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그렇게
빼뻘마을에 아직 우리 언니들이 산다
학생회 동향

빼뻘마을에 아직 우리 언니들이 산다

※국가 법령·공문에서는 미군을 대상으로 성노동을 한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위안부’를 사용하나, 본 기사에서는 오늘날 사회 전반에서 두루 쓰이는 ‘기지촌여성’으로 표기했습니다.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옛 스탠리 부대 자리에는 ‘빼뻘마을’이라 불리는 기지촌 마을이 있다. ‘빼뻘’이란 이름의 유래로는 미군이 마을에 널린 배나무를 보고 ‘배밭’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뺏벌’이 됐다는 설부터, 뺑대라 불리는 풀들이 일대에 자란 모습이 갯벌같아 ‘뺑벌’로 불렸다는 말까지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리고 빚과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지촌여성의 삶에 빗대어, 누군가는 이곳을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뺏벌’이라 부른다.

뺏벌 기지촌엔 오랜 시간 기지촌여성들의 보금자리였던 ‘두레방’이 있다. 한국 기지촌여성운동이 시작된 두레방에선 오늘날 60~70대가 된 기지촌여성들이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2024년 6월, 의정부시는 두레방을 시내로 이전할 것을 종용했다. 활동가들의 반대로 올해 6월까지 1년간 기한이 유예됐으나 여전히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들이 끝끝내 이곳에 남아 지키고자 한 기억이 무엇인지, 빼뻘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봤다.

뺏벌에 갇힌 삶

뺏벌 기지촌은 해방 이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며 형성된 성매매 집결지다. 한국 매매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공창제(公娼制)가 나온다. 공창제는 국가 차원의 성매매 관리제도로, 강제 개항 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왔다. 일제 공창 지역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들어서며 고스란히 미군 기지촌으로 활용됐다. 미군기지 주변엔 세탁소, 이발소, 양복점 등 상권이 형성되며 인구가 늘고 상업이 발달했다. 기지촌의 외화벌이는 상당 부분 성산업에 의존했다. 1970년 경기도 관광운수과는 경기 지방 기지촌여성이 연간 800만 달러를 벌었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경기도 기지촌에 평균 약 1만 명의 기지촌여성이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정부는 이들을 ‘민간 외교관’, 경제 발전을 위해 몸 바친 ‘애국자’라고 칭송하며 수익 일부를 떼갔다.

사진 설명 시작. 과거 기지촌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군복을 입은 미군들이 도로를 거니고 있다. 사진 설명 끝.

과거 기지촌 모습 ⓒ〈한국일보〉

매매춘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본격화됐다. 미국의 지지 덕에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의 주요 과제는 안정적인 한미 관계 구축이었다. 미군은 이를 빌미로 한국 정부에 적극적인 기지촌 관리를 요구했다. 그 결과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군 기지 정화 운동이 진행됐다. 정부는 성병 진료소를 만들어 매주 성병 검사를 시행했고, 성병을 진단받은 여성은 감옥과 다름없는 낙검자 수용소에 감금됐다. 성 판매자만을 대상으로 한 검사는 성병 예방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에도, 국가는 기지촌여성을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검진을 이어나갔다.

성매매 산업에 발을 들인 이들은 빚과 착취의 굴레에서 쉽게 탈출할 수 없다. 정치경제학 연구자 김주희는 『레이디 크레딧』(2020)에서 ‘부채 관계’ 개념으로 여성이 성산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업주는 여성에게 옷과 미용, 숙식 등 생활에 드는 비용을 모두 빚으로 청구할 뿐 아니라, 환각제와 진통제를 권해 여성이 약물에 의존하게 만든다. 약물에 중독된 여성을 가리키는 ‘헬렐레’, ‘쩔순이’ 같은 기지촌 은어는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이들의 약값 역시 빚이 됐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또 다른 곳에서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여성은 다양한 성산업 구성원과 부채 관계로 얽힌다. 이때, 부채의 종류와 관계없이 ‘유일하게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물적 담보’는 여성의 몸이 된다. 여성은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더 극단적인 조건에서 노동한다. 또 성산업에서 탈출해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차별적 시선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다시 기지촌으로 돌아온다.

