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화장실 홍보 단편 영화였다. 《퍼펙트 데이즈》(2024)는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도쿄 공중화장실 개선 홍보를 위한 프로젝트로 출발했다. 그러나 영화는 감독 빔 벤더스가 연출을 맡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홍보란 널리 알리는 것. 최초의 목적에 맞게, 영화는 시부야의 감각적인 화장실과 웅장한 도쿄스카이트리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홍보’는 단순한 도시의 겉보기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히라야마’라는 안내자를 통해, 관객과 이 도시를 찬찬히 걸으며 더욱 멀고 깊은 곳까지 안내한다.

삶을 바라보는 소축척의 시선
그의 기상에는 알람조차 필요하지 않다. 집 앞 신사에서 거리를 빗질하는 낯익은 마찰음이 들려오면,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방에서 눈을 뜬다. 아직 새벽빛조차 밝지 않은 이른 아침이지만, 히라야마는 예정된 하루를 시작한다. 몸을 단장하고, 식물에 물을 주고,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물품들을 챙겨 나간다. 캔커피를 자판기에서 뽑아 한 모금 마신 뒤, 차에 시동을 켜 낯익은 출근길을 나선다. 도쿄스카이트리가 눈에 잡힐 때쯤이면 카세트테이프를 밀어넣어 오래된 록 앨범을 재생한다. 그가 향하는 곳은 도쿄의 화장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히라야마는 중장년의 화장실 청소부다.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에 걸쳐 영화는 히라야마의 11일을 조망한다. 히라야마의 삶은 반복으로 구성된다. 영화에는 극적인 사건이 없고, 히라야마는 다만 규칙을 따르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따름이다. 일하는 날뿐 아니라 쉬는 날에도 규칙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셔츠를 걸치고 나들이를 나간다. 세탁물을 돌리고, 틈틈이 찍은 필름 사진을 현상하며, 일주일을 함께할 문고본 책을 고른다. 그러고는 단골 가게에 들러 술로 목을 축인다.
모든 것이 되풀이일 뿐이라면, 우리가 히라야마의 하루를 열한 번이나 지켜볼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분명 히라야마의 나날은 서로 완벽히 똑같지 않다. 정해진 하루의 궤도에는 늘 사소한 우연들이 충돌하며, 매일의 풍경은 늘 다른 모습으로 변주된다. 부하 직원의 여자친구가 느닷없이 개입해 루틴이 다 틀어지기도 하고, 가출한 조카가 집에 불쑥 찾아오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손님을 들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히라야마의 삶은 강박이 아니라 다만 반복이 되며, 이 반복에 스민 차이가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퍼펙트 데이즈》는 기본적으로 삶을 높은 배율로 바라보는, 소축척의 시선을 유지한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것을 유심히 바라봐주는. 히라야마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분명 일상을 변주시키지만, 큰 틀에서 히라야마의 삶을 뒤흔들지 않는다. 다른 창작물들에서 대개 주인공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사건을 서사로 채택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화는 크게 뒤흔들리는 삶의 순간만이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담담히 전달한다.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지탱하는 기둥들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복수의 일상이다. 그 일상은 유심히 살펴보면 매일이 고유하다. 마치 꼼짝없어 보였던 수평선도 자세히 보면 매번 다른 파도의 꿈틀거림으로 가득한 것처럼.
‘한순간’과 ‘순간들’
영화가 일상에 집중한다고 해서 히라야마가 과거 없는 인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일상의 장면들에서 히라야마의 과거사를 암시한다. 그 과거가 무척 극적이었다는 사실도. 일상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히라야마의 태도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그가 겪은 과거의 ‘한순간’과 깊은 연관이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비일상과 일상의 위계를 구분해 일상의 소중함만을 웅변하지 않는다. ‘한순간’과 ‘순간들’의 적절한 접합점을 찾는다.
