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개의 얼굴이 새로 태어나는 일
‘해결’ 없이 ‘처리’만 남은 학교폭력,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끝난 듯 보이는 사건의 꽁무니를 쫓다, 191호

‘해결’ 없이 ‘처리’만 남은 학교폭력,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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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은(서울특별시 성북강북교육지원청 학교폭력 전담 변호사)

2010년대 사회교육과에서 민주시민과 공교육, 그리고 청소년에 관해 공부했다. 법을 배워 변호사가 됐으나 학부 전공을 잊지 못해 교육지원청에서 근무한다. 특히 교육과 법이 엇갈리는 학교폭력, 청소년이 법과 만나는 소년사건에 관심이 많다.

끔찍한 학교폭력 사건이 알려질 때마다 대중은 분노하고, 더 강력한 처벌과 엄격한 제도를 요구한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정교하고 강력한 학교폭력 처리 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선의와 분노로 쌓아 올린 이 견고한 성벽이 막상 학생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역설을 낳고 있다. 이젠 질문을 던질 때다. 이 제도는 과연 학교폭력을 ‘해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있을 뿐인가?

모든 갈등을 집어삼키는 학교폭력이라는 블랙홀

학교폭력이란 말은 대중에게 무척 익숙하지만, 막상 그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학교폭력예방법이 정의하는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유인, 명예훼손·모욕, 공갈, 강요·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폭력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서, 이에 더해 법원은 ‘학교폭력예방법의 목적 및 문언을 고려할 때, 학교폭력은 폭행, 명예훼손·모욕, 따돌림 등에 한정되지 아니하고, 이와 유사하거나 동질의 행위로서 학생의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고 판시하므로 개념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불확정적이다. 실제로 친구 간 말싸움, 험담(뒷담화), 장난,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 등 학생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의 갈등이 학교폭력의 그물망에 포섭된다. 물론 법의 취지는 사각지대 없이 학생을 보호하려는 것이었겠지만, 그 결과 아동·청소년이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겪을 수밖에 없는 온갖 시행착오마저 학교폭력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있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과 관계를 맺고,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성을 키운다. 사소한 말다툼, 편 가르기, 서툰 감정 표현은 그 자체로 성장의 일부다. 그러나 현재의 시스템은 이러한 갈등의 교육적 해결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한다. 일단 학생 간 갈등에 학교폭력이라는 이름표가 붙는 순간, 대화와 화해의 기회는 사라지고 행정적, (준)사법적 처리 절차라는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한다.

교육이 사라진 처리 절차, 관계는 영원히 단절된다

학교폭력 신고가 접수되면, 당사자는 대부분 즉시 분리되고 상호 연락은 차단된다. 이로써 신고, 피신고 학생과 학부모 간의 자율적인 갈등 해결 가능성은 사라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은 학교를 떠나 교육지원청 소속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로 이관된다. 이는 민원과 학교폭력 조사 부담으로부터 학교와 교사를 보호하려는 취지였지만, 결과적으로 학교의 중요한 기능인 교육적 중재의 역할을 박탈했다. 그런데 현재의 학폭위는 학생 선도 기구도, 갈등 해결 기구도 아니다. 학폭위는 학생들을 직접적으로 훈계하지 않으며, 학생 간 혹은 학부모 간의 갈등을 조정하지도 않는다. 당사자의 관계 회복을 촉진하는 기능이 사실상 없다. 그저 사법기관을 축소해 놓은 듯, 사안을 조사하고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에게 각각 적절한 조치를 결정하는 기구로 작동한다.

학폭위는 학교폭력으로 신고된 사건에 대해 ①무엇이 사실인지, ②그 사실이 학교폭력에 해당하는지를 심의·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학교폭력예방법상 ‘피해학생’, ‘가해학생’이 결정되며, 마지막으로 학폭위는 ③각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결정한다. 피·가해학생이 조치 결정문을 받아 드는 순간이 오랜 갈등이 봉합되는 순간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실무상 가해학생에게 빈번하게 내려지는 조치인 ‘피해학생 및 신고·고발 학생에 대한 접촉, 협박 및 보복행위의 금지’*는 사실상 해당 인간관계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한번 어긋난 급우(級友)와 다시 대화하고 오해를 풀며 관계를 회복해 볼 기회는 박탈된다. 문제를 푸는 과정 없이 그저 관계를 끊도록 한다. 학교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어야 함에도, 현행 제도는 학생들에게 갈등이 생기면 상대를 그저 눈앞에서 치우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제1항 제2호

대입이라는 칼날 앞에서, 학생들은 괴물이 돼간다

이 기계적 처리 과정에 기름을 붓는 것은 역시나 대학 입시다. 올해부터 학교폭력 조치 사항이 대학 입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자, 갈등의 양상은 더욱 처절한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 평범한 인간관계의 분쟁이 보통 그렇듯, 학생들 사이의 다툼 역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기보다는 서로에게 조금씩 원인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자신과 내 아이의 미래가 걸린 문제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성찰하고 대범하게 인정할 여유는 없다. 오직 상대방을 ‘100%’ 가해자로 만들어 가장 강력한 조치를 받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언어가 난무하고, 갈등의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이라는 사법적 절차만 남는다. 학생들은 반성과 책임, 갈등의 해소 방법 대신 ‘끝까지 부인하면 학교폭력으로 인정 안 된대’라는 식의 거짓말과 책임 전가를 통해 결국 상대를 제거하는 기술만을 배울 뿐이다.

교육적 해결의 실종, 무엇을 위한 제도인가?

대중의 편견과 달리, 학교폭력의 99%는 학생 간의 사소해 보이는 갈등이 그 본질이다. 그런 다툼은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학생들이 겪는 수많은 갈등을 모두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처리하는 현재의 제도는 아무런 교육적 효과가 없다. 다만 분쟁을 행정, 사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뿐이다. 교육은 문제를 손쉽게 ‘치우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힘들어도 문제를 ‘풀어가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 하지만 학교가 지금처럼 관계 회복의 마지막 장을 닫는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를 갈등 해결 능력이 없는 어른으로 키우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무거운 처벌이 아니라, 더 깊은 상호 대화와 이해다.

물론, 언론에 보도되는 극단적이고 잔인한 학교폭력은 명백한 범죄이며 이는 사법적으로 엄벌해야 한다. 그러나 그 거대한 학교폭력의 신화가 수많은 평범한 학생들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갈등을 바라보는 창이 되는 순간,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진다. 모든 갈등을 범죄의 렌즈로 바라보고, 교육의 역할을 포기한 채 행정·사법적 잣대만 들이대는 것은 장차 우리 사회 전체의 비극이 될 수 있다.

이제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까지 학교폭력 처리의 이념은 응보적 정의*가 지배하고 있다. 이제라도 처벌과 분리 중심의 ‘처리’에서 벗어나, 대화와 중재를 통한 관계의 ‘회복’과 갈등의 ‘해결’로 나아가야 한다. 학교 현장에 다시 교육적 중재 권한을 부여하고, 전문가의 조력 아래 학생들이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제도의 목표가 단순히 가해학생을 처벌하고 피해학생과 분리하는 것을 넘어, 두 학생 모두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어떻게든 상대를 제거하는 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이 되도록, 사회 전체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사람은 좋든 싫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응보적 정의: 잘못에 대해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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