매춘을 터부시하는 문화 속에서 기지촌여성의 인권은 보호받지 못했다. 기지촌을 비롯한 매매춘 집결지는 사회와 분리된 예외지대로 취급받았다.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특수한 맥락은 기지촌여성에 대한 폭력과 범죄를 묵인하는 근거가 됐다. 수많은 기지촌여성이 미군과 업주에 의해 죽었지만 제대로 된 수사와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기지촌여성 김정자 씨는 증언록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2013)에서 뺏벌 기지촌을 ‘언니들이 많이 죽었던 곳’으로 회상한다. 맞아 죽은 언니, 연탄 불을 피워 자살한 언니, 약 먹고 죽은 언니. 김 씨는 수풀이 우거진 산에 묘비 하나 없이 언니들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증언한다. 2020년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이 경기도 기지촌여성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7.4%가 기지촌 생활 당시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강제 낙태 횟수가 5회 이상이라고 답한 이는 44%였다.

인신매매·성병·성폭력·임신·낙태·약물중독 경험은 50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기지촌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기지촌여성의 높은 심리·정신과질환 유병률은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어린 나이에 기지촌에 유입된 이들의 정신질환 진단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아파도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강제로 약물에 노출된 시간이 고스란히 후유증으로 남은 것이다.

미군이 떠난 자리엔

2007년, 기지를 반환하고 미군 부대가 철수하며 주 수입원을 잃은 빼뻘마을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떠난 마을엔 방값이 싸다는 이유로 도시 빈민과 외국인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현재 빼뻘마을엔 미군을 상대로 돈을 벌던 원주민과 독거노인, 노인이 된 기지촌여성이 뒤섞여 살고 있다.

국가의 무관심 속 기지촌여성의 삶은 잊혔다. 피해 사실을 국가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은 이들의 고통을 가중했다. 기지촌 운동가 김현선 씨는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에 국가폭력의 심각성은 ‘체계성을 갖는 국가의 행위가 정당화되고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고 썼다. 국가가 나서서 특정한 착취 구조를 합법화할 때 피해자들이 ‘제도의 실질적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착취로부터 탈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폭력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설명 시작. 보라색 모자를 쓰고 분홍색 마스크를 낀 기지촌여성이 피켓을 들고 있다. 노란 피켓엔

2014년 12월 열린 기지촌여성 국가 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든 기지촌여성 ⓒ〈뉴스1〉

오랜 시간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움츠렸던 기지촌여성들은 이제야 국가에 잘못을 묻기 시작했다.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등이 2014년 제기한 국가 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원고들은 국가에 기지촌을 조성하고 성매매를 조장한 책임을 물었다. 국가가 성산업을 정당화하고 불법행위를 방치해 원고들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1970~80년대의 기지촌여성 성산업은 국가의 막대한 예산 투입과 적극적인 관리로 유지됐다. 2022년 9월, 대법원은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또, 오랜 시간 기지촌여성의 삶은 민족주의 관점에서 해석됐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인권운동이 민족운동과 노선이 분리된 건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다. 그전까지 기지촌 문제는 여성폭력의 관점이 아닌 반미·지역운동의 차원에서 이야기됐다. ‘윤금이 사건’은 민족주의 운동이 여성주의 시각을 어떻게 압도했는지 보여준 사례다. 1966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윤금이 씨는 가난한 형편 탓에 기지촌을 전전했다. 1992년 10월 밤늦게 동두천 거리를 걷던 윤 씨는 미군들의 다툼에 휘말려 집 안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였던 미군 마클 케네스 리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분노한 사람들은 곳곳에서 일어나 ‘민족의 혼 금이의 죽음이 헛돼선 안 된다’고 외쳤다. ‘우리의 딸’, ‘누이의 주검’. 순식간에 민족의 정수로 떠오른 윤금이 씨의 이름은 수많은 이의 입에 올랐다. 중앙대 이나영 교수(사회학과)는 논문 「기지촌 형성 과정과 여성들의 저항」(2010)에서 윤금이 씨의 죽음 전후로 그를 둘러싼 호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핀다. 이 교수는 ‘살해당한 윤금이의 몸은 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을 침탈당한 조국과 등치’됐으며, ‘단 한 번도 진정한 민족의 성원이 돼보지 못한 더러운 양갈보는 미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돼 민족의 혼으로 승화’했다고 짚었다. 그간 음지에서 없는 듯 살아온 기지촌여성은 순식간에 식민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 기지촌여성의 목소리는 없었다. 대중은 ‘나쁜 미군과 불쌍한 기지촌여성’에 집중해 분노했을 뿐, 기지촌여성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엔 무관심했다. 한국 최초의 기지촌여성 운동가 김연자 씨는 1994년 월간 〈말〉에서 민족주의를 걷어내고 기지촌 문제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김 씨는 ‘미군은 나쁘고 양공주는 불쌍하다’는 단편적인 시각은 미군 범죄를 납작하게 바라볼 뿐이라며, ‘기지촌을 배태시킨 구조적인 문제에 앞서, 케네스 마클에게 돌을 던지기에 앞서 나는 이 나라 남자들이 먼저 눈뜨기 바란다’고 지적한다. 기지촌이 생긴 근원적 이유를 물으려면, 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여성의 몸을 상품으로 취급해 온 가부장제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미군이 떠난다고 성산업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