관객이 히라야마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확실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히라야마는 과묵한 주인공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히라야마의 후배 청소부도 “엄청 성실한데 엄청 말이 없으셔”라고 그를 평가한다. 히라야마의 역사는 그를 둘러싼 장면들의 정황으로만 추측 가능하다.
그의 과거에 관한 단서들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조카딸 ‘니코(니카노 아리사)’를 돌려보내는 장면이다. 어느 날 니코는 가출해 삼촌인 히라야마를 찾아온다. 그의 일상에 동참하며 니코는 평온함을 찾지만, 히라야마는 결국 자신의 여동생, 즉 니코의 엄마에게 니코의 거취를 알린다. 그리하여 그날 밤, 여동생은 히라야마를 찾아와 니코를 데려간다.

여동생은 개인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온다. 히라야마가 사는 낡은 다세대 주택을 보며 “이런 곳에서 사는구나”라고 쓰게 웃는다. 여동생은 히라야마에게 아버지가 요양원에 있으며,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한 번 찾아뵈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권유한다. “이젠 아버지도 예전처럼 그러지 않으실 거야”라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히라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 뒤 여동생은 “정말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해?”라고 묻는다. 히라야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여동생을 한 번 끌어안고, 그들이 떠나자 조용히 오열한다.
이 짧은 장면을 통해 많은 정보가 암시된다. 히라야마가 원래는 청소 노동자가 아니었고 부유한 계급에 속했다는 것. 가정 내에 깊은 감정의 골이 있었으리라는 것. 모종의 계기로 히라야마는 현재 모습으로 변했고,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도 거의 끊겼다는 것.
히라야마가 겪었을 과거는 배우 야쿠쇼 코지가 평론가 이동진의 유튜브 채널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 출연해 꽤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 영화에서 애초에 그의 과거를 명시하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으므로. 중요한 것은 히랴아마가 겪은 일의 세부적인 내용이 아니라, 히라야마 역시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한순간의 균열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히라야마의 삶을, 그 이전과 이후를 완전히 분리하는 기준선이 됐을 것이다.
그런 히라야마의 변화는, 세간의 시선에 따르자면 영락(榮落)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히라야마는 과거에 목을 매지 않는다. 막연한 미래에 기대지도 않는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닥친 구체적인 현재를 향해 걷는다. 우리가 맞닥뜨린 삶이 한순간에 의해 촉발돼도, 결국 그 삶의 부피를 채우는 것은 그 이후의 순간들이므로. 히라야마는 순간을 포착한 필름 사진들을 옷장 안에 곳간처럼 차곡차곡 쌓아둔다. 순간을 응시하는 그의 습관은 추억을 생산하고 다음 피사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초대하며, 비로소 개인의 고유한 연대기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히라야마는 자신의 나이테를 개방하는 나무와도 같다. 그 나이테는 과거에 동떨어진 한 점을, 현재에 표류하는 한 점을 각각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이어지는 궤적을 내보인다. 과거 없는 순간은 불가능하며, 순간 없는 과거와 미래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 나이테는 그렇게 이어지며 시간과 기후를 말없이 증언한다.
휴양림과 식물적 상상력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이 영화는 이미 아름다운 삶에 대한 홍보인가? 히라야마는 이미 극복했고, 마침내 평화롭다. 우리는 완성된 힐링의 시학을 음미하면 되는 것일까? 이 영화는 히라야마라는 꼿꼿한 교목을 통해, 관객들이 숨 돌릴 만한 산소와 그늘막을 제공하는 휴양림으로서 기능하는가?
