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하고, 비상행동이 해체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무대가 설치되고 각양각색 깃발이 나부끼던 광화문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들이 쌩쌩 달립니다. 응원봉을 들고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아주 예전 같습니다.
이쯤에서 〈서울대저널〉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지난겨울 광장의 불씨는 어디로 갔나요. 우리는 12.3 내란 이전보다 나아진 세상에서 살고 있나요. 광장을 달궜던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두 손 모아 염원하던 것들이 이뤄졌나요. 오늘 당신의 하루는 안녕한가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눠준 이들과 답을 찾아가려 합니다. 기고는 하반기에 발행되는 세 호에 나눠 수록됩니다.
193, 194호 추가 기고자 모집 bit.ly/광장이후

우산
2007년 7월 서울에서 태어나 에이스펙트럼 위의 논바이너리로 살고 있습니다. 종종 깃발을 들고 마이크를 쥐고 글을 씁니다. 누군가의 집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우산이 되고 싶습니다.
나에게 있어 최초의 광장은 2016년의 박근혜 탄핵 광장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끝나가던 늦가을과 겨울은 수업이 끝나면 가족과 함께 광화문 집회에 가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나는 넘실거리는 촛불의 파도를 일으키며, 교실 텔레비전으로 탄핵이 인용되는 순간을 보며, 교과서에서 촛불집회에 관한 단락을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연대를 감각했다. 그 이후에는 두 번째 광장이 있었다. 나는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故 변희수 하사를 기리는 추모행동에 함께했다. ‘사랑과 우정이, 싸우는 우리가 이긴다’고 외치며 한 해를 넘기고, ‘우리는 해일이 돼 돌아온다’고 외치며 겨울의 끝자락을 보내고, ‘혐오 정치를 끝장내라’고 외치며 봄을 맞았다. 그러나 윤석열은 여성의 날이 지나자마자 당선됐다. 나는 투표권도 없는 주제에 동이 트도록 개표 방송을 보며 붉고 푸른 색으로 물드는 지도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봤다. 친구와 세 시간 넘게 전화하며 그래도 버텨내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2022년 이후, 나는 한동안 광장을 떠나있었다. 광장에 등을 돌리고 있던 나를 다시 광장으로 이끈 것은 우습게도 계엄령이었다. 기말고사를 9일 남기고 12월 3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대통령실이 보이는 옥상에 오르고, 헬리콥터 소리를 듣고, 국회에 간 지인들의 소식을 확인했던 기억이 나에게 스스로 떳떳한 사람으로 남으라고 말했다. 그래서 3월의 나는 왼손으로 깃대를 들고 아스팔트에 앉아, 필기를 읽거나 수능특강을 풀거나 수행평가를 준비했다 3월 26일엔 서십자각과 농성장 사이에 차려진 ‘민주주의 장례식장’에서 3월 모의고사를 채점했다. 4월 4일 영어 시간엔 숨을 죽이고 태블릿 화면을 쪼개 탄핵심판 라이브를 봤다. 2025년 봄은 그런 기억들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여름이 한창이다. 계절이 지나는 사이 정권이 바뀌었고, 내란 수괴가 구속됐고, 세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해제됐다. 그러나 여전히 고공에는 노동자가 남아있고, 장애인은 지하철에 타기 위해 싸워야 하고, 부당 전보된 교사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청소년의 현실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윤석열은 혐오를 발판으로 당선됐기에 우리의 광장은 평등해야 했다. 평등수칙은 그러한 합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광장과 그 재현은 정말로 평등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사회는 종종 2030 여성을 호명하는 일조차 꺼렸다. 그렇기에 더더욱 젠더퀴어 청소년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는 왜 광장에 모였는가? 홀로 광장에 나섰던 중학교 2학년에게는 따라 다닐 선배도, 틈틈이 들여다 볼 계보도 없었다. 낯선 감각은 아니었다. 갓 퀴어로 정체화한 초등학교 6학년엔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몰랐다. 애매한 시기에 의식화된 초등학교 4학년엔 누구와도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나는 길을 잃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지도조차 없이 헤매는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광장엔 정답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 이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다. 고독도, 우울도, 환대도, 그 어느 것도. 내가 광장에 나선 이유는 단순했다. 광장은 퀴어 청소년을 긍정했다.