사진 설명 시작.

©빈채현

두레방은 1986년 한국기독교 장로회 산하 특수선교센터로 개원했다. 문혜림·유복남 초대 두레방 원장은 한국 최초로 기지촌여성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두레방의 영문명은 ‘My Sister’s Place(자매의 집)’으로, 여성들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임을 드러낸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논문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한국 기지촌 여성운동사」(1999)에 따르면, 두레방은 공동 식사·상담·영어 교실 등을 진행했다. 기지촌여성은 상담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는 힘을 길렀고, 두레방은 놀이방과 어린이집을 운영해 기지촌여성이 낳은 아이들을 돌봤다. 기틀이 다져진 후엔 여학생 운동과 연대해 운동을 확장했다. 1990년 이화여대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기지촌여성 지원 활동은 수많은 학생의 참여로 이어졌다.

사진 설명 시작. 초창기 두레방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다. 투명한 유리 위에

1986년 초창기 두레방 건물 ©두레방

두레방은 오랜 시간 빼뻘마을 기지촌여성의 보금자리가 돼왔다. 기지촌여성은 다른 여성노인과 살아온 경험이 달라 일반 노인시설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의 조사에 응답한 기지촌여성의 89.1%가 자주 출입하는 시설로 두레방 등 여성인권단체를 꼽았다. 김은진 현 두레방 원장은 “기지촌여성이 가진 삶의 경험이 일반 여성노인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남편·자식·손주 이야기가 대화거리가 되는 복지관 노인들 틈에 홀로 사는 기지촌여성이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낙인 역시 이들의 노인시설 출입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김 원장은 “기지촌여성은 본인 삶의 이야기를 맘껏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중 몇몇은 과거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며, 기지촌여성이 주로 여성인권단체를 이용하는 까닭을 설명했다. 어느덧 노인이 된 이들에게 두레방은 제 모습 그대로 편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는 두레방을 ‘빼뻘마을에서 우리를 지키며 언제든 방문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자, ‘우리를 시원하게 해준 한 모금 샘물이자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라 칭한 기지촌여성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설명 시작. 2025년 현재 두레방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흰색 건물에 짙은 갈색 팻말이 달려 있다. 팻말 위에

현 두레방 건물

시대가 변하며 두레방의 역할도 변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여성이 기지촌을 떠나며 그 자리를 이주여성이 채웠다. 유영님 3대 두레방 원장은 ‘ㅃㅃ 보관소’에서 진행한 아카이브 프로젝트 「21년간의 두레방 여정」(2024)에서 예술흥행(E-6) 비자로 ‘외국인 여성을 수입’하면서 기지촌의 양상이 달라졌다고 짚었다. E-6 비자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연예·연주·연극·운동경기 등의 활동을 하고자 하는 자’에게 발급되나, 실상은 이주여성을 성산업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된다. 노래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한국에 왔는데, 고용주가 성노동을 강요하는 식이다. 두레방은 이들에게 법률 상담과 의료 지원을 제공한다. 김은진 원장은 두레방이 “인종차별·계급차별·성차별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여성을 위한 숙식 제공과 보호 시설, 귀국 지원”과 E-6 비자의 문제점 개선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 설명 시작. 두레방의 로고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댕기 머리를 한 두 소녀가 웃으면서 서로를 안아주고 있다. 사진 설명 끝.

