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닷새. 떠도는 이들을 위한 영화제가 인천에서 열렸다.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는 5월 16일, ‘환대의 광장’에서 개막식을 치르며 출발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디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떠돌던 이산(離散) 유대인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오늘날에는 전쟁·식민주의·시장경제·재난 등 다양한 이유로 떠도는 수많은 이주민과 그 후예를 아우른다. 그렇기에 디아스포라는 무수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암전 속에서, 영사기가 그 흐르는 얼굴들을 선명한 빛으로 드리우기 시작한다.
인천, 그리고 디아스포라

인천으로 가기 위해, 늘 타던 상행선이 아닌 반대 방향의 하행선에 몸을 실었다. 인천항 부두가 가까워지는 신포역까지, 초여름 햇볕을 받는 열차의 오래된 지상 구간이 차창 너머로 이채롭게 반짝였다. 인천에 갈 일이 드물었던 기자는 기대감으로 들떴지만, 현대사의 주름 속에서 누군가는 그림자처럼 서늘한 감정을 품고 인천으로 향했을 것이다.
인천은 긴 이주의 역사를 지닌 대표적인 항구 도시다. 1902년 하와이를 향해 조선의 이민자들이 떠난 이래, 인천은 오래도록 이주 송출국이었던 한국의 발판이었다. 동시에 21세기에 가까워지며 한국이 차츰 이주 목적국*으로 변해갈 때, 인천은 이방인이 모이는 집결지가 됐다. 2023년 기준 인천시의 이주민 인구는 약 14만 7천 명으로, 도시 전체 인구의 5%를 차지한다.
*이주 목적국: 이주민들이 옮겨서 정착하고 살아갈 목표가 되는 국가.
인천은 2013년부터 디아스포라를 주제와 가치로 삼은 디아스포라영화제를 개최했다. 올해 13회를 맞은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세계 40개국에서 79편의 작품을 들여와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특히나 이번 영화제는 지금도 진행 중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비판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여러 영화를 ‘디아스포라 인 포커스’라는 프로그램으로 엮었다.
신포국제시장을 지나쳐, 애관극장으로 향했다.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인천아트플랫폼·애관극장· 인천미림극장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대부분의 작품은 이 중 애관극장에서 상영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인 애관극장은 1895년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현대적인 멀티플렉스들과 다르게, 투박하고 정겨운 극장은 마치 시대를 착오한 듯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상영작은 모두 무료였고 좌석 또한 비지정석이었다. 이 자유로운 공간에 정해진 자리란 없었다. 정시가 되면 어둠이 깔리고,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그중 기자가 인상 깊게 본 세 편을, 애써 기억을 그러모아 내밀어 본다.
낯선 곳을 향해
더 나아지기 위해 더 나빠지기. 마흐디 플레이펠의 《낯선 곳을 향해》는 그리스에 머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 ‘차틸라’와 ‘레다’ 사촌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다. 이 영화는 범죄 행각으로 시작한다. 레다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고의로 넘어지면서 한 여성의 눈길을 붙잡아 두는 순간, 차틸라는 여성의 가방을 훔쳐 그대로 달아난다. 그러나 훔친 지갑에는 5유로밖에 없다. 독일로 가기 위한 위조 여권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차틸라와 레다의 꿈은 독일로 가서 카페를 여는 것이다. 지금은 레바논 난민캠프에 있는 차틸라의 아내는, 그 카페에서 가장 맛있는 팔레스타인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을 것이다.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바 자리에, 레다가 서서 손님을 맞을 것이다. 카페에 들어서면 모두가 네 얼빠진 얼굴부터 보겠지. 차틸라는 레다에게 웃으며 말한다. 아테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레다는 차틸라에게 카페 얘기를 더 해달라고 보챈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끝없는 말 속에서 상상은 정말 이뤄질 듯이 단단해진다.

