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 드라마를 만드는 것

 성장과 위기 사이 전환점의 한국 드라마, 더 좋은 이야기 만들려면
▲국내 연간 드라마 제작 편수 Ⓒ송나윤

  ‘한드(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가? 좋아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한드를 보는가. 무슨 장면에 울고 웃나. 어떤 주인공에게 마음을 뺏기는가. 대중예술 중에서도 드라마는 유난히 우리네 삶과 가까운 장르였다. TV를 틀거나 휴대폰을 켜면 언제든 빠져들 수 있었던 이야기들. 이런 드라마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까?

  꾸준히 성장해 온 한국 드라마는 화려하고 풍부한 볼거리와 매력적인 이야기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따라올 자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급변한 제작 및 시청 환경, 심심찮게 제기되는 업계의 불황 소식, 점점 획일화되는 소재나 스토리로 위기의 국면에 놓여있기도 하다. 2024년 현재 한국 드라마의 제작부터 편성, 방영 그리고 시청까지의 전 과정에 주목하며, 오늘날 한국 드라마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 

덜컹거리는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

  지난 4월 5일 공개된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가 공개 직후 전 세계 넷플릭스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일본 유명 배우 스다 마사키까지 출연진으로 참여한 글로벌한 대작이다. 《오징어 게임》(2021)을 정점으로 한국 드라마는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굳건한 저력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가 더없는 성공과 흥행을 누리는 듯 보이는 한편, 드라마 업계의 침체와 불황과 관련된 소식도 동시에 들려오고 있다. 공교롭게도 《기생수: 더 그레이》가 공개된 같은 날 4월 5일, 배우 정경호는 유튜브 채널 〈채널 십오야〉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최근 촬영을 준비 중이던 작품의 제작이 무산됐다며 현재 업계에선 예닐곱 개가량의 작품이 엎어지는 중이라고 밝혔다. 예능PD 겸 드라마PD인 신원호 PD 역시 “좋은 연출, 좋은 작가, 좋은 배우가 붙었는데도 작품이 엎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덧붙였다. 한국 드라마의 제작 환경이 어딘가 덜컹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드라마의 편성 자체가 크게 줄었다. 드라마를 방영하거나 공개할 자리가 줄었으니 제작되는 드라마도 자연히 줄어들었다. 캐스팅까지 마치고 제작에 착수한다고 하더라도 편성이 되지 않아 제작을 중단한 사례가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 제작 편수는 2022년 이후 꾸준히 줄어들어 올해엔 겨우 100여 편에 그친다. 2021년 《오징어 게임》의 전례 없는 흥행과 코로나 시기 늘어난 콘텐츠 수요에 응답해 2022년 141편까지 늘어났던 데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다. 〈MBC〉 콘텐츠전략국의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드라마의 편성 슬롯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금토드라마처럼 언제나 드라마로 채워지던 각 방송사의 편성 시간대에서 이제는 드라마가 아예 사라지거나, 한 작품이 종영한 뒤 다음 드라마가 시작되기까지 긴 간격을 두고 운용되고 있다. 수목드라마의 경우 지난해부터 〈KBS〉, 〈ENA〉, 〈JTBC〉마저 차례로 편성을 중단하며 주요 방송사 편성에서 수목드라마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다. 최근엔 다시 〈JTBC〉와 〈SBS〉가 5월 이후 한두 편의 수목드라마를 편성한 상태다. 

