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하고, 비상행동이 해체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무대가 설치되고 각양각색 깃발이 나부끼던 광화문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들이 쌩쌩 달립니다. 응원봉을 들고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아주 예전 같습니다.
이쯤에서 〈서울대저널〉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지난겨울 광장의 불씨는 어디로 갔나요. 우리는 12.3 내란 이전보다 나아진 세상에서 살고 있나요. 광장을 달궜던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두 손 모아 염원하던 것들이 이뤄졌나요. 오늘 당신의 하루는 안녕한가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눠준 이들과 답을 찾아가려 합니다. 기고는 하반기에 발행되는 세 호에 나눠 수록됩니다.

윤예원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학비노조) 중앙 선전부장. 광장 출신 전국 막내 부장으로 학비노조의 가열한 투쟁에 일조하고 있다. 사진은 학비노조 마스코트 ‘분홍이’다.
사람이 강력한 충격을 받은 순간은 장기 기억으로 남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일상의 기억과 달리, 당시 자신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까지 또렷이 기억된다고. 내겐 2024년 12월 3일이 그렇다. 낮잠에서 깨어나니 아빠가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거짓이길 바라면서 인터넷 기사를 뒤졌다. 국회 앞 실황을 보여주는 영상을 밤새 틀어놔도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반야심경을 틀어놓고 밤을 지새웠다. 그 불면의 밤 이후, 시간만 나면 여의도로 향했다. 탄핵안이 부결됐을 땐 담배 세 대를 물고 피웠다. 국민의힘 장례식을 치를 땐 ‘너네 돈 받고 하는 짓이냐’는 말도 들었다. 솔직히, 정말 돈이라도 받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을 빼곤 토요일을 전부 광장에 할애했으니, 부자까진 못 돼도 지갑이 제법 두둑해졌을 것이다. 이런 말을 시원하게 면전에 던지고 자리를 떴다. 교통비라도 준다면 고맙겠네요!
돌아보면, 내가 탄핵 집회에 나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밤, 국회 앞으로 달려간 수많은 시민과 동지를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저들이 느끼는 공포와 결의를 화면 너머에서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죄의식이 들었다.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광장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고, 나와 같은 마음으로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깊은 동지애를 느꼈다. 특히 집회 장소가 여의도에서 광화문으로 바뀌었을 땐 안전한 공간에 있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내 또래들도 많이들 그랬을 것이다. 내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밝힐 수 있고, 내가 나임을 말할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발화하고 자신을 인정하며 인격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기수(旗手)는 아니었지만,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수많은 동지들도 그런 마음으로 나왔을 것이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겼지만, 한편으론 ― 물론 윤석열 덕은 아니지만 ― 이 시기가 없었다면 내 성장은 훨씬 더뎠을 것 같다.
내 경우엔 특히 그랬다. 계엄이 선포되고 탄핵 집회에 나가던 즈음, 난 사회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다. 노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현장 경험은 부족했고, 관련 집회에 자주 나가지도 않았다. 노동과 노동운동은 내게 현실보단 이론이었다. 노동운동에 연대한 이유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지, 노동 의제를 진짜 제 일로 여기진 않았다. 조금은 일차원적인 연대였다. 하지만 광장에 나선 많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내 삶이 그들의 삶과 다르지 않고, 그들의 삶 또한 내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들의 문제를 점차 내 문제로 받아들이게 됐다. 책 속 이론만 배워선 체화할 수 없는 것을 광장에서 동지들과 부대끼며 깨달았다. 또 광장에서 만난 좋은 인연이, 좋은 운동 선배들이 많은 걸 가르쳐 줬다. 탄핵 광장은 결코 쉽지 않았다. 투쟁이 길어짐에 따라 많이 지치고 힘들었다. 국가폭력에 직접 노출됐고, 아스팔트 바닥에서 잠을 자다 보니 디스크가 생겼다. 하지만 광장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더 성장할 수 있었다. 탄핵이 이뤄지고 ― 물론 내란세력 청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 전보다 나은 세상이 오니 그간 힘들었던 게 미화됐다.
탄핵 광장의 한 가지 묘미는 ‘푸드트럭’이었다. 탄핵 국면이 길어지자 지친 마음을 달래려는 해외 교민들과 시민들이 광장에 푸드트럭을 보냈고, 그게 유행처럼 번지며 광화문역 인근에 ‘푸드트럭 존’이 형성됐다. 본집회 전에 푸드트럭 존에 가서 동지들과 음식을 먹는 게 하나의 일과가 됐다. 전태일 풀빵, 비건 감자튀김, 떡볶이 등 다양한 음식이 있었지만, 추운 겨울 가장 좋았던 음식은 바로 어묵이었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건 역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학비노조) 급식 노동자들이 ‘낋여주신’ 탄핵 어묵이다. 급식을 먹어 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급식으로 나오는 어묵탕은 무조건 맛있단 걸. 나도 줄 서서 탄핵 어묵을 받고, ‘찌라시 스티커’도 나눔 받았다.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어묵을 얻어먹었던 그 노조의 간부가 될 줄은.
광장이 닫히고 학생으로 돌아온 뒤, 광장에서 가깝게 지내던 선배 동지가 내게 슬쩍 제안을 건넸다. 학비노조에 자리가 하나 났는데 지원해 보면 어떻겠냐고. 내 꿈은 원래 출판 편집자였다. 하지만 탄핵 집회와 각종 투쟁 사업장에 연대하러 다니고, 주변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운동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결의를 굳혀가던 중 그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막연한 불안이 앞섰다. 내가 과연 노조로 갈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노동운동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동지들이 있었고, 내 결의도 단단해진 시기였기에 용기 내 들이박았다. 그 결과, 학비노조의 막내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투쟁하는 삶이 역시 쉽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요즘이다. 나보다 치열하게 투쟁하는 동지들, 선배들을 떠올리면 경외심과 존경심이 절로 든다. 그럼에도 내가 운동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조금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노조에서 중앙 간부로 지내다 보면 조합원들을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다. 그래도 집회에 나가거나 학교를 방문해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아직 노조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지라 모르는 것도, 어려운 것도, 실수도 많다. 하지만 옆에서 보듬어 주고, 성원해 주고, 도움과 가르침을 주는 동지들 덕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탄핵 광장에서의 성장이 씨앗이 싹을 틔우는 과정이었다면, 학비노조에서 보낸 지난 5개월은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튼튼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그날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끝으로, 학비노조는 학교 급식실에서 폐암 산업재해로 죽는 노동자가 더는 없도록,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11월 19일의 다음 날인 20일, 그리고 21일엔 학비노조의 전국총파업이 예정돼 있다. 12월 4일과 5일에는 2차 총파업이 이어질 예정이다. 더불어 국회 앞에선 무기한 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연대의 힘이 중요한 시기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동지 여러분 역시, 최소한 학교 급식을 먹으며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와 가까이 지내던 시기를 지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를 부탁하며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