아름다운 미래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그들은 브로커에게 비싼 값을 지불하고 위조 여권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차틸라와 레다는 합법적인 일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위험한 범죄에 과감하게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난민들을 착취하는 길이다. 차틸라는 이탈리아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 하는 시리아 난민들을 속이고, 감금하고, 고문한다. 차틸라는 그들을 이용해 여권을 위조할 만한 큰돈을 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회의에 빠진 레다는, 밀려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치사량의 마약을 투약한다. 차틸라는 미래 대신 죽음에 가까워지는 레다를 끌어안고, 독일 대신 병원으로 내달린다. 더 나은 곳으로 가고자 도약할 때, 이들은 미끄러지면서 품고 있던 소중한 것을 떨어뜨린다.
이 영화는 디아스포라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난민들은 괴로울 때마다 서로에게 모든 게 지나갈 거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지나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레다의 갈비뼈 아래에 새겨진 팔레스타인 땅 모양의 문신처럼, 고통은 몸에 그대로 각인된다. 레다는 마약에 노출되며, 돈을 벌기 위해 동성 간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이런 레다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몸이 사회 구조 속에서 얼마나 물리적으로 취약해지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극영화가 ‘스릴’을 만들어 내는 문법은 디아스포라의 취약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차틸라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계획을 짜고, 그것을 치밀하게 실천한다. 하지만 관객은 그 계획의 성패를 끝까지 확신할 수 없다. 계획의 완결성과 무관하게, 그 결과는 결국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브로커가 딴맘을 먹진 않을지. 공모자나 고객이 배신하진 않을지. 모아둔 돈을 누군가 건드리진 않을지. 바깥의 요인에 의해 언제나 삶이 흔들리는 취약함은 슬픔과 뒤섞인 초조를 몰고 온다.
폭력과 착취가 만들어낸 희생자들이 끝에 몰렸을 때, 마지막으로 붙잡을 것 역시 폭력과 착취뿐이라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이 영화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과 학살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차틸라와 레다의 그리스 생활이 빠져나올 길 없이 어두워 보일 때, 이는 그들 자신 때문이 아닌 거대한 역사적 배후가 드리운 그림자 탓이라는 것을.
야만인들

환대할 준비가 됐는가? 줄리 델피의 《야만인들》은 시종일관 블랙코미디를 유지하며 묻는다. 영화는 프랑스의 도시 팽퐁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기로 했다가, 어쩌다 시리아 난민인 파야드 가족을 대신 받으며 시작한다. 우크라이나 난민은 유럽에서 ‘인기’가 많다는 설명은, 난민 사이에도 위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마르완’, ‘루나’, ‘핫산’, ‘디나’, ‘와엘’, ‘알마’. 시리아에서 온 파야드 가족의 여섯 식구에게, 도시는 품을 열어준다. 그들을 무작정 혐오하는 ‘리우’ 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대다수 선주민이 난민을 선선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교사인 ‘조엘’은 내내 그들을 돕는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안느’는 생필품을 지원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인종차별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똑똑히 인식한다. 그들은 환대를 어려운 일로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의무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나 파야드 가족이 문화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차이를 내비칠 때, 굳건해 보이던 환대의 자세는 흔들린다. 프랑스 크레페가 맛이 없다는 핫산의 혹평부터, 바샤르 독재정권이 시리아에서 학살한 인구가 테러단체 ‘IS’에 의한 희생자보다 많다는 마르완의 발언이 이어지자, 팽퐁 사람들은 이들이 오만하고 테러리스트를 두둔한다며 공포에 술렁거린다.
이는 그들이 환대를 쉽사리 일방적인 행위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환대는 양자가 함께하는 행위다. 이주자도 환대의 행위자다. 그들은 선주민을 판단하고, 마찬가지로 환대의 여부를 결정한다. 마르완과 루나 부부가 팽퐁에 온 첫날 밤, 솔직하게 도시와 시민들에 대한 평가를 나누는 장면은 이 사실을 드러낸다.
파야드 가족은 일방적인 지원의 수혜자이자 환대에 ‘감사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닌, 경제적인 주체로 자립하려 한다. 마르완은 건축가로서 시리아에서 일한 경력을 이어가길 원한다. 디자이너였던 루나는 아티초크를 수확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새로운 노동에 금세 적응한다. 알마는 산부인과 의사지만, 폭격을 당할 때 자격증이 불타 재취업을 하진 못한다. 그러나 그는 호숫가에서 갑작스런 산통을 겪는 ‘제제’의 아이를 무사히 받아낸다. 머리가 아니라 발부터 나오는 상황이었기에, 알마가 없었더라면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제제의 남편은 시종일관 난민을 쫓아내려고 했던 리우였다. 그러나 리우의 딸은 알마의 ‘환대’ 속에서 세상에 나왔다.
영화는 결국 파야드 가족이 공동체의 예외가 아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파야드 가족과 도시의 선주민 모두 변화한다. 따라서 환대는 상호적인 행위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한 채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환대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라고 영화는 유쾌하게 전한다. 그렇게 서로가 끝까지 흔들린 뒤에, 추방 혹은 부양이라는 두 극단 모두를 초월한 공존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내비친다.
공원