  OTT도 예외는 아니다. 방송사와 비교해 그 범주나 대상은 다르더라도 엄연한 편성 행위를 하는 방송사업자인 OTT들은 한 해에 공개되는 작품 수를 줄였다.〈티빙〉은 2022년 13편의 오리지널 드라마를 제작해 내보낸 데 비해 2023년 그 수를 6편으로 줄였고, 〈디즈니플러스〉의 경우 한국 드라마 제작 및 편성의 전면 중단을 논했을 정도다. 현재는 작년 하반기 드라마 《무빙》의 성공 이후 한국 드라마 제작을 지속하고 확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연간 드라마 제작 편수 Ⓒ송나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작을 완료했지만 편성을 받지 못한 미편성작도 허다하다. 2024년 4월 기준, 방영할 방송사나 OTT 플랫폼을 아직 확정하지 못한 미편성작은 무려 30여 편에 달하는데, 아직 촬영 중인 작품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다. 드라마 성공의 보증 수표로 불리는 배우 공효진과 이민호를 주연으로 캐스팅해 출발 단계부터 관심을 모았던 《별들에게 물어봐》는 촬영을 마쳤음에도 미편성을 면치 못했고, 최근 일본 드라마 《EYE LOVE YOU》(2024)에서 활약한 배우 채종협의 차기작으로 해외 시청자들의 기대를 모았던 《우연일까》도 촬영이 끝난 2023년 2월 이후로 방영 소식이 없다. 제작 편수 자체가 줄어들긴 했어도 계속해서 제작이 시작되는 새 드라마들이 편성 슬롯을 빠르게 채우고 있고, 동시대적 감각이나 유행에 민감한 드라마 장르의 특성상 시간이 흐를수록 미편성 드라마의 편성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현 미편성 작품들 전체의 자본 규모는 대략 3,000억 원에 달해 그 손해가 더욱 막막한 실정이다. 

  드라마의 제작과 편성이 주춤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핵심은 제작비다. 최근 몇 해 동안 제작된 유명 한국 드라마의 한 작품당 제작비 규모는 400억에서 500억 원을 상회한다. 작년 하반기 화제작《무빙》의 경우 750억 원이 들었고, 《경성 크리처》는 700억 원이 들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임에도 《눈물의 여왕》은 400억 원가량이 들었다. 가수 겸 배우 아이유 주연의 제주 배경 시대극 《폭싹 속았수다》는 무려 600억 원짜리다.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글로벌 사업자의 등장으로 대규모 자본이 집약적으로 투자된 작품들이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여 전 세계 대상의 흥행에 성공하자, 드라마 제작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제작비의 규모 자체가 거대해진 것이다.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2018년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제작비가 430억 원가량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그에 비해 지난 10년간 지상파 방송 시장규모는 2천억 정도 성장하는 데 그쳤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국내 방송시장의 확장성이 매우 제한적임을 고려했을 때, 한 작품에 400억 원을 우습게 넘기는 최근의 드라마 제작비는 매우 높은 상황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 제작비 규모 Ⓒ송나윤

  제작 시장의 구조도 복잡하게 분화했다. 배우, 작가, 감독, 촬영, 음향 등 드라마에 들어가는 각 제작 요소가 모두 방송사나 제작사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각 요소마다의 시장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명세 및 실력과 역량이 보장된 인력, 즉 에이리스트(A-list)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그 비용 역시 크게 증대했다.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에이리스트에 대한 수요 증가와 생산요소 단위마다의 가격 상승으로 대다수의 인력에게는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냉혹한 시장”이라고 현재의 드라마 산업을 진단했다. 자연히 다수의 드라마를 만들기보단 제작과 편성을 줄이더라도 크게 투자한 한두 편의 성공률을 높이는 쪽의 선택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워낙에 큰돈이 들어가니 제작과 편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을 만큼의 성공 가능성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는 원래도 예능 같은 다른 방송 콘텐츠에 비해 무척 큰돈이 드는 콘텐츠로, 제작비 회수가 쉽지 않아 사업자 입장에선 위험도가 높다.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위험도를 낮추려면 잘하는 감독, 유명한 배우, 이름난 작가를 데려올 수밖에 없는” 와중, “그들에게 지급되는 높은 개런티 등으로 치솟은 제작비 충당을 위해 글로벌 사업자의 투자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적 구조에 놓여있다고 설명한다. 김 전문연구위원은 “한국 드라마 산업이 글로벌 시장과의 연결성은 중시하되, 독자성과 자율성을 보다 확대하는 산업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드라마, 구성과 형식 모두 달라졌다 