그러한 의혹이 제기될 여지도 충분하다. 히라야마는 우아한 형상으로 영화에 드러난다. 히라야마가 영위하는 삶의 세부가 세련되기 때문이다. 그의 일과 사생활은 철저하게 분리됐으며, 화장실 청소라곤 해도 그의 관할 구역으로 나타나는 시설들은 모두 깨끗한 신식이다. 그가 누리는 취향은 클래식으로 인정받는 록 명반들, 윌리엄 포크너처럼 이름난 문호의 작품들, 그리고 시간을 먹으며 세피아 색조의 아우라를 취득할 필름 사진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히라야마는 환상을 반영한다. 침해받지 않는 독립성, 흐트러짐 없는 일과, 예술적인 취향. 일상의 반복과 소모성에서 피로를 느끼는 관객은 일상을 심미적으로 소화하는 히라야마를 보면서 ‘힐링’의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지점에서 정반대의 가치 판단도 가능해진다. 히라야마라는 인물이 고작 환상의 충족을 위해 고안된 장치라면, 그 아름다움은 설득력을 잃고 작위성이나 거리감만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그린 이 풍경화를 바라보며 누군가는 안온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안일함을 느낀다.
히라야마는 이처럼 다양하게 읽힌다. 앞서 말했듯 히라야마가 동물보다는 식물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히라야마는 대부분 침묵하고, 이는 식물의 특성과 연관된다. 말이 없는 존재는 스스로를 표현하기 어려우며, 그 존재의 정체성은 다른 이들의 시선 속에서 구축되기 쉽다. 이해라는 이름 아래 제각기 오해되는 것이다.
영화의 바깥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이미 히라야마는 다양한 인물들에게 각기 달리 인식된다. 히라야마가 길을 잃은 아이를 도와줄 때, 그 아이의 어머니는 히라야마의 청소복을 보고 아이의 손을 물티슈로 닦는다. 그때 히라야마는 기피 업무를 담당하는 작업자 A로 받아들여진다. 반대로 조카딸 니코는 히라야마를 고유한 개인으로 바라본다. 그렇지만 니코 역시 삼촌을 온전히 바라보기보단, 자기 어머니에 대한 반발력으로 히라야마를 이상화하는 측면이 강하다.

히라야마의 지극한 현실은 타인에게는 비현실이다. 히라야마의 습관적인 취향일 뿐인 록 음악과 소설은 다른 이들에게 특별하게 인식된다. 젊은이들의 레트로 취향은 히라야마의 현실을 ‘힙한’ 것으로 간주한다. 술집 사장님은 문고본이라 값싼 수필집을 읽을 뿐인 히라야마를 단숨에 지적인 사람으로 판단한다.
이는 영화에 빈번하게 나오는 도쿄스카이트리를 떠올리게 한다. 우뚝 솟은 이 ‘하늘의 나무’는 히라야마를 드러내는 식물적 표상 중 하나다. 이방인에게 도쿄스카이트리는 눈에 띄는 명소이자 마천루다. 현지인에게는 익숙해서 의식되지 않는 배경일 뿐이다. 나아가 도쿄스카이트리는 애초에 관광성을 떠나서 실질적인 통신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용적 구조물이기도 하다. 도쿄스카이트리는 그것을 누가,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 그 모습과 가치가 달라진다.
히라야마 역시 마찬가지다. 히라야마는 관계와 장면마다 조각조각 인식되고, 그 조각들은 종합되지 않는다. 히라야마는 그만큼 다양한 특색을 지닌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달리 말하면 결국 총체적으로 이해받는 데 실패한다.
영화는 홀로 남는 히라야마의 고독을 숨기지 않는다. 본질적인 고독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를 무해한 ‘힐링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생긴다. 영화가 단순히 무해하기만 했다면 비판적 인식을 진전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실을 누락하지 않고 전달한다. 묵묵한 도쿄스카이트리가 사실 보이지 않는 전파를 시끄럽게 송신하고 있던 것처럼.
빛과 그림자로 그린 크로키

히라야마의 집은 그의 삶을 은유한다. 혼자만의 규칙과 동선으로 만들어진 고유한 방. 그 고유성은 히라야마라는 존재를 지탱하지만, 동시에 타인에게는 배타적으로 작용한다. 히라야마의 방은 2인용이 아니다. 비좁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니코가 찾아왔을 때, 히라야마는 침실을 니코에게 내주고 본인은 비좁은 창고에서 잠을 자야 했다. 결국 니코는 이 집에서 겨우 이틀을 머물고 곧 떠나야 했다. 집은 좁고, 둘은 불편하고, 불편함은 공존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히라야마의 방은 타인이 정착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일시적인 체류만 가능할 뿐.
