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호 마감과 194호 착수가 정신없이 맞물리던 10월 말 즈음, 우리가 쓰는 기사가 영영 가닿지 못할 누군가에 대해 생각했다. 같은 세대의 절반 정도와는 영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들’과도 친구가 돼야 한다는 아득한 이상을 떠올렸다. 부서회의에서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 막연한 감각은 ‘젠더갈등’이란 주제로 좁혀졌다. ‘이대남’, ‘이대녀’, ‘젠더갈등’··· 그토록 거부하고 싶었던 기성세대의 언어가 이미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젠더갈등이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둘러싼, 또래 청년들의 경험과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들어보는 커버를 만들고 싶었다. 회의 자리에선 동료 기자와 PD들이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줬다. 기자들이 묻고 싶은 게 많은 만큼, 또래 청년들 또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고민이 많으리라 쉽게 짐작했다.

하지만 커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부터는 헤맴의 연속이었다. 특정한 사건이나 논점이 아니라 갈등 자체를 취재하기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려다 겉핥기에 그치는 기사를 쓰지 않으려 고민했고, ‘갈등’에만 주목하다 다른 중요한 걸 놓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자신을 설명하거나 상대를 이해할 책임이 관계의 어느 한쪽에만 부과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 나아가 ‘화해’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여러 고민으로 갈팡질팡했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관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붙잡았다. 모두와 친구가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친구가 될 가능성을 아예 지워선 안 된다고.

완전히 겹치지는 않을지언정 비슷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젠더갈등이 너무 심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페미니스트는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준석 지지자와 같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이런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모습을 가진 청년들에게. 구체적인 얼굴을 아는 데서 출발하는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커버스토리의 세 기사를 고민하고 다듬었다.

때론 이해할 수 없고 밉기까지 한 서로를 기꺼이 견디는 친구들을 떠올린다. 주어진 몫 이상의 여분을 감수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우정을. 저널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런 친구를 여럿 만났다. 마지막 호를 마감하면서까지 나는 그들이 내주는 여분에 큰 빚을 졌다. 여분의 마음을 내기 무척이나 어려운 시절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서로를 견딜 여분의 마음이 더 많이 허락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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