간 ‘라원’이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시작된다. 라원이 거칠게 신호를 보내면, 곧 ‘기따’, ‘시따’, ‘람’, ‘홍석’이 각자의 속도로 달려와 진흙탕에서 캔 연근을 내려놓고 하나하나 닦는다. 비닐하우스에서 여럿이 함께 사는 기따와 시따는, 비좁은 컨테이너에서나마 혼자 지내는 라원이 부럽다. 어떻게 하면 컨테이너에 살 수 있냐는 물음에, 라원은 떠들지 말고 연근이나 닦으라고 내쏜다. “여기서는 언어가 필요 없어. 인간도 필요 없어, 일손이 필요하지.”

이런 풍경은 ‘이주노동자’로 묶이는 여섯 명이, 실은 서로 얼마나 다른 처지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라원과 ‘은옥’은 연근밭에서 오래 일한 숙련 노동자다. 라원은 독신자 숙소에 살 수 있으며, 은옥은 시어머니 집에서 함께 살아간다. 반면 이제 막 연근밭에 온 기따, 시따, 람, 홍석은 좁고 추운 비닐하우스에서 몸을 부대끼고 지내야 한다.

출신지도 다르다. 기따, 시따, 람, 라원은 네팔 출신이다. 은옥은 베트남 출신이다. 홍석은 심지어 한국인이다. 같은 네팔 출신이라고 해도 사정은 같지 않다. 네팔은 142개의 민족 집단으로 구성된 국가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네팔은 왕정 체제와 인민 운동 사이 내전을 겪었다. 굴곡진 네팔 현대사의 산물인 민주화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군인 출신인 라원은 왕정과 민주화 세력 양쪽을 오가며 네팔인들을 납치, 고문, 살해한 과거사를 끌어안고 있다.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정복하고 싶어”라는 섬뜩한 말을 뱉곤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피해자나 희생자의 틀에 가둬질 수 없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주민’의 시선에서 이런 차이는 사소한 것이 된다. 이주노동자에게 집을 세주기를 거부하는 마을 주민 ‘위례’는, 그들 모두를 “바퀴벌레를 몰고 오고 냄새나는” 외지인으로 여긴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자신과 외형이 다른 외국인들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인종화된 집단으로 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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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홍석은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따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린다. 람과 함께 일터를 전전해 온 홍석은 “나도 너희랑 같아”라고 정색하며 말하지만, 기따는 여전히 “네, 사장님”하고 공손히 거리를 둘 뿐이다. 특정한 피부색을 경제적 지위나 신분으로 연결 짓는 선입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인종적 표지는 누군가를 계급적인 위계로 밀어넣는다. 피부가 한국인 같거나 같지 않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치명적 오해를 받는다.

극은 이처럼 이주민의 범주가 다분히 모호함을 드러낸다. 국적이 같은 이주노동자도 배경과 처지가 다르고, 때로는 한국인도 곤궁에 떠밀려 이주노동자와 다름없이 열악한 환경을 감수해야 한다. 이들은 결국 자본주의 세계에서 뿌리 뽑힌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점점 더 빠르게 자본, 노동, 정보가 이동하는 가운데, 누구나 생존을 위해 정착지를 떠난다. 그러므로 이주는 ‘남 일’이 아니다.

결국 이건 자본주의가 점령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다. 연극 소개문에서 말하듯, 연근밭은 ‘자본주의 폐허의 끝’을 상징한다. 이 폐허에는 이주민뿐 아니라 선주민들도 엉켜있다. 연근밭 주인인 ‘복주’와 ‘택주’는 소멸해 가는 농촌에서 어떻게든 비용을 줄여 생존하고자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고용한다. 이주노동자의 주거권을 걱정하는 복덕방 주인 ‘정희’도, 사실은 주택 계약으로 중계 이득을 볼 속셈이다. 자본주의 세계 끝에, 바로 이 연근밭이 있다.

신성한 생명은 인간이 아니다

「묵티」는 특이하게도 이주자들을 ‘신’이라고 부른다. 극의 맨 처음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신화에서 막 튀어나온 존재처럼 자기를 소개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신과 다르게, 연극에서 드러나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는 고귀하지 않다.

이 극이 채택하는 신격화는 역설적인 의미를 낳는다. 신은 어디에나 편재하지만, 그렇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은 이 속성을 뒤집어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드러낸다. 신은 정착할 수 없고, 인간의 법 바깥에 있으며,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비인간을 은유한다.

한국에 체류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주 끝에는 정착이 있고, 정착 끝에는 이주가 있다”는 기따의 말처럼, 그들은 ‘새로운 집’을 찾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주를 경험한다. 그렇게 찾은 집은 늘 열악하다. 기따와 시따는 비닐하우스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왔지만, 연근밭에서 일을 시작하며 다시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법적으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주택 계약을 할 수 있지만, 임대인들의 혐오와 편견으로 인해 그들은 어디서도 집다운 집을 찾을 수 없다.