하지만 정말 나의 방에 누군가를 영원히 초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방과 삶의 은유를 이어가자면, 나의 삶에 누군가를 영원히 들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누가 물리적으로 옆에 함께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곁에 있는 상대가 떠올리는 것을 그대로 떠올릴 수 없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없다. 어쩌면 옆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그 누군가가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모른다면, 홀로 있는 것보다 어쩌면 더 외로울지 모르는 일이다.
모두의 인생에는 타인이 대리하거나 동참할 수 없어, 각자만이 감당해야 하는 소외된 몫이 존재한다. 히라야마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니코를 보내기 전, 히라야마는 “알고 보면 이 세계에는 다른 많은 세계들이 있거든”이라고 니코에게 운을 떼며 “서로 연결된 세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이를 증명하듯, 히라야마의 일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연결된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연결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연약하다. 그들은 얼마든지 다음 시퀀스에서 다른 인물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야(야마다 아오이)’의 경우, 히라야마의 카세트를 훔쳤다가 돌려주며 갑작스레 스킨십을 하지만, 그런 접촉에도 불구하고 아야는 히라야마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후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고 사라진다.
타인이 느끼는 고통으로부터도 우리는 동떨어져 있다. 영화 후반부, 히라야마는 암이 전이된 남자의 넋두리를 듣는다. 그러다 남자가 “그림자끼리 겹쳐지면 더 어두워질까”라고 묻자, 히라야마는 실험을 해보자고 한다. 둘은 그림자를 겹치지만, 어두워지거나 밝아지거나 하는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각자에겐 너무나 실제적인 고통이라도, 세상에 나와 그림자라는 흔적을 드리우면 유령처럼 서로를 통과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라야마가 보여주는 고귀함은 모두 비참함을 동반한다. 이 비참함은 벗어날 수 없는데, 외로움이 영원히 해결되거나 봉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며, ‘완벽한 날’이라는 제목 아래 완벽한 날은 사실 불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전달한다. 이 외로움은 해소할 수 없고, 단지 올라서야 할 발판이라고 말한다. 히라야마가 그러하듯이.
히라야마가 자신의 현실을 애써 가꾸는 것은 개연성의 결과가 아니다.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은 자연스레 비관의 하류로 흐르겠지만, 히라야마는 의지를 통해 상류와 하류를 뒤집는다. 그림자가 겹쳐지지 않아 울던 히라야마는, 이내 금세 웃음을 터뜨린다. 남자와 그림자밟기 놀이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절망은 언제든지 유희로 바뀔 수 있다. 물론 그 유희 역시 다시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 영화는 언제든 다가올 순환을 암시하고, 히라야마는 이 순환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산다. 울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운다.
영화에서 히라야마는 자주 ‘코모레비(こもれび)’를 바라본다. 이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그러나 히라야마가 바라보는 코모레비는 햇빛뿐 아니라, 햇빛이 나뭇잎과 마주쳐 드리운 그림자까지 포함한다. 그렇게 영화는 빛과 그림자 한 축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아우러져 매번 달라지는 음영을 크로키로 담아낸다.
“나는 무(無)보다는 차라리 슬픔을 택하겠다(between grief and nothing I will take grief).” 히라야마가 읽는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The wild palms)』의 구절이다. 삶이 아무리 본질적인 비참함의 철골을 내보일 때조차도, 히라야마는 아무것도 아니기보다는 차라리 다가오는 슬픔의 순간들에 충성한다. 그렇게 히라야마는 완벽한 날은 아닐지라도, 온전한 날을 살아간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슬픈 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