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엔 수십억 원에 사고 팔리는 값비싼 아파트들이 있다. 개포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 래미안 블레스티지, 디에이치 아너힐즈, 개포자이 프레지던스. 이들은 개포동에 자리한 초고급 아파트 단지란 점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모두 ‘개포주공아파트’를 헐어내고 재건축됐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지어진 개포주공아파트는 40여 년의 시간을 뒤로한 채 총 9개 단지 중 현재 4단지까지 재건축됐다. 낡고 오래된 주공아파트는 매끈하고 화려한 신축 아파트로 재건됐다. 하지만 함께 재건되지 못한 존재도 있다. 단지를 지켜온 수많은 나무가 사라졌다. 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왜 나무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2014년부터 줄곧 질문의 답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 나무들을 사진에 담고, 기억하려는 이들을 불러 모은 사람. 나무를 보존할 수 없겠냐고 끝까지 묻던 사람.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 《콘크리트 녹색섬》을 완성한 사람. 이성민 감독을 만나 어떤 언어로 사라져선 안 될 나무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물었다.
나의 살던 동네
이성민 감독은 청소년기 전부를 개포주공아파트에서 보냈다. 그곳은 이 감독에게 늘 따뜻하게 곁을 내주는 마을이었다. 이 감독은 “동네에서 만나는 어른들이 다 친구들의 엄마, 아빠였고 가게 사장님도 우리 반 친구의 가족이었다”며, “단지가 언제나 안전하다고 느꼈고,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한다.
성인이 되고 이사를 한 이성민 감독은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몇 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계속 그 길을 가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아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앞만 보고 달리다 멈춰 선 곳엔 뜻밖에 개포주공아파트가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도중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시기가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궁금해졌어요. 그런 생각 끝에 제가 청소년기를 보낸 장소를 찾게 됐어요.”

2014년 봄 다시 찾은 개포주공아파트는 여전히 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수년 만에 방문한 단지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묻자, 이성민 감독은 짤막하게 답했다. “그냥 너무 좋았어요.” 이 감독은 오래되고 낡은 5층짜리 주공아파트의 풍경과 분위기가 따뜻했고, “무엇보다 아주 많은 나무가 자유분방하게 자라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언젠간 재건축해야 하는 곳이었기에 나무들이 관리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이성민 감독에게 개포주공아파트는 그저 머무르기만 해도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날 때 한 번씩 오가는 장소가 됐다.
기록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추억이고 고향인 개포주공아파트는 더 이상 제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2003년 재건축 조합이 설립된 이후, 2010년대엔 속도가 붙어 각 단지의 재건축이 목전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재건축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이성민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기록뿐이었다. “고향이라고 말할 만한 장소, 마음 둘 곳을 찾았는데, 그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게 이상해서 기록을 시작했어요.” 기록의 매체는 사진과 영상이었다. 처음부터 영화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3년 정도 홀로 동네를 기록했는데 사진엔 늘 나무가 담겼다.
2017년 ‘개포동 그곳’이란 이름으로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리자, 개포주공아파트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줄곧 이성민 감독의 눈에 걸렸던 나무를 다른 이들도 기억할지 궁금해서 올린 사진이 큰 호응을 얻었다. 수많은 이가 사진을 찍은 위치를 알아채고 공감을 표했다. “나무가 있는 공원 벤치 옆에 포장마차가 있었다는 식으로, 사진에 담긴 마을 풍경을 세세하게 댓글로 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개포동 그곳’은 ‘기억 산책’과 ‘나무 산책’을 통해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함께 기록하고 이야기하는 프로젝트로 확장됐다. “여럿이 동네를 다니면서 나무를 좀 더 많이 보자는 생각에서 나무 산책을 시작했어요.” 신청받은 장소를 중심으로 동선을 짜 단지 안을 거닐었다. 기억에 남는 나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나무의 이름’ 활동도 했다. 이성민 감독은 나무 산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여전히 나무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사라지는 나무에 대한 관심 역시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더 묻고 싶어졌다
왜 나무는 재건축 과정에서 사라져야 하나.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지켜온 나무들을 왜 잃어야 하나. 호기심과 안타까움이 섞인 질문이 떠올랐다.
경제 논리 속에서 나무를 없애는 이유는 자못 쉽게 설명된다. 기존 나무들을 재건축 기간 다른 곳으로 옮겨뒀다가 재건축이 끝나고 이식하면 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기존 나무를 베어 없앤 후 새로운 나무를 사서 조경하는 게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거할 때 기존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이후 새로운 나무를 심는 게 일반적이다.

