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나의 ‘빚’
성노동자의 승리는 모든 여자의 승리다
연금개혁, 문제는 세대가 아니야

성노동자의 승리는 모든 여자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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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고 성(性)을 판다는 이유로 여자들은 모욕당하고, 처벌당하고, 쫓겨난다. 지금 용주골과 미아리텍사스, 빼뻘마을에선 성노동자가 평생 살아온 보금자리가 ‘재개발’과 ‘도시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파괴되고 있다.

성노동자를 향한 폭력은 때로는 온라인 공간에서 ‘페미니즘’의 얼굴로 자행된다. 과거 성노동에 종사하던 이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자,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그를 향해 돌을 던졌다. 양지로 나오지 말고, 음지로 돌아가라고.

이러한 낙인과 혐오는 성노동자 몇몇을 죽일 수는 있어도, 성산업을 떠받드는 자본과 국가, 남성 권력의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노동이 정말 사라지길 바란다면, 성을 파는 여자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성노동자 활동가인 두 사람이 쓴 『반란의 매춘부』는 말한다. “성노동의 전문가는 정치인도, 경찰도 아닌 바로 성노동자 자신”이라고. 이들은 성노동자가 놓여 있는 구체적인 조건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무엇이 그들을 성노동으로 이끄는가. 어떤 제도가 성노동자로 하여금 착취와 폭력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드는가.

사진설명 시작. 『반란의 매춘부』 표지다. 네온사인에

“노동이 아닌 착취다”

성노동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성노동이 노동인가’라는 질문과 맞서야 한다. ‘몸 파는 것이 어떻게 노동이냐’는 비아냥부터 ‘성 착취 피해자로 불러야 한다’는 훈계까지, 성노동을 부정하는 주장에는 ‘좋은 노동’만 노동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저자들은 “노동자가 성취감을 느끼고, 착취적이지 않으며, 즐길 수 있는 일만이 노동으로 규정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일은 사회에서 노동이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노동을 신성시하는 신화는 대다수 노동자가 처한 현실과 거리가 멀다. 대다수에게 노동은 보람이나 성취보단 생계를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착취적인 조건을 감내하고, 스트레스를 견디고, 차별과 폭력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 감정에 대한 처분권 일부를 고용주나 고객에게 일정 시간 내맡기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하고 고귀한 것이 아니다.

어떤 노동이 착취적이고 성차별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노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콜센터에서 저임금과 실적 압박, 성희롱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에게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남자 비위를 맞추는 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정말 그들을 돕고자 한다면, 그 힘든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이 더 안전하고 평등하게 일하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노동자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질문이다.

저자들은 “노동이 좋은 것, 재미있는 것이라거나 심지어 해롭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노동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라고 밝힌다. ‘성노동’이라는 명명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성산업에 내재된 착취 구조를 살피고, 노동자에게 필요한 권리를 선명히 드러낼 수 있다. 가사노동, 감정노동, 꾸밈노동이라는 명명이 그에 내재한 성차별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라리 쿠팡이나 나가라”

성노동자들은 늘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성노동을 한다는 비난에 직면한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이다. 성노동자 혐오에 쿠팡이 오르내리는 일이 반복되자, 공공운수노조 쿠팡물류센터지회는 2024년 12월 그에 반박하는 입장문을 냈다. 매년 산업재해 사망자가 발생하는 쿠팡의 노동조건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으며, 이윤이 우선시되는 구조 속 노동자의 목소리가 배제된다는 점에서 성노동자와 쿠팡노동자의 처지는 다르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성노동자에게 ‘왜 다른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은, 성노동자에게도 다른 이들과 동등한 선택권이 주어진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장애가 있거나, 돌봐야 할 아이가 있거나, 미등록 이주민이라 취업이 제한되는 등의 이유로, 어떤 이들에겐 성노동이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책에서 인용된 마오리족 장애인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내 몸으로는 1주일에 40시간을 일할 수가 없어 넉넉히 벌 수 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나와 내 딸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이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성노동자가 되면, 내가 일할 수 있을 때 일하고, 그렇지 않을 때 쉴 수 있다. 나는 딸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

저자들은 “정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매춘은 지속 가능한 생존 전략”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노동이 ‘좋은 노동’이라는 뜻이 아니라, 왜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선택지에 접근하지 못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성을 판매하지 않고도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다면, 성산업 폐지에 반대할 성노동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매매는 범죄다”

범죄화는 불편한 존재를 눈앞에서 치우는 간편한 방법이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 종식을 위해 경찰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이 ‘감금 페미니즘’이라 부르는 입장이다. 감금 페미니즘은 경찰과 사법 제도가 성노동자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저자들은 많은 국가에서 경찰은 성노동자를 폭행하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가해자기도 하다는 점을 짚는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범죄화는 성매매를 근절하지 못했다. “성노동 금지는 성노동자들이 단속을 피해 도망가거나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어 그들을 더 주변으로 내몰고 더 해로운 상황에 노출시킨다.” 언제든 경찰에 체포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성노동자들은 성구매자 남성과 포주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단속을 피해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일하는 성노동자는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다.