©두레방

두레방은 한국 기지촌여성을 위한 법제화운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기지촌여성 명예회복과 지원을 위한 법률·조례제정운동은 2024년 경기도의회가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일부개정조례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이끌어 냈다. 김은진 원장의 말을 빌려 두레방의 활동을 정리하면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거대한 군사화가 취약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연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차별과 착취 속에서 살아가는 기지촌여성을 보고 ‘나라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던 문혜림 초대 원장의 다짐과도 맞닿는다. 이처럼 두레방은 오랜 시간 빼뻘마을 여성들의 기댈 언덕이 돼 왔다.

우리의 삶은 퇴거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두레방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2024년 1월 11일, 의정부시는 새뜰마을사업을 근거로 두레방에 시내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두레방 활동가들은 단 한 명의 기지촌여성이라도 있는 한, 빼뻘마을을 떠날 수 없다며 두레방 존치를 주장했다.

의정부시의 요구가 갑작스러운 점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려면 시계를 앞으로 돌려야 한다. 2022년, 빼뻘마을은 도시취약지역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도시새뜰마을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약 47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한 의정부시는 빼뻘마을에 생활·위생시설을 확충하고 안전시설을 개량하는 등 지역 개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어 의정부시는 두레방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커뮤니티센터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두레방 활동가와 기지촌여성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결정이었다. 2024년 5월 의정부시장이 두레방과의 면담에서 ‘1년간 유예를 두고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고 말하며, 이전 시기는 2025년 6월로 늦춰졌다.

사진 설명 시작.

2024년 1월 열린 두레방의 빼뻘마을 존치를 위한 기자회견 ©두레방

두레방을 이전하려는 의정부시에 맞서 활동가들과 기지촌여성의 투쟁이 시작됐다. 두레방은 하나의 공간을 넘어 빼뻘마을에 단단히 뿌리내린 공동체다. 이를 증명하듯, 2024년 4월부터 5월까지 8번에 걸쳐 진행된 ‘빼뻘마을 존치 목요시위’에 고령의 두레방 이용자들이 참여해 목소리 냈다. 빼뻘마을에 40년 가까이 산 기지촌여성 김 모 씨는 ‘내가 빼뻘마을에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두레방이 있기 때문’이라며, ‘두레방이 이전하면 남아있는 이들은 어딜 가서 지원을 받아야 하냐’고 의정부시를 규탄했다. 또 다른 기지촌 여성은 ‘아무도 우리의 억울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두레방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수 있게 도와줘서 조금이나마 억울함을 풀었다’며, 두레방은 ‘아프면 병원에 데려다주고, 트라우마 치료를 통해 아픔을 씻어주고 눈물을 닦아준 고마운 곳’이라고 호소했다. 김은진 원장 역시 아직 살아있는 기지촌여성들에게 두레방이 “일상적 공간을 넘어선 공동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기지촌여성에게 두레방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만날 수 있는 동네 사랑방이자 기지촌 생활을 증언할 수 있는 최후의 공간이다.

올해 4월 진행된 두레방과 여성보육과 간 면담에서 의정부시는 두레방 이전에 대한 입장이 그대로라고 밝혔다. 대신 여성보육과는 ‘이전 후 지속적인 두레방 운영을 위해 이전 시 이사 비용과 보증금, 임차료를 부담할 예산 1,600만 원을 마련했다’며, 두레방이 이전한 후 남은 건물의 활용 방안 등에 대해 함께 고민해 나가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이에 두레방은 대답을 유예한 상태다.

기억을 잇기

사진 설명 시작. 과거 성병검진소 시절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다. 흰 벽에 철창이 달린 창문과 대문이 보인다. 사진 설명 끝.