이들은 자주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연근밭에서 이들은 한 명의 인격체라기보단 하나의 부품에 가깝다. 결혼 이주로 한국에 정착한 은옥은 남편으로부터 일상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은옥의 아들 역시 ‘한국말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라원은 이주노동자를 사적으로 제재하는 ‘국호’로부터 이름 대신 ‘벌레’라고 불린다.

비인간적 대우가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기따와 시따의 묵티는 무리한 미등록 이주자 단속에 쫓기다가 논바닥에서 사망했다. 람의 묵티는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을 짓다가 산업 재해로 사망했다. 이것은 연극 밖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다. 당장 올해 10월에도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뚜안 씨가 단속을 피해 올라간 실외기 위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준비 기간 10년 동안, 이주노동자 최소 6,750명이 사망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제대로 집계되지도, 사인이 명확히 파악되지도 않는다.

*‘실외기에 숨어 불법체류 단속 피하던 이주노동자 추락사’, 〈한겨레〉, 2025. 10. 29.

법 밖으로 밀려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취약함을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극 중 등장하는 ‘한국인보호연맹’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사적으로 포획하는 극우 자경단이다. 여기서 활동하는 국호는 라원을 체포하고, 연근밭 노동자들의 비닐하우스를 불태운다. 이는 경찰에 마음 편히 신고할 수 없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상황을 이용한 범죄다. 이들의 행동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우범자며 ‘국민’의 이익을 위협한다는 혐오가 깔려있다. 한국인보호연맹은 실제로 예멘 난민 및 이주민에 대한 반동으로 생겼던 ‘자국민보호연대’와 같은 국내 극우 단체를 바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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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달리,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한국인의 이익을 침해하긴커녕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연근밭 주인 복주와 택주는 “얘네들(이주노동자)”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한국인보호연맹을 규탄한다. 대한민국은 오래전부터 자국민이 기피하는 업종을 이주노동자에게 위탁해 왔다. 특히나 농어촌에서는 이주노동자 없이 작물을 원활히 관리하고 수급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신과 같은 행위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 없이는 특정 산업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주민을 ‘신’이라 추앙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이 ‘도움 되는’ 존재인 한에서만 환영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은 가치 있는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자국민을 돕는 영웅적 행동을 입증하는 한에서만 사회에 수용된다. 이때 기따, 시따, 람, 은옥, 라원은 대등한 인간이 아니라, 다시 기복(祈福)의 대상인 신으로 전락한다.

이 극이 채택하는 신이라는 명칭은, ‘비인간’으로서든 ‘초인’으로서든 사회의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절묘하게 반영한다.

모두가 집을 떠난다

복주, 택주, 위례, 국호…… ‘친숙한’ 한국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 극은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농촌에서 살아가는 한국인 선주민도 함께 조명한다. 복주와 택주는 연근밭을 운영하는 농장 주인이다. 위례는 결혼 이주를 한 은옥의 시어머니다. 국호는 이주민에게 사적 제재를 일삼는 자경단원이다. 이런 다양한 정체성은 그들이 이주민과 맺는 관계를 저마다 다르게 만든다.

연근밭 노동자를 대하는 복주와 택주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이주노동자 없이는 연근밭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아끼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자경단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에 그들을 걱정하고 보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유용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복주와 택주는 손해에 민감하다. 비용을 절감하고자 이주노동자에게 춥고, 좁고, 지저분한 임시 숙소를 제공하고선 숙식비를 월급에서 공제한다. 그들은 자경단을 감시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에 몸소 자본 다음에야 그 열악함을 체감한다.

위례는 은옥을 며느리로 삼고서도 외국인에 대한 배척을 놓지 않는다. 위례의 아들은 은옥과 결혼 후 취중 사고로 사망했다. 손자 역시 극 중에서 괴롭힘으로 사망한다. 위례는 이 모든 비극을 외지인인 은옥이 몰고 온 화로 돌린다. 정작 자신의 아들이 은옥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았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자신의 손자를 죽음으로 내몬 외국인 혐오에 가담하며, 위례는 그저 은옥을 탓할 따름이다.

국호는 잔인하게 이주노동자를 ‘사냥’한다. 그는 라원을 가스총을 위협하고 폭력적으로 결박한 끝에 그를 불법 구속한다. 국호는 일전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벌인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가해자는 국내에서 형사 처벌을 받지 않고 추방당했다. 국호는 이런 분노를 다른 이주노동자에게 전가한다. 이주노동자가 신호를 위반하면서까지 오토바이를 몰아야 했던 이유는 건너뛴 채로.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이주노동자를 착취하고, 배척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이는는 악랄함보다는 취약함에 기인한다. 그들은 귀농의 길을 택한 불안정한 자영업자다. 고립에 처한 여성 노인이다. 가족을 사고로 잃은 유가족이다.

