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세상 함께 굿판을 열자

무속신앙 속 정상성 규범 해체하기
▲무당의 조상으로 알려진 바리데기 ©빈채현

*일제강점기 식민주의자 민속학자들은 우리 민간 신앙을 낮춰 부르려는 의도로 무속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에 무속이란 표현 대신 무교(巫敎)로 부르자는 주장도 존재하나, 무속을 종교적 위치에 놓는 것이 적절한지는 아직 논쟁이 진행 중이므로 이 기사에서는 무속으로 표기했음을 밝힌다.

  바리데기야. 바리데기야. 오구대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나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데기야.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무럭무럭 자란 바리데기야. 열다섯 되던 해에 아버지 죽을병에 걸리자 지나가던 고승은 생명수만이 오구대왕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했지.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아버지 드릴 생명수 찾으러 죽음의 세계로 향한 바리데기야. 죽은 이만 갈 수 있다는 세계에서 결혼해 아기를 낳은 바리데기야. 끝내 물과 꽃 찾아와 아버지를 살린 바리데기야. 나라의 반을 하사하겠단 아버지 말에 고개를 젓고 홀로 떠나 저승의 신이 된 바리데기야. 영원히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망자를 천도하고 무당의 조상이 돼 이 땅을 굽어살필 바리데기야.

  한국의 무속신앙을 상징하는 바리데기 설화는 과거 가부장적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한 바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탄생부터 기대에 못 미쳐 고통받지만 끝내 자신을 버린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바리데기의 일생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으면서도 국가적 중대사가 있으면 굿을 통해 하늘에 평안을 빌어야 했던 무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이승에서 오구대왕과 함께 영예를 누리는 삶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 돼 서천 서역을 오가며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다. 그는 가부장적 체제에 순응하기보다 또 다른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 되길 택해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산 자들의 세계에 균열을 낸다.

  이것은 오늘날 무당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신당의 문을 두드린다. 이미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경험한 이들이다. 그 풀지 못한 한은 누구의 것인지, 오늘날 무당은 누구를 위해 굿을 하는지 우리 무속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봤다.

왜 그 여자는 무당이 됐는가

▲무당의 조상으로 알려진 바리데기 ©빈채현

  바리데기를 여성 시인의 화신으로 본 김혜순 시인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22)에서 여성의 언어를 여성성에, 죽음에 의해 ‘들리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김 시인은 ‘여성적 들림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 버려짐, 죽음을 당해본 경험의 집적 속에서 터져 나온 하나의 다른, 언어를 넘어선 목소리’라며 들림을 경험한 여성은 무당이 돼 파괴된 자아의 일부분에 또 다른 혼을 받아들이거나, 시인이 돼 그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자, 남편의 바람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여자, 버려지고 죽임을 경험한 여자는 무당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 여자들은 무당이 됐는가. 이들은 이미 정해진 무당의 팔자에 단지 순응한 것일까. 여성이 무당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에 관해선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먼저, 여성의 몸과 언어가 주변화됐기 때문이란 설이 존재한다. 사회에서 밀려나거나 낙인찍힌 존재는 살고자 도망치는 과정에서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치며 무당이 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 국내 무속을 연구한 황루시 민족학자가 본 사례들에 따르면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살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사회에 배신당한 이들이 무당이 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러한 위치에 있는 이는 대개 여성이었다. 황 민족학자는 『우리 무당 이야기』(2000)에서 ‘이들이 그 과정에서 심성을 다쳤을 법도 하건만 다행히 무속의 신을 만나 위안을 얻고 그 안에 속해 살면서 안정을 찾았다’고 분석한다.

  신병은 인간의 좁은 세계관으로 담을 수 없는 크고 맑은 신령이 내려올 때 겪는 풍파이며, 신내림이란 그 과정을 통해 만물과의 연결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는 결국 자신과 같이 주변화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갖는 것이다. 무당이 된 여성들에게 여태까지의 삶은 단지 아픈 역사에 머물지 않고, 자신에게 사명이 부여되기까지의 시간으로 새로이 해석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삶을 주체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게 한다. 홍칼리 무당은 신내림을 “나의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 아님을 알게 되는 연결과 해방의 시간”이라 말하며, 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홍 무당은 “내가 모두에게 들리고 있음을 기억하고, 각성하고, 교감하고, 마침내 다 같이 해방되게 해달라고,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온전함을 알고 그것을 모두가 기억하고 변화하길 간절히 빌고 비는 것”이 무당의 일이라 설명한다. 이처럼 주변화된 몸은 신의 담지자가 돼 고통을 해석할 영성의 언어를 가진다. 