성매매를 처벌하는 사회에서도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성을 팔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동기를 무시한 채 성산업을 축소하려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범죄화는 성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빼앗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사회에서 가장 주변화된 사람들을 걱정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부터 고민하는 것은 어떨까.”

2004년 ‘성매매처벌법’과 ‘성매매피해자보호법’이 한국에서 시행됐다. ‘성매매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성매매를 강요당한 ‘피해자’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성노동자는 처벌 대상이 됐다. 이 법으로 성노동자가 일터에서 겪는 폭력과 착취를 신고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는 더 많은 성노동자가 범죄 혐의자가 되거나, 착취적인 노동 환경을 강요당하는 결과로 돌아왔다. 법이 시행된 후에도 성매매 산업은 사라지기는커녕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집을 불렸다.

성노동자가 겪는 폭력을 “성노동이 감수해야 할 위험요소” 정도로만 여기는 한, 성매매 근절은 요원하다. “범죄화가 전달하는 실제 메시지는 명백하다. 바로 성판매자들이 안전, 권리, 정의의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시작. 집회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서있다. 피켓에는

“창녀들 때문에 여권이 하락한다”

레즈비언 연애 프로그램 《너의연애》에 출연한 김리원 씨는 과거 인터넷 성인방송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의 표적이 됐다. ‘남성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 때문에 여성 전체의 인권이 하락한다’, ‘너 같은 여자 때문에 남자들이 여자를 성적 도구로 보는 거다’ 등 날 선 말이 온라인상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여성의 성을 상품으로 만드는 건 성노동자가 아닌 남성과 가부장제다. 가부장제는 특정한 성 역할에서 벗어난 여성에게 ‘창녀’라는 이름을 붙인다. ‘성녀’와 ‘창녀’로 여성을 가르는 이분법 아래서, “창녀 취급을 받을 것이라는 위협은 여성들이 성노동자와 거리를 두게 만든다.”

어떤 페미니즘은 ‘자격 없는’ 여성에게 돌을 던진다. 유능하고 ‘바람직한’ 여성을 내세워 견고한 ‘여성 정체성’을 구축하는 사이,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의 중심부에서 지워졌다. 이는 이미 공고한 남성중심주의와 능력주의 아래서 여성의 몫을 쟁취하기 위한 전략으로 정당화됐다. 퀴어 페미니스트 연혜원은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시적이 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가 인정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무능한 여자, 남성에게 의존하고 남성을 욕망하는 여자는 설 곳을 찾지 못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의 대안은?’, 〈일다〉, 2022. 6. 21.

또 어떤 페미니즘은 성노동자를 은유로 사용한다. ‘모든 여자는 창녀’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성노동자가 겪는 착취를 여성 일반의 문제로 이해하는 수사라 해도, 이러한 상징 정치는 성노동자가 처해 있는 물적 조건을 포착하지 못한다. 성노동자가 아닌 여자는 성구매자에게 위협을 느끼거나 경찰의 단속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당장 내일 거주지가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 성노동자를 둘러싼 규범과 불평등은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와 얽혀 있기도 하다. 저자들이 성노동자가 성노동을 택하게 만드는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여성학자 손희정은 여성을 고정된 범주가 아닌,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거점’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개개인의 취약성이 모두의 해방전선에서 함께 논의될 때, 우리는 혐오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함께 해볼까요?’, 〈한겨레〉, 2023. 5. 23.

김수환천세민_북새통_사진3.jpg의 사본.jpg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별 짓기가 아닌 연대의 확장이다. 수많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만을 운동의 주체로 인정하는 대신, 오염되고 쫓겨나고 지워진 자리에서 당신이 겪는 고통에 함께 저항하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이제는 돌 던지기를 멈추고, 흩어진 돌을 그러모아 협력의 정치를 쌓아야 한다.

성노동자는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 저자들은 “모든 사람이 각자 공평한 몫의 자원을 가질 수 있고, 생존자들이 치유와 정의에 접근할 수 있는 미래”를 말한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길 요구하는 매춘부들의 배짱 있는 태도에 페미니스트들의 반란과 저항이 더욱 고양될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창녀를 배제하는 페미니즘에 모든 여성이 승리하는 미래는 없다. 반대로, 창녀가 승리하면 모든 여성이 승리한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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