과거 성병검진소로 쓰인 두레방 건물 ©캐서린 문

두레방은 그 자체로 역사적 보존 가치를 가진다. 현 두레방 건물은 옛 성병보건소다. 1970년대 기지촌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성병보건소에서 기지촌여성은 주 2회 검진을 받아야 했다. 검진증을 소지하지 않으면 단속에 걸렸으며, 진단 결과 성병이 있다고 의심된 여성은 강제 격리됐다. 김은진 원장은 성병보건소가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가가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젠더폭력을 일삼은 공간”이었다며, 이곳이 “기지촌 여성들의 치유·회복 공간”으로 변모하기까지의 역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공간이 갖는 의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볼 때, 기지촌의 역사와 기지촌여성의 삶 모두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두레방이 “기지촌과 기지촌여성의 삶과 힘을 토대로 문화공동체 관계를 형성·발전”시켰고, “국제인권기지촌여성운동사의 발원지”로서도 큰 의미를 갖기에 그 자체로 보전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경기여성가족재단 역시 2020년, 「경기도 기지촌여성 생활 실태 및 지원정책연구」에서 두레방 건물을 비롯한 기지촌여성 공간을 평화인권박물관으로 바꾸는 등 ‘평화와 인권의 장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두레방에 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2019년부터 빼뻘마을에서 예술공간을 운영 중인 김현주 작가는 놀이와 퍼포먼스를 통한 아카이빙에 집중한다. 두레방이 갑작스레 이전 권고를 받은 후 진행한 「거품, 소음, 웅성거림」(2024) 프로젝트는, ‘서사공동체’로서 빼뻘마을이 품은 역사적·문화적 가치에 집중한다. 김 작가와 동료 작가들은 두레방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지촌여성의 그림을 모으는 것을 넘어, 다양한 놀이를 활용한다. 사람들은 워크숍에서 노란 고무줄을 이용해 경계를 만들고 뛰어넘는다. 강인함의 상징인 플라멩코를 추며 자신의 몸을 흔드는 진동을 경험한다. 김 작가는 해당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로 ‘단순히 도시재생에 대한 저항이 아닌, 두레방이 품고 있는 가치를 펼쳐내 지역과 공생할 수 있는 도시재생을 상상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사진 설명 시작.

2024년 6월 진행된 두레방과 ㅃㅃ 보관소의 공동 포럼 ©두레방

빼뻘마을에 관한 기억은 결코 단일한 형태로 환원될 수 없다. 김현주 작가는 기지촌여성에게 빼뻘마을이 “폭력적인 곳, 빠져나가고 싶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인 동시에 “희노애락이 전부 존재하는 곳”이라는 점에 집중한다. 이들이 한 곳에서 겪은 수많은 일은, 기지촌여성이기에 겪은 고통과 피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과거 업소였던 클럽 역시, 일터와 삶터의 기억을 모두 가진 애증의 장소다. 김 작가는 빼뻘마을을 배움터로 만든다면 기지촌여성에게 “내가 있던 공간과 나의 과거가 수치가 아닌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과거의 산물을 박제하는 곳이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담론화할 수 있는 장소”로서 새로운 논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 짚었다. 도시재생이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시설을 짓는 방식으로만 이뤄질 필요는 없다. 장소의 특수성을 파악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 장소성을 극대화하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지일 테다.

사진 설명 시작. 성매매 집결지 폐쇄에 반대하는 시위 현장이다. 한 시위자가

4월 23일 열린 미아리 성매매 집결지 여성 지원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다시함께상담센터

빼뻘마을은 결코 단절된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뺏벌 기지촌은 용주골에서, 미아리 텍사스에서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성매매 집결지를 지우려는 정부와 지자체에 맞서 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도 계속되고 있다. 성산업을 방조해온 국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고 용역을 동원해 성매매 집결지를 파괴하고 있다. 반성매매 담론과 여성인권 증진을 내세운 ‘성매매 근절’이라는 말 앞에서, 당장 오늘 숨 쉬고 노동하는 성노동자의 목소리는 묻힌다. ‘집결지 폐쇄 과정에서 당사자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유엔여성기구의 권고에도, 이들은 일방적인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제대로 된 보상 없이 쫓겨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먼 과거가 아닌 당장 오늘의 일이다. 그렇기에 기지촌여성이라는, 성노동자라는 사실이 낙인이 되는 사회에서 국가로부터 보호는커녕 하나라도 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분투했던 이들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성노동 외에 더 나은 길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 삶의 취약성을 만들어낸 구조 속에서, 이들의 선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길고 오랜 가부장제와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받아안은 몸들을, 끝끝내 기억해야만 오는 미래가 있다. 여전히 빼뻘마을에 '언니'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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