  최근 몇 년 새 오리지널 드라마 시나리오보다 인기 웹툰을 각색해 만든 드라마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것 역시 위험도는 낮추고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지 중 하나다. 기존의 검증된 콘텐츠를 활용하는 것이 수용자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웹툰의 장르적인 특성이 드라마 제작에 매우 적합하다는 이유도 있다.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웹툰은 이미 시각화된 장르이기 때문에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에겐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영상문화입문’을 가르치는 아시아연구소 한류문화센터 박소정 선임연구원은 “이전까지는 실사 영상 매체에서 구현하기 힘들었던 웹툰 속 판타지적 세계를 현재의 자본이나 기술이 구현 가능”해지면서 “한국 웹툰 시장에서 웹툰과 드라마의 연계가 더욱 용이해진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작년 한 해 공개된 《무빙》, 《마스크걸》,《비질란테》, 《택배기사》 등 대부분의 OTT 드라마 흥행작들이 웹툰을 원작으로 했다. 네이버웹툰이 발표한 「네이버웹툰 기반 IP 확장의 창작자 지원 효과」(2023)에 따르면, 그간 네이버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들은 전부 넷플릭스 글로벌 순위 Top 10에 진입했고, 지난 4년 동안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중 26%가 네이버웹툰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웹툰 원작의 흥행에 대해 “드라마 작가들의 자리가 크게 줄어들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신인 작가가 역량을 키울 기회가 점점 적어지고 오리지널 드라마 극본만의 매력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의 이해와 감상’을 강의하는 인문학연구원 박상은 선임연구원은 다른 매체의 원작이 존재하는 드라마를 제작하고 감상할 때 중요한 것은 결국 “드라마로의 전환에서 얼마나 창조적으로 드라마만의 매체적 미학을 반영하느냐”라며,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판단하는 역량은 여전히 고유하게 제작 공동체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한국 드라마를 즐겨 봤다는 강지우(언론 23) 씨 역시 “원작의 작품 의도를 훼손한다거나 영상으로의 구현이 어색하고 미흡한 것을 시청자가 가장 잘 느끼고, 등을 돌린다”고 말했다.

▲웹툰 및 웹소설 원작 드라마 Ⓒ〈OCN〉, 〈디즈니플러스〉, 〈tvN〉, 〈MBC〉

  드라마를 둘러싼 환경 안팎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완전히 다른 드라마 양식과 문법의 등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우선 기존의 편성 슬롯이 무의미해지다 보니, 〈넷플릭스〉 같은 대형 OTT 플랫폼의 든든한 제작비 지원이 받쳐준다면 구현하려는 이야기에 맞춰 얼마든지 작품의 러닝타임이나 편수 구성을 조정할 수 있기에 6편 내외로 끝나는 구성, 여러 시즌에 이야기를 분배하는 시즌제 형식, 하나의 이야기가 전체 드라마를 관통하는 연속극이 아닌 회마다 각각의 사건이 존재하는 에피소드 극들이 크게 늘어났다. 일견 제작상의 자유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기에, ‘퀄리티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높아진 욕구를 충족하는 데에도 탁월해진 면이 있다. 

  한편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이용자들의 미디어 이용 패턴 자체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 역시도 드라마의 양식과 문법상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최근 이용자들은 “오래 보는 힘이 약화되고, 콘텐츠를 빠르게 소모하고 버리는” 성향이 짙어, 긴 호흡의 이야기가 연속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드라마와의 괴리가 커졌다는 설명이다. 김 전문연구위원에 따르면 “드라마라는 장르는 이용자가 투입하는 시간이나 집중력 등에 있어서 여타 다른 장르와는 다른 강도와 밀도를 가진 장르”로서 사람들의 새로운 콘텐츠 소비 습관을 맞닥뜨리며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강지우 씨 역시 “사람들이 점점 짧은 시간으로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콘텐츠에 익숙해져 간다는 인상을 받는다”며 “작품의 흥미 요소가 최대한 짧고 단순해지는 것 같다”고 짚었다. 숏폼 콘텐츠에 어울리는 짧고 강렬한 장면이 자주 나열되는 방식이 대표적인 예시다. 한국 드라마가 변화하는 시청 패턴에 맞춰 다양히 분화하면서, 더 이상 형식적인 통일성을 띠지는 않게 된 것이다. 

