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나의 ‘빚’

사진 설명 시작. 편린 씨가 열차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설명 끝.

편린(미학과 석사과정)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독일에 있다.

1.

대학은 뭘 하는 곳일까.

대학원 연구실에 앉아서 텍스트와 씨름하다 보면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멀쩡한 형광등이 갑자기 0.5초 정도 저 혼자 꺼졌다가 돌아오듯이, 형형하게 빛을 뿜는 텍스트의 불이 꺼지고 모든 것이 망연해진다.

작년까지 모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가끔씩 상담할 일이 생긴다. 시험 성적은 둘째 치고 공부 자체에 흥미가 전혀 없는 중학교 2학년짜리 아이였다.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그가 물었다. ‘근데요, 선생님. 대학에 가면 뭐 해요?’ 우리는 심지어 대학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맥락 없이 툭 앞에 떨궈진 그의 질문은 ‘요즘 같은 시기에 대학에 가봤자 뭐하겠느냐’는 수사의문문이 아니라 정말 대학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묻는 투명한 질문이었다. 그 투명함 앞에 말문이 막혔다. 오랫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영양가 없는 상투적인 이야기로 땜질을 했다. 상담이 끝났고, 아이가 교무실 밖으로 나갔고, 문이 닫혔다. 치욕스러웠다.

나 스스로도 대학이 무엇하는 기관인지 모르겠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진리를 좇는 곳’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문은 꽁꽁 닫혀있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이번에도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故 김수행 교수의 후임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뽑지 않았던 십수 년 전으로 소급할 수 있는 일이고, 김수행 교수가 임용될 당시조차도 갖은 훼방을 놓았던 수십 년 전까지도 소급할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최근의 배제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경제학부가 조금의 체면치레도 하지 않고 아주 노골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경제학 교과목을 졸업 전에 한 번이라도 들어보겠다는 학생 수십 명이 보다 못해 올해 하계 계절학기 수요조사 기간에 일제히 강의 수강 의사를 밝혔다. ‘자꾸 비주류니, 수요가 없느니, 시대에 뒤처졌느니 온갖 핑계 주워섬기는데, 하여간 듣겠다는 사람들 여기 멀쩡히 있으니 그런 줄 아시라’는 뜻을 돌려서 전한 셈이다. 경제학부는 그 메시지를 ‘읽고 씹’었다. ‘서울대학교 내 마르크스경제학 개설을 요구하는 학생들(서마학)’이 출범했고,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3.

미학이라는 퍽 괴괴한 학문을 8년째 공부하면서, 마르크스를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늘 나를 뒤따라 다녔다. 그는 미학적 범주에 관한 저술을 남긴 적이 없고 예술에 관해 언급한 바도 드물다. 사상계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력과 별개로 그가 착목한 제문제를 미학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늘 난제다. 그의 사상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경제학적 범주는 우리를 언제나 엄정한 현실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여기가 아닌 저곳을 향해 심미성의 날개를 퍼덕이려 할 때마다 마르크스가 끝까지 우리를 주목시키는 ‘현실’의 대원칙이 내 발목을 잡는 것이다.

나름대로 그 조화의 단초를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5년쯤 전에 이성복 시인의 시론 『무한화서』(2015)를 읽었을 때였다. 나를 사로잡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얘기할 것 없어요. 그런 건 내가 안 해도 벌써 다 나와 있어요. 그냥 우리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만 쓰세요. 이성복이 그렇게 의도했는지는 물론 알 길이 없지만, 나는 이 구절을 읽자마자 마르크스의 사상이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는 저 유명한 비유를 마침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딱딱하다 못해 준엄하기까지 한 그의 경제학은 사실 우리 정신의 시선을 ‘우리 집 부엌의 숟가락’으로, 즉 진정한 시의 요소로, 시적인 인식으로 돌리기 위한 간절한 시도였던 것이다. 사유하는 자들은 이제 한없이 현실과 멀어지기만을 바라는 관념들 사이의 자가 증식을 멈추고, 그 대신 두들겨 맞은 자리의 피멍을, 한없이 초라한 저녁 식탁을, 기계에 잘려나간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기름때가 문신처럼 스민 손톱 밑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그것으로부터 출발해 도달할 수 있는 배후를, 즉 자본주의의 문제를 생각하자고 그는 호소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마르크스의 냉철한 말투 밑을 관류하는 깊은 감각의 차원, 신체의 차원, 심미성의 차원, 시(詩)의 차원, 땅의 차원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4.

서마학의 투쟁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줬다. 그는 짐짓 서울대를 조소하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나의 빛’ 달아놓은 너네 학교 간판 갖다가 그냥 떼 버리라고 그래.” 그렇게 우스운 말투로 내게 힘을 보태주겠다는 그의 마음은 정말 귀했고 나도 웃었지만, 나는 그 대화가 끝난 뒤 그 말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친구처럼,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표어는 영광스러워도 서울대는 그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서울대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차라리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표어 자체가 이미 참을 수 없는 ‘하늘’의 태도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지상의 악다구니로부터 고고히 솟아올라 하늘 가까이 놓인 암자. 그 위대한 정점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고결한 인간들.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표어에는 이런 ‘성배 추종’의 분위기가 떠돈다. 나는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한없이 추상화되고, 관념화되고, 개념화되고, 탈현실화되고, 마침내는 부엌의 숟가락 개수 따위는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될 것만 같다. 미학도로서 내가 갖는 존재불안 가운데 이보다 더 심한 불안도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경제학이 경제학부에서 영영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느낀 불안이 딱 그것이었던 듯싶다.