  무속 자체가 오랜 기간 여성 의례로 기능해 여성문화의 성격이 강하다는 설도 있다. 인류학자 로렐 켄달은 『무당, 여성, 신령들』(2016)에서 무속 의례의 주요 무대로 전통적 한국 가옥을 꼽으며, 여성의 가정 내 주요 역할 중 하나가 가정 신령들에게 집안의 평안을 비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으론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기반한 모계사회의 산물이 무당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무당이 됐다고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무당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었고, 유럽의 마녀사냥이나 유신헌법 시절의 굿판 단속과 같이 개개인의 영성과 공동체의 한풀이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역사 내내 있었다. 홍칼리 무당은 “영적 공동체가 사라져야 식민 지배가 가능하단 걸 많은 지배자가 알고 있었다”며, “역사 이전에 존재한 민담과 노래로 서로를 지키던 무당과 마녀부터 처단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무속과 풍수는 미신처럼 여겨져 비과학적이라 지탄받으면서도, 한국인의 삶에 침투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중대사를 앞두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신점을 보러 가는 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문화로 인식된다. 이렇게 오랜 시간 한국의 무속을 지탱한 뿌리엔 무엇이 있을까.

굿판 위에 떠오른 당신의 삶

  우리 무속신앙의 근간엔 소외되고 억압당한 존재의 아픔을 알고 연대하길 택한 민중의 사고가 반영돼 있다. 황루시 민속학자는 『뒷전의 주인공』(2021)에서 이를 ‘세상 모든 존재의 아픔이 곧 나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과 힘이 닿는다면 그 아픔을 풀어줘야 한다는’ 소망이라 설명했다. 이는 굿의 마지막 제차(祭次)인 ‘뒷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뒷전은 굿에 따라 든 잡귀를 물리는 무당굿의 마지막 순서다. 아무리 굿을 잘했더라도 뒷전을 망치면 굿 전체가 허사가 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무속신앙의 본질에 가장 닿아있다고 평가되는 뒷전은 모욕당하고 차별당한 이들의 존재를 극의 형태로 재현해 살아생전 쌓인 한을 풀려 한다.

▲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 ©해동굿문화센터

  뒷전에서 재현되는 이는 주로 장애인, 여성과 같은 당시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뒷전이란 극 속에서 병을 고쳐 장애에서 해방되거나, 울고 웃으며 삶의 고단함을 풀어낸다. 물론 이는 장애를 없애야만 행복하다고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재현이 현실의 실존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보다 대상화와 연민에 그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장애가 죄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비춰 봤을 때,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공동체 내에 지속적으로 환기했다는 점에선 의의가 있다. 중요한 건 한계를 인정하고 굿이 새로운 시대의 윤리와 함께 갈 수 있도록 상상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존재를 불러들인 굿판은 의례에 그치지 않고 노래판, 탈판, 놀이판과 같은 다양한 문화와 접목해 하나의 공연예술로 기능했다. 무용가이자 무속인으로 알려진 故 김금화 만신이 ‘굿은 종합예술이니 편견 없이 봐달라’고 말했듯이 오늘날 굿은 공동체 축제나 예술제와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굿의 목적 역시 풍년과 풍어를 하늘과 바다에 바라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래 말해지지 못한 제주 4·3의 서사를 재현하며 지나간 역사에 대해 새롭게 기억을 구성하는 등 다채롭다. 또한 굿은 누구의 아픔에 감응하는지에 따라 그 형태와 방식이 계속 변해왔다.

세상 모든 존재에 영이 있다고

  무당의 역할은 예로부터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울한 존재를 달래고 공동체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으로 희생된 동물의 한을 풀어주는 위령제나, 무당이 끌어안아야 하는 밀려난 몸에 “먼저 태어난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학살되고 개조되고 도축되고 살처분되고 소비되는 비인간 동물들, 이 모든 폭력과 핵폐기물의 섬이 된 산과 바다, 숲과 하늘과 땅, 자연 신령”까지도 모두 포함된다는 홍칼리 무당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날 무속은 인간 세계를 넘어 비인간 존재를 향한다. 故 김금화 만신의 신딸인 혜경궁 김혜경 무당은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2022)에서 ‘사람이 죽으면 짐승으로 변하기도 하고 나비로 변하기도 하니까 유기견도 기르고 길고양이 밥도 주는 거’라며, ‘얘들도 영혼이 있어서 죽으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굿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시대는 지났다. 세상 모든 존재에 영이 있음을 믿어 만물과의 연결을 지향하는 샤머니즘은 오늘날 일부 무당이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기후 위기 대응을 외치는 현실의 토대가 된다. 