시, 라디오, 공원. 소여헨의 《공원》은 이 세 단어를 엮으며 디아스포라의 발화법을 실험한다. 이곳은 대만,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 ‘아스리’와 ‘핫산’은 소여헨 감독으로부터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를 짓고 대화를 나눠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렇게 아스리와 핫산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매일 저녁 타이난 공원에 모여 시를 낭독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만 정부에게 받는 장학금이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이 대만에 제공한 노동력을 인정받은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낀다.
아스리의 시에 드러나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입체적이다. 그들은 고된 일상 끝, 공원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그 가운데서 유머가 스미고 사랑이 싹튼다. 쉬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운 노동자들의 연애는 쉽지 않다. 그들이 공원에서 노래하고 즐기는 시간은 영원처럼 이어지다가도, 다들 다음날의 출근을 위해 기차를 잡으러 바삐 떠나거나 전기스쿠터에 시동을 건다.
이 영화는 시를 라디오로 옮겨놓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이주노동자의 이야기가 담긴 시가 마치 ‘사연’처럼 느껴지기에, 핫산은 아스리에게 우리만의 라디오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름은 ‘인니 라디오 인니(inni Radio Yinni)’. ‘여긴 인도네시아 라디오’라는 뜻이다. 그들은 공원의 빈 경비실을 마치 라디오 부스처럼 사용하며, 나란히 앉아 가상의 청취자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사연을 보내주셨어요”라고 농담하며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이내 성실한 얼굴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가 얽힌 시를 낭독한다.
영화의 막바지, 라디오 부스 안에서 시를 읊던 핫산의 음성에는 어느 순간 이질적인 목소리가 덧쌓인다. 목소리의 주인은 시에 등장하던 이주노동자인 ‘리사’의 실제 목소리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 리사가 나타나, 핫산 옆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낭독하기 시작한다. 어느덧 부스 바깥에는 자신의 사연을 직접 낭독하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줄 서 있다. 라디오의 진행자였던 핫산은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자신 역시 줄 뒤에 선다. 그렇게 시의 화자로만 등장했던 노동자에게 시인의 인칭을 돌려준다.
디아스포라 문학에서 시는 중요하다. 시는 언어적·문화적 소수자가 자신의 삶과 목소리를 몇 행의 짧은 순간에나마 고유하게 되찾는 자리다. 동시에 시라는 형식은 언어를 낯설게 배치해 보는 과정이며, 이는 언어가 반영하는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틈을 벌린다. 현실에 순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을 생성하는 힘이 시에 있다.
라디오는 고유한 현실이 독백으로 끝나지 않도록, 각기 다른 삶의 장면을 중계하고 연결한다. 리사의 시에서는 자본주의와 착취가 나타나고, ‘리스티’의 시에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의 소외감이 느껴진다. 이는 사적인 문제를 넘어 디아스포라 전반이 공유하는 공적인 문제기도 하다. 낭독되는 시어는 주파수를 타고 수많은 이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대화로 번진다.
시와 라디오가 손을 맞잡는 순간, 공원이라는 공간이 드러난다. 아스리와 핫산은 ‘인니 라디오 인니’에 독특한 조건을 붙인다. 이 라디오는 공원 안에서만 청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원은 이주노동자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도시에서 비용을 치르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기 때문이다. 공원은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속에 품었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마음 놓고 서로에게 꺼내놓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지대다. 따라서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라디오의 영역이 딱 공원만큼의 크기를 지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디아스포라의 목소리가 폐쇄적으로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맴돈다는 뜻은 아니다. 공원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선주민들도 사용한다. 아니, 오히려 선주민들이 더 자주 이용한다. 이에 자연스레 선주민과 이주민은 공원에서 얽히고, 라디오는 디아스포라의 말을 공원에 있는 ‘모두’의 화제로 만든다. 따라서 공원은 디아스포라만의 공간 전략이자 발화 방식일 뿐 아니라, 이주하는 이와 정주하는 이들이 함께 엉켜 서로를 발견하는 장이 된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공원에 들러보라.

영사기가 내쏘는 디아스포라의 얼굴은, 스크린에만 머물지 않고 어둠 속 관객들의 표정에도 빛으로 물든다. 때로 떠도는 이와 머무르는 이들의 초상은 겹친다. 인류학자 김현미는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2014)에서 ‘우리는 모두 생애의 한순간 임시적이거나 장기적으로 이주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디아스포라란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디아스포라는 더 나쁜 조건을 피하거나 더 나은 조건을 찾고자 이동하는 모두에게 잠재된 상태다.
따라서 디아스포라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절망 혹은 환상은 모두의 것이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는 ‘야만인들’이 아니다. 지상에서 함께 살아갈 이들이다. 우리는 환대의 방법을 떠올려야 하고,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는 그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나의 ‘공원’으로 자리매김한다. 바로 이곳에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울려 퍼진다. 관람객은 그를 목격하면서 서로 뒤엉킨다. 희미한 팝콘 냄새가 떠도는 애관극장 2층 홀이 북적인다. 숱한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고, 다음 영화를 보러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렇게 떠도는 우리가, 공원에서 마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