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이후] 광장에서 노조까지
[광장 이후] 멈추지 않을 우리들의 노래와 몸짓
그 해 겨울

[광장 이후] 멈추지 않을 우리들의 노래와 몸짓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하고, 비상행동이 해체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무대가 설치되고 각양각색 깃발이 나부끼던 광화문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들이 쌩쌩 달립니다. 응원봉을 들고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아주 예전 같습니다.

이쯤에서 〈서울대저널〉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지난겨울 광장의 불씨는 어디로 갔나요. 우리는 12.3 내란 이전보다 나아진 세상에서 살고 있나요. 광장을 달궜던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두 손 모아 염원하던 것들이 이뤄졌나요. 오늘 당신의 하루는 안녕한가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눠준 이들과 답을 찾아가려 합니다. 기고는 하반기에 발행되는 세 호에 나눠 수록됩니다.

사진설명 시작. 만화풍의 그림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라는 팻말을 든 사람이 있다. 사진설명 끝.

최수지(자유전공 24)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기술을 상상하고,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가 실현되는 세상을 꿈꾼다. 현재 ‘관악중앙몸짓패 골패’의 패짱(동아리 회장)이다.

나는 ‘관악중앙몸짓패 골패’의 패짱이다. 골패는 교내·외 투쟁 현장에 몸짓 공연으로 연대한다. 몸짓은 피억압자의 노래인 민중가요에 맞춰 추는 춤으로, 과거엔 ‘마임’ 또는 ‘문선(문예선동)’이라고도 불렸다. ‘바위처럼’, ‘내일이 당당해질 때까지’처럼 비교적 귀여운 몸짓부터 ‘강’, ‘파도 앞에서’처럼 절도와 기합이 넘치는 몸짓*까지 다양하다. 최근엔 학내 이태원 참사 추모 문화제에 함께했고, 학교 밖에선 홈플러스 투쟁문화제, 정신장애인 국가책임제 노숙 농성 문화제, 매드 프라이드 행진**, 세계노동절 청년학생 전야제에서 공연했다.

*이를 ‘칼마임’이라고 한다. 패기 넘치고 위압적인 몸짓이 특징이며 투쟁, 파업 관련 집회에 자주 등장한다.

**매드 프라이드 행진: 정신질환 당사자가 정신질환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행사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단과대마다 몸짓패가 있었지만, 하나둘 사라지면서 교내 중앙 몸짓패인 골패가 만들어졌다. 그 전에도 사회주의권 붕괴와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몸짓패의 존폐가 위태로웠지만, 코로나19 범유행을 지나며 명맥이 거의 끊겼다. 2010년대엔 새내기배움터에서 ‘바위처럼’ 몸짓을 배우던 때도 있었으나,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본격적으로 학내 분위기가 탈정치화된 탓도 있다.

난 코로나19 범유행 이후 대학에 입학했다. ‘코로나 이후엔 새터에서 마임도 안 시키고 참 좋아졌다’는 식의 에브리타임 글을 보며, 운동권 문화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새내기배움터나 축제에 설 자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몸짓패에 가입하는 학생도 줄었고, 골패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떠났다.

그러다 보니 지금 골패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인원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지금 우리는 골패의 과거 공연 영상을 찾아 보며 몸짓을 직접 따서 연습한다. 과거에 공연한 곡 중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소나기’, ‘장산곶매’와 같은 곡은 공연 영상으로만 남아있다. 언젠가는 영상으로만 남아있는 몸짓들을 하나씩 따서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곡을 늘리고 싶다. 새로 만들어지는 민중가요, 또는 새롭게 민중가요가 된 곡에 맞춰 몸짓을 창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여력이 되지 않아 난항을 겪고 있다.

몸짓패를 시작하기 전, 나는 정치에 그냥저냥 관심 있는 정도였다. 큰 집회가 열리면 혼자 갔다가, 끝날 무렵에 곧장 빠져나왔다. 그런데 골패에서 연대 공연을 한 뒤로 집회에 혼자 가서는 느낄 수 없던 것을 경험했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현장에 연루될 수 있었다.

연대가 중요하다는 말은 전부터 많이 들어서 그 의미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아리원들과 투쟁 사안을 조사하며 발언문을 쓰고, 현장에 나가 깃발을 흔들고, 동지들과 인사하고,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거치며 비로소 연대의 의미를 진정 알게 됐다. 몸짓패가 당장 내년까지 활동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지만,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고 싶다. 투쟁 현장에서 연대 요청이 오면 혼자라도 시간 내서 가려고 한다. 지금도 동아리 차원에서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연대 공연을 가고, 종종 혼자 집회에 참석할 때도 민중가요가 나오면 앞에 나가 몸짓을 한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활동은 홈플러스 투쟁문화제에서 한 연대 공연이다. 투기자본 MBK는 2015년 홈플러스를 인수한 뒤, 수익이 나지 않자 점포를 정리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는 매출이 더욱 감소하고, 점포 여럿이 문을 닫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결국 홈플러스는 기업회생*을 신청했고, 현재 청산 위기를 겪고 있다. 두 번의 단식과 노숙 농성, 삭발을 동반한 투쟁이 벌써 8개월을 넘겼지만, 홈플러스를 인수할 기업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사이 세 차례 연대 공연을 나갔다. 현장에 갈 때마다 사태 해결이 너무 요원해 보여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대 앞에 섰을 때 동지들이 밝은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더 큰 힘을 넣어서 몸짓을 하게 된다.

*기업회생: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법원의 관리 아래 채무를 조정하고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적 절차

**2025년 11월 12일 기준

계엄 이전엔 ‘투쟁’이라는 인사가 어색할 때도, ‘동지’라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민중가요가 낡은 유산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겨울 계엄과 광장 국면을 거치면서 민중가요의 정신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꽃다지의 ‘주문’에서 ‘저들이 말하는 국민 중에 너와 나는 간데없고’라는 가사처럼, 2024년 12월 3일 우리는 ‘선량한 국민’의 자유를 약탈하는 ‘반국가세력’이 됐다.

민중가요는 또한 광장 밖에 머물러야 했던, 계엄 이전부터 ‘국민’으로 간주되지 않던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세종호텔 앞 고공농성장, 서울시교육청 앞 A학교 농성장, 서울고용노동청 앞 이랜드 농성장, 울산의 이수기업 농성장, 울산과학대 농성장 등,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농성장에서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찬 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면서 투쟁하는 노동자가 고공에 있다.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1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민중가요는 지금도 시의성을 잃지 않았다.

*꽃다지의 ‘내가 왜?’

민중가요와 몸짓은 과거와 현재, 거리와 광장을 잇는다. 5월 광주의 넋을 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 수요시위(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의 여는 노래 ‘바위처럼’, 그리고 탄핵 광장의 ‘다시 만난 세계’, 남태령에서 민중가수 최도은 씨가 부른 ‘불나비’와 ‘농민가’, 세종호텔 고공농성장에서 함께 춤췄던 ‘세상에 지지 말아요’, 그리고 한국옵티칼 투쟁 현장에서 울려 퍼진 ‘혁명의 투혼’까지, 노래는 2024년 이전부터 수많은 투쟁 현장과 광장, 그리고 광장 이후까지 줄곧 민중의 곁에 있었다.

우리가 민중가요를 부르고 그에 맞춰 몸짓을 출 때, 노래는 희망의 불씨가 돼 끝까지 우리의 곁을 지킬 것이다. 광장에서 민중가요가 내란 세력을 몰아내는 힘이 된 것처럼, 광장 이후 거리의 투쟁에서도 함께 민중가요를 부르고 춤추며 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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