▲다양한 비인간 존재 ©빈채현

  이러한 무속의 세계관은 동물, 식물, 바위와 같이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연관인 애니미즘(animism)과 맞닿아 있다. 오래된 나무엔 목신이 깃들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해 오늘날 각지에서 진행되는 목신제(木神祭)의 뿌리는 나무의 생명성을 느끼는 마음이다. 유기쁨 생태학자는 애니미즘이 가진 세계관과 감수성을 오늘날 복원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단지 원시시대로 회귀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유 생태학자는 “애니미즘이란 인간이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인간만이 의미 있는 행위자가 아니라 수많은 존재가 있음을 명심하는 것”이라며, 애니미즘은 자연물로부터 영적 믿음을 불러일으키기보단 현재의 뒤틀린 관계를 조정하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과거 생태 운동의 현장에서 애니미즘은 종종 서구의 기계론적 태도를 대체하는 대안적 영성 혹은 자연의 성스러움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소환됐다. 그러나 유기쁨 생태학자의 저서인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2023)에 따르면 이는 영적인 힘이 자본주의적 맥락과 결합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영성 상품화’가 되기 쉬우며, 애초에 비서구 타자의 세계관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시도 자체가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를 전제하기에 많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를 넘어 ‘새로운 애니미즘’을 상상하는 방식은 결국 인간적인 것 너머의 것과 어떻게 연결될지를 고심하는 것이다. 인간이지만 인간만은 아닌 방식으로, 또 다른 확장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이런 애니미즘 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위계에서 비롯된 생태 위기를 경험하는 현대사회에 관계를 재배치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누군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 기술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자연에 눈을 두기보단 AI와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기쁨 생태학자는 “AI와 과학 기술이 도시 생활자의 일상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더라도 그것만이 보편적인 이야기로 말해지고 시골 생활자의 이야기는 예외로 취급돼선 안 된다”며, “지금 우리 사는 세계를 현대인들이 만든 인공적 산물과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것으로 나눈다면 전자와 맺는 관계가 압도적으로 크다”고 우려했다. 치우친 관계 맺음은 논의를 한쪽으로 쏠리게 해 세계의 다른 면을 없는 것처럼 만든다. 이 불균형을 극복하려면 농촌이나 자연물이 가득한 관광지에 굳이 찾아가기보단 나의 생활 반경 안에서 그간 얘기되지 않던 것에 눈길을 주고,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애니미즘이 가진 잠재력은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도 기존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유기쁨 생태학자는 “생명을 민감하게 감각하는 이들은 주로 농민이나 어민처럼 자연을 생활 터전으로 삼은 이들”이라며, “시골 주민들 혹은 세계 각지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없는 것처럼 취급할 게 아니라 이들 애니미스트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인간 사회 내부의 관계 조정 역시 필요함을 호소했다. 

신의 뜻을 한 치의 왜곡 없이 전달하리니

  타자에 대한 인식과 목소리 듣기를 위한 노력은 무속신앙의 정상성 규범을 깨려는 노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기존 무속의 전형적인 해석은 퀴어 배제적이거나 여성 혐오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퀴어와 비혼주의자를 소거하며 운명을 해석하는 순간 누군가의 삶은 없는 것이 된다.

  트랜스젠더인 예원당 무당은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2022)에서 ‘일반 점집에 가면 게이한테 예쁜 여자가 있는데 왜 결혼 안 하냐는 식으로 말하니 속 시원히 얘기할 수가 없다며, 내게 퀴어 손님들이 많이 온다’고 밝혔다. 이에 홍칼리 무당은 ‘사실 모든 무당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할머니·할아버지·선녀·장군·동녀·동자가 실리기에 성별 정체성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같은 퀴어 정체성을 공유하는 무당으로서 퀴어 친화적인 점사 풀이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했다. 

  여성의 운명에 대한 풀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해석하는 과거의 명리학은 현대 여성의 운명을 말하는 데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사주에서 상관(傷官)이란 말은 정관(正官)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때 정관은 남성에겐 자녀나 직장, 명예가 되고 여성에겐 남편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잦았다. 여성을 남성에게 속한 존재로 여겨, 사주에 상관이 있으면 남자 복이 없다거나 이혼할 팔자라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복’으로 해석되는 식신(食神) 역시 남성에겐 창의성을 펼치는 일이 활황할 것으로, 여성에겐 자식 복이 클 것으로 해석됐다.