이성민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가득했다. 이 감독은 우종영 나무의사를 섭외해 개포주공아파트 나무들의 생장 상태를 물었다. 당시 나무들은 “너무나 건강한 청장년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토록 귀한 나무를 왜 벨 수밖에 없는지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재건축 과정에선 토양 역시 파괴된다. 이성민 감독은 우종영 나무의사와 이야기하며 나무가 뿌리내린 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개포주공아파트에 새들이 물어다 놓은 씨앗, 주민들이 먹고 버린 살구 씨앗 등이 자연적으로 발아해 자란 나무가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작은 생태계가 형성될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땅이 비옥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무를 베고 땅을 뒤엎으면 40여 년 동안 형성된 생태계가 한순간에 파괴된다.
개포주공아파트를 오가며 질문은 깊어졌고, 관심은 짙어졌다. 2018년이 되자 이성민 감독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과 오갔던 말들을 담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억 산책과 나무 산책에 참여했던 이들을 다시 인터뷰하고, 나무를 보존하기 어려운 까닭까지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지키고 싶어졌다
나무를 보존할 방법은 정말 없을까. 촬영을 이어가면서 만난 주민들이 종종 물었다. 어차피 공원을 만들 자리인데, 나무를 남기면 안 되냐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성민 감독은 “뒤늦게 환경영향평가* 결과를 열람해서 찾아본 게 2018년이었다”고 밝힌다. 재건축될 아파트 단지에 공원 부지가 있고, 그곳에 자연 지반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나무를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영화는 나무 보존을 향한 지난한 여정을 담게 됐다.
*환경영향평가: 개발사업 시행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평가하는 행위로, 결과에 따라 해로운 영향을 줄일 방안 등을 강구해야 한다.
처음엔 강남구청에 문의했다. “공원을 만들 부지에 나무를 보존하자”고. 구청은 노력하겠다는 소극적인 답변과 함께, 재건축 조합에 나무 보존을 고려해 보면 어떻겠냐는 공문 하나를 넣었다. 어떤 강제성도 없는 조치였다.