경제학은 적어도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들고 놀고 일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는 현실의 차원, 즉 숟가락의 차원에서 출발하고 그 차원에 꿋꿋이 머무르려 하는 유일한 학문이다. 그의 사유가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지에 폭넓게 닿아있으면서도 결국 그 구심점을 끝까지 경제학에 둔 이유도 경제학이 ‘살아가는 문제’ 및 ‘잘 사는 문제’에 골몰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주류경제학, 그리고 주류경제학에 압도된 상태의 서울대 경제학부는, 경제학의 문제를 하늘로 올려보내려 한다. 너의 존재는 ‘인적 자원’이 되고, 너의 죽음은 ‘비용 손실’이 되고, 너의 역량은 ‘효율성’이 되고, 너의 분노는 ‘경영 리스크’가 되고, 너의 해고는 ‘유연화 정책’이 되고, 우리의 절망은 ‘경기 침체’가 된다. 이렇게 중립화된 개념들이 하나하나 숫자로, 도표로, 그래프로, 공식으로, 예측가능한 지표로 변환된다. 한없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지상의 악다구니는 점점 깨끗한 윤곽선으로 압축되다가 마침내 한 점으로 쪼그라든다. 새하얀 좌표평면 위를 매끄럽게 지나가며 미래의 경로를 점지하는 아름다운 경제학적 곡선들이 우리의 삶을 낱낱이 설명해 준다며 경제학자들이 샴페인을 터뜨린다. 과학적 법칙으로 환하게 밝혀진 세계 위에서, 진리의 빛 아래에서,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며 자축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잘 사는 일’에 대해서는, 몸에 대해서는, 숟가락에 대해서는, 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된 바가 없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주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가? 더 신뢰 가능한 모형인가? 더 수학적으로 엄격한가? 나는 이 모든 질문이 본질을 빗겨갔음을 지적하고 싶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해상도와 선명도를 놓고 다투지 않는다. 마르크스경제학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눈밭, 공허하고 하얀 좌표평면의 빛에 눈멀어 가는 경제학에게, 자신의 본래 과제를 상기시키는 경제학이다.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를, 한없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지상의 악다구니라는 과제를.

5.

《뷰티풀 마인드》(2001)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내쉬의 일생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다. 병력이 오래된 정신질환 환자였던 ‘내쉬’는 어느 날 콜롬비아대 학회에서 리만 가설을 강연하던 도중 횡설수설하며 무너져 내렸고, 강연이 취소된 뒤 그는 정신병원에서 조현병 판정을 받는다. 영화에서 내쉬는 자신이 비밀정보기관에 소속된 스파이라고 믿었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한다는 망상에 빠진다. (이는 실제 일화기도 하다.) 그는 하루종일 뜻없는 숫자와 좌표와 공식을 적고 그래프를 그리며 존재하지 않는 기관의 존재하지 않는 군사암호체계를 푸는 데 시간을 보낸다. 무너져 내리던 내쉬를 심연에서 건져낸 것은 그의 아내 ‘앨리샤’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내쉬의 손을 붙잡고 앨리샤는 그의 창백한 뺨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자신의 뺨에 그의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댄다. 이거. 이게 진짜야.

나는 그 장면을 지금까지도 아주 오래오래 생각한다.

6.

대학은 뭘 하는 곳일까. 지금 그 학생을 다시 만나도, 여전히 ‘진리를 좇는 곳’이라고 말해주지는 못하겠다. 도리어 ‘대학에서는 ‘사실들’을 가르친단다’라고 폭로하는 어투로 말해줄 것만 같다. 아니, ‘‘숫자들’을 가르친단다’라고 말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앨리샤가 내쉬의 손을 잡고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는 진짜도 있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이게 진짜야’라는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그 문장의 주어 ‘이것’에는 무엇이 들어갈 수 있을까? ‘마르크스경제학’이 그 자리에 들어가면 되는 것일까?

서마학의 투쟁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바로 그 ‘진짜’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것은 분노하고 위로하고 함께 서는 사람들이다. 서마학의 성명문에는 2,7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연서명했다. 한편 서마학에서는 강성윤 강사와 함께 하계 계절학기에 공식 개설이 불허된 ‘정치경제학입문’ 수업을 자체적으로 개설하고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수강생 채팅방에는, 글을 적고 있는 5월 24일 현재 천 명이 넘는 시민이 몰려들었다. 하루에도 사람들이 수백 명씩 채팅방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 기고가 실릴 때쯤엔 몇 명이 신청하게 될지, 무서울 지경이다.*

*서마학에 따르면, 5월 28일 기준 수강생 2천 명을 돌파했다.

마르크스경제학도 마르크스주의도 마르크스도 이것에 비하면 한낱 말뿐이다. 대학은 진리를 온통 사실로 물들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 아직은 대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대학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빛의 이름으로 외면당한, 한없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지상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어난다. 이렇다면야 대학 안에는 아직 ‘진짜’가 남아있다고 유감없이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진짜’인 것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르자고, 저들 손 안에 납치돼 있는 진리를 빼앗아 올바른 곳에 진리를 두자고, 당돌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진리를 구해내고 대학을 구해낼 때까지는, 대학 구성원 모두가 빚을 진 셈이다. 표어를 ‘진리는 나의 빚’이라고 바꿔 부르고 싶어진다.

7.

무너져가는 세계는 늘 풀뿌리 같은 민중의 손으로 구해왔다는 점을 지난 겨울이 보여준 것처럼, 무너져가는 대학도 늘 풀뿌리 같은 학생들의 손으로 구할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여름이 보여줄 수 있을까.

(…)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 김수영, 『거대한 뿌리』(1995)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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