  한국 무속의 정상성은 이 외에도 장애를 벌전(罰錢)으로 해석하는 장애인에 대한 점사나, 태아령(胎兒靈)과 대수대명

(代數代命) 등에서 나타난다. 한국 무속은 낙태가 살생죄라며 낙태된 태아령이 흉악령이 되지 않도록 천도재를 권했는데, 이는 임신중지 시술을 한 여성의 죄책감을 증폭시킨다. 홍칼리 무당은 “낙태령은 인간들의 집단 무의식이 주입한 죄책감이자, 임신과 임신중단을 공동체의 지원 없이 여성 혼자 감당하게 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트라우마, 낙인, 울분, 원한”과 같다며, 이를 해소하려면 죽은 태아의 영이 아닌 오랜 시간 침묵 속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들의 영을 기리고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가부장의 망령을 쫓는 일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처럼 임신중단 과정의 말 못 할 고통을 끊어내려면, 무속신앙의 변화와 더불어 여성이 몸의 기억을 솔직히 풀어내고 공동체가 이를 함께 감당할 수 있도록 제도와 인식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

  명을 대신한다는 뜻의 대수대명은 돼지, 소, 닭과 같은 비인간 동물을 죽임으로써 인간의 명을 늘린다고 믿어져왔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업이 횡행하는 오늘날 사람의 명을 위해 다른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진정한 축원의 방식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무당들이 늘고 있다. 이에 식물을 통한 비방(祕方)처럼 다른 방법을 모색하며 대수대명의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가 움트고 있다. 이처럼 기존 운명학의 정상성 규범을 벗어나면 차별적 시선에 갇히지 않고 왜곡 없이 신의 뜻을 전달해 더욱 다양한 점사 풀이가 가능하다. 

▲동물진혼굿을 진행 중인 무당과 퍼포머들 ©동물해방물결

  또 손님의 아픔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와 연결된다고 느낀 오늘날 무당들은 정치와 종교의 이분법을 타파하며 거리로, 국회 앞으로 나간다. 2022년 조직된 무속인 정의연대 굿판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 농성 현장에 동조 단식을 하러 갔다. 이들은 국회 앞에서 온몸에 붉은 천을 두르고 기후 위기에 대한 저항과 만물의 정령을 기리는 뜻을 담아 붉은 정령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홍칼리 무당은 “무당은 마을공동체를 지키는 활동가이자, 다른 종과 교감하며 스스로 그 존재가 되기도 하는 성정체성과 종정체성이 유동적인 존재”라며,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이유를 “너무 빠르고 방대하게 일어나는 현시대 폭력에 동조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밝혔다. 신당을 두드리는 이의 아픔은 단지 그만의 것이 아니다. 그걸 아는 무당은 점사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피켓을 들고 천을 휘날리며 자꾸만 거리로 나간다. 세상이 나아져야 운명도 바뀔 수 있다는 신념 위에서, 세상을 향한 크고 큰 굿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먼 옛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으로 주변화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직업이었던 무당은 오늘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굿판을 열거나 공장식 축산으로 희생된 동물들에 대한 위령제를 진행하는 등 그 역할과 형태가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됐다. 이는 세상 모든 존재의 귀함을 믿고, 말해지지 않는 고통에 귀를 기울여 그의 아픔을 기어이 역사의 일부분으로 끌어안겠다는 오랜 시도다.

  무지개 무당 무무는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2022)에서 ‘함께 울 일이 없어지면 가장 좋겠지만, 그런 사회가 쉽게 오진 않을 것 같다’며, ‘누군가 계속 함께 우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면, 그런 무당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무속에서 말하는 ‘조화’는 세상 모든 것에 영성이 깃들어 있으니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존재가 저마다의 진실을 가졌음을 믿고, 더는 홀로 우는 이가 없도록 하늘에 땅에 바다에 숲에 나무에 꽃에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는 게 오래간 한국 무속의 지향점이었다. 무속은 단지 과거의 유산, 신비스럽고 영험한 것, 비과학적인 미신이 아니다. 이제 무속에 대한 이분법적 시선을 넘어 우리 무속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잠재력에 주목할 때다.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를 위한 성명서 ©빈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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