협의가 지지부진하는 사이, 조합에선 벌목을 지체하기 어렵다며 공원 부지에 확실히 속하지 않는 나무들을 벴다. 남은 건 경계에 걸친 나무 22그루. 잿빛 아파트 단지에 남은 마지막 나무들은 마치 ‘콘크리트 녹색섬’처럼 보였다. 이성민 감독은 이를 지키기 위해 “나무가 공원 부지 안으로 들어오는지 정확히 측량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22그루의 나무가 부지에 속한다면, 보존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릴 것 같았다.
끝없이 조합의 문을 두드린 결과, 2019년 측량이 이뤄졌다. 하지만 콘크리트 녹색섬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나무 위치가 공원 부지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새로 지어질 단지는 흙을 더 쌓아 올려 높아진 지반 위에 지어질 계획이었다. 나무를 지키려면 설계를 수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 이성민 감독은 콘크리트 녹색섬의 나무들마저 사라지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연결됐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단순한 기록이었다.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해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이성민 감독은 끝까지 질문을 던지며 기록을 이어갔다. 그리고 알렸다. 그러자 그 기록의 의미를 아는 이들이 모였고, 함께 나무 보존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콘크리트 녹색섬을 지켜내진 못했지만, 이 감독 주위로 ‘할 수 있는 게 남아있다’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이 감독이 기록을 강조하는 이유다.
이성민 감독이 개포주공아파트를 오가며 쌓은 기록을 공유한 덕분에 다양한 이들과 인연이 생겼다. 이 감독은 토양 생태 연구를 하는 경희대 배지환 연구교수(환경학및환경공학과)의 연락을 받았다고 전한다. 배 연구교수는 재건축 과정에서 손실되는 토양과 식생의 탄소를 수치로 환산했다. 그리고 토양과 식생을 보존할 경우 재건축 과정에서 생겨나는 탄소 부채*를 빠르게 갚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감독은 “보존에 대한 기억의 가치는 물론, 환경적·경제적 가치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했다.
*탄소 부채: 기업 등이 배출할당량을 초과해 탄소를 배출할 때, 그 초과분을 줄이거나 배출권을 구매하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비용
우종영 나무의사와의 인연도 이어졌다. 두 사람은 곧 재건축될 개포주공아파트 5단지를 함께 둘러보다 담으로 둘러쳐진 오래된 상수리나무를 발견했다. “우종영 선생님이 보시기에 300여 년 된 나무로 추정된다고 해요. 주공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누군가 발견하고 귀하다고 여겨 주변에 담을 쌓아놓은 것 같아요.” 하지만 5단지 재건축 환경영향평가엔 이 상수리나무에 대한 보존 방안이 빠져있었다. 이성민 감독은 이런 나무가 환경영향평가 단계에서 빠지지 않도록 보존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군가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300년 된 귀한 나무를 보호수가 아니란 이유로 베게 돼요.”
녹색섬 이후를 그리며
이성민 감독은 어렵게 완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콘크리트 녹색섬》을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 이 감독은 ‘우리 동네에도 나무들이 보존되면 좋겠다’는 관객의 말이 큰 힘이 됐다고 꼽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공감한다면, 지금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대안을 함께 떠올리고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갖게 돼요.”

이성민 감독은 스크린 너머에서 미래를 본다. 콘크리트 녹색섬은 없어졌지만, 아직 지켜야 할 나무가 많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재건축 과정에서도 보존할 수 있는 자연 지반은 최대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만들 공원이라면 설계 단계부터 공공과 전문가들이 개입해 나무를 보존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선 조례 개정 등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성민 감독은 내년 예정된 《콘크리트 녹색섬》 극장 개봉이 그 전환점이 되도록 계획하고 있다. 아직 구상 단계지만 제도적 변화를 위한 의견을 모아보겠다는 생각이다. 이 감독은 “극장 개봉을 위해 사전 관객을 모집하는 형태의 펀딩(funding)을 진행하자는 얘기가 나왔다”며, “자리가 마련될 테니 그 자리에서 정책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 개봉에 맞춰 지난 시간을 담은 출판물도 낼 예정이다. 영화를 보고 출판물을 읽은 관객들의 의견을 모두 정리해, 정책 보고서를 만들고 정부 및 관련 공공기관에 제안하려 계획 중이다.
나무를 기록하고 지켜내고자 치열하게 달려온 이성민 감독의 시간은 계속되고 있다. 영화는 완성됐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감독의 말처럼, 우리나라엔 재건축 예정인 아파트가 아직 너무 많다. 아파트 단지엔 자연 지반 녹지도 많이 남아있다. 이 감독이 멈춰 설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어떤 언어로 나무의 이야기, 사라져선 안 될 존재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성민 감독이 지난 10여 년 동안 답해왔고, 앞으로의 시간으로 답하려 하는 질문이다. 나무의 곁에 서서 기록하고 기억해 온 이 감독처럼, 이제는 우리가 그 곁에 설 시간이다.
※인스타그램과 엑스 계정(@gaepothere)에서 이성민 감독의 지난 기록과 앞으로의 소식을 이어서 만나볼 수 있다.

©이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