그들의 그런 조건은 이주민이 겪는 취약함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극도로 도시화된 사회에서 복주와 택주가 겪는 경제적 압박도, 빈약한 사회적 안전망 안에서 돌봐주는 이 없이 고립된 위례도, 구조적인 원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폭력에 소중한 이를 뺏긴 국호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주노동자와 선주민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같은 구조 안에서 똑같이 내몰리는 존재다. 모두가 흔들리는 땅 위에 서있다. 한쪽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한쪽을 넘어뜨릴 게 아니라, 손을 붙잡고 그 땅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따라서 이 극은 이주민과 선주민을 대립 구도에 고정하는 대신, 여러 방식으로 연결 짓는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모두 유사한 색채의 의상을 입는다. 옷의 형태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 모래 빛깔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그것은 이 척박한 땅의 보호색이다. 무대의 땅은 여러 겹으로 포개진 합판으로 구현됐다. 그 울퉁불퉁함은 수많은 지층을 암시한다. “이 땅의 인간들은 오래도록 이 땅에는 이주민이 없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우리가 고정된 집단이라고 믿는 ‘한민족’도, 어디선가 이주해 온 인구 집단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계속 변해온 구성물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온 복주와 택주처럼 이주를 겪고 있다. 땅은 그 위를 거닌 수많은 이주와 정주의 발자국을 기억할 것이며, 서로 겹쳐진 자국 속에서 선주민과 이주민의 분별은 뭉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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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티가 말하기를

극에서 묵티들은 불현듯 찾아온다. 시따에게. 기따에게. 람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시따, 기따, 람이 찾기에 묵티들이 잠시 온다. 묵티들은 자신을 잊지 못한 동료를 다정하게 타이른다. 날 찾지 마. 길이 엇갈려.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꼬이고 얽히는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신에게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구분될까? 어떤 죽음은 부재로서 우리 곁에 더욱 강력히 현존한다. 충분히 애도받지 못한 죽음은 더욱 그렇다. 만일 사회가 그 죽음을 외면하려 한다면, 죽음과 삶이 엉켜 목소리를 남기는 일은 중요하다. 묵티들의 목소리가 죽음 저편으로 사라지게 둔다면, 올바른 삶도, 올바른 죽음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그렇게 묵티는 죽었지만 계속 남아있다. 말을 걸면서.

가서 인간답게 살아.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아. 인간 대접을 받고 살아.

묵티는 남은 신들에게 말한다. 묵티는 고유명사인 동시에 자유와 해방을 뜻하는 관념어다. 그러므로 이는 해방이 거는 말이기도 하다. 해방은 바깥이 아닌 안에 있다. 다른 새로운 땅을 찾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들이 있는 땅에서 인간들과 섞여 사는 것이 곧 해방이다.

묵티의 말은 극이 계속해서 타진해 온 공존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사회는 계속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몰아내며, 그들이 처한 상황을 남 일처럼 여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섞여야 하고, 선주민과 이주민이 같은 고리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의 아름다운 옷을 벗으라는 건 아니야.

묵티가 덧붙인다. 섞이라는 것이 고유한 문화나 언어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보단 이주자가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고 한국 주류 문화에 동화되도록 관리해 왔다. 진정 공존을 생각한다면 ‘아름다운 옷’을 버리라고도, 그 옷‘만’ 입으라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네가 인간일지 모른다고 의심하게 만들어.

묵티가 또 속삭인다. 어쩌면 그 ‘아름다운 옷’은 단지 문화를 넘어, 신의 위상 자체를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묵티는 인간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답게’ 살라고 할 뿐. 자연스레 묻게 된다.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어떤 존재가 인간에 포함되고 어떤 존재가 그러지 못하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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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의 몸으로 들어온 묵티가 람을 쓰다듬고 있다.

‘인간’이란 언제나 한정된 범주였다. 그리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나 난민처럼 뿌리 뽑힌 자들은 늘 여기서 배제돼 왔다. 연극은 그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그런 이주노동자도 인간이라고 호소하는 대신, 특정 존재를 ‘인간’ 범주에서 제외한 역사를 반성하고 해체한다.

묵티의 말은 사실 관객 모두에게, 즉 이 공동체 전체에 거는 대화다. 묵티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삶에 겹쳐진 채, 신의 음성으로 말한다. 해방을 찾는다면, 연근밭의 구덩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고. 더 나은 방향으로 넘어지자고.

묵티의 말은 실현될 수 있을까. 극의 클라이맥스는 국호가 비닐하우스를 방화하는 장면이다. 기따, 시따, 홍석, 람, 은옥, 라원 모두 자신의 거처와 그 안에 모아둔 돈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본다. 비닐하우스에서 자고 있던 복주는 거의 죽을 뻔하고, 택주는 농가의 불길을 보며 절망으로 주저앉는다. 악에 받친 혐오의 결과에 모두가 무력해진다.

그때 신들은 관객과 같은 편에 서서 불길을 쳐다보고 있다. 마주 봤던 첫 장면과 정반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절망이지만, 최소한 우리는 함께다. 극의 마지막, 일손이 급해져 직접 연근밭에 뛰어든 복주와 택주는 이주노동자들과 한 구덩이에서 어울린다. 위례는 돈을 벌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잃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집을 세준다.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서로의 취약한 점을 보완하려 손을 맞잡는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복주가 파라솔을 들고 온다. 연근밭에서 일하던 이들이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들어 비를 피한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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