학교에서 퀴어는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다. ‘요즘은 그런 사람도 있다더라’라는 식의 타자화와 노골적인 혐오가 만연한 학교에서 퀴어 당사자가 아웃팅을 감수하고 혐오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내게 퀴어 정체성은 언제나 시한폭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시한폭탄의 뇌관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방법이 ‘좋은 학생’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고, 신체와 정신 모두를 깎아 먹으면서까지 성적에 집착했다. 이건 어쩌면 현재진행형인 진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장은 퀴어 페미니스트인 나로 존재해도 괜찮다고, 그런 나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작은 에이섹슈얼 프라이드 플래그를 든 초보 기수에게 2025년의 광장은 환대를 베풀었다. 기수들은 스티커와 간식과 테이프와 가위를 줬고, 에이섹슈얼 프라이드 플래그를 본 에이스펙트럼 위의 사람들은 깃발 아래로 와 포옹과 간식을 나눴다.
나는 광장이 무오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도 청소년들은 자주 기특하거나, 안쓰럽거나, ‘미래의 희망’인 존재로 호명됐다. 그러나 청소년은 미래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청소년의 삶은 아련하게 미화되는 추억도, 웃고 넘길 농담도, 꼭꼭 숨겨야 하는 ‘흑역사’도 아니다. 우리의 삶은 ‘어른’이 되는 예비 단계가 아니라 그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12월 3일 이후, 청소년 또한 혐오 정치와 내란의 피해 당사자로서 광장에 모였다. 윤석열 정부가 여성가족부 예산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청소년 활동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했을 당시 나는 한 청소년센터의 청소년운영위원회 소속이었다. 100만 원 단위의 예산 삭감은 위원회에서 상당히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위원회 밖에선 큰 화제가 되지 못했다. 여기엔 당사자성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운동이 당사자성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며, 연대하는 비당사자는 언제나 절실한 존재다. 그러나 가장 뾰족하게 요구하고 비판하는 이는 대개 당사자고, 그 무엇보다 우리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지워지는 운동을 바라지 않는다. 여성은 시간이 지나면 나이 든 여성이 된다. 퀴어는 시간이 지나면 나이 든 퀴어가 된다. 장애인은 시간이 지나면 나이 든 장애인이 된다. 이민자는 시간이 지나면 나이 든 이민자가 된다. 재정체화하거나 사회적 구성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는. 그러나 청소년은 시간이 지나면 비청소년이 된다. 비당사자들은 연대자로 남아있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기관이나 단체, 또는 의제를 떠나고, 사람이 떠나며 경험과 지식도 함께 소실된다.
2025년 8월, 청소년 활동 지원을 되살린 여성가족부 예산안이 편성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일방적으로 운영 종료한 ‘서울시립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은 여성청소년건강지원단으로 새로이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영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때마다 안도감이 들면서도 바뀌지 않는 모퉁이들이 눈에 걸린다. 사회는 여전히 청소년의 스마트폰을 압수하고 청소년을 성별이분법에 가두려고 한다. 우리의 광장은 닫히지 않았다. 나는 노동자 청소년, 신경다양인 청소년, 여성 청소년, 이민자 청소년, 장애인 청소년, 저소득층 청소년, 정신병자 청소년, 퀴어 청소년, 탈가정 청소년, 페미니스트 청소년, 학교 밖 청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건강하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고, 반항적이고, 불온하고, 성적이고, 자제력 없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청소년의 목소리가 자긍심을 담아 울리는 사회를 원한다. 세상이 그렇게 바뀔 때까지 광장은 닫히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