재벌 주인공이 회귀도 하고, 복수도 하고, 게임도 하고…

  이미 흥행한 적이 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판단된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새롭게 제작된다. 이 역시 드라마 한 편의 흥행 가능성을 높이고 위험도는 낮추는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 드라마들이 얼핏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김수현드라마아트홀이 2023 올해의 좋은 드라마로 선정한 100여 편의 드라마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한 장르는 범죄·수사·스릴러와 판타지로, 각각 24편과 21편이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가 줄곧 강세를 보였던 멜로는 13편에 그쳤다. 사람들이 특정한 소재나 전개를 원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로부터 읽히는 동시대의 정서 구조는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우선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유난히 회귀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 《재벌집 막내아들》(2022), 《이재, 곧 죽습니다》(2023),《내 남편과 결혼해줘》(2024)와 같은 드라마는 인물들이 다시 한번 생을 사는 내용을 그린다. 박상은 선임연구원은 “본래 회귀는 무척 재밌는 극작술”이라며 “배우의 연기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공간 배경 속 인물의 존재성을 감각하는 오락적인 재미가 훌륭한 서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귀가 유난히 유행했던 것은 우리가 마주한 공동체의 모순과 보다 가깝다. 박소정 선임연구원은 최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서의 삶의 문제에 불안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역사와 사회를 완전히 장악하는 주인공에 쾌락을 느끼는 것”이라고 회귀 물의 인기를 분석했다. 기존 규범과 체계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회귀를 통해 철저하게 승리하는 인물, 실수하지 않는 인물, 전지전능하게 상황을 통제하는 인물에 대한 선호로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재벌집 막내아들》(2022) 포스터 Ⓒ〈JTBC〉

  악역을 화려하게 응징하는 이야기나 당한 것을 되갚는 사적 복수에 관한 이야기들도 우후죽순 늘었다. 예컨대 드라마 《모범택시》(2021)는 사법적 구제 절차로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없었던 인물들이 주인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악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2023년 작《비질란테》 역시 느슨한 수사나 재판으로 법망을 피한 범죄자들을 몰래 직접 심판하는 경찰대생이 주인공이다. 박소정 선임연구원은 “내가 믿는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 기존의 규범을 신뢰하지 않을 때 의무를 수행할 도덕적 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보다는 무언가 갚아주는” 이야기가 선호된다고 분석했다. 

▲《모범택시》(2021) Ⓒ〈SBS〉

  꾸준히 사랑받은 소재인 재벌은 어떨까.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는 로맨스, 범죄·스릴러, 서바이벌 등 장르를 막론하고 재벌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박상은 선임연구원은 “자본화된 사회에서 가장 상층에 있는 사람의 계급성이 어떤 방식으로 대중의 욕망과 맞부딪히는가”의 문제가 변주를 거듭하며 재벌 소재 드라마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박소정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로맨스의 경우 소비주의적 낭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식 중 하나”로서 재벌 주인공이 기능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재벌가의 사가를 파헤치거나 재벌이 가진 자원을 활용해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이야기까지 재벌 소재는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생존을 둔 서바이벌을 벌이는 데스게임 류나 좀비 물, 디스토피아 물에서 이따금 그려지는 특정 인물의 우월한 능력이나 자원, 그에 따른 경쟁과 탈락 구도는 과도하게 신자유주의적인 질서를 보여주기도 하고, 재벌 주인공의 화려한 씀씀이나 소비주의적인 욕망을 드라마가 그저 반영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추동하는 것처럼 관찰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 같은 이야기들이 시대의 선호를 반영하는 한편 획일적인 흥행 공식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강한 쾌락과 메시지의 효과를 위해 과한 폭력성이나 자극성이 수반되는 경우 역시 많다. 한국 드라마의 열렬한 팬이라고 밝힌 차재영(언론 22) 씨는 “특히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에서 너무 잔인하거나 과도하게 성적인 묘사가 포함된 장면이 많아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사회의 보편적인 정서나 욕망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보다는 더 자극적이고 노골적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이끄는 면모가 관찰되는 것이다. 차 씨는 최근의 한국 드라마가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서사라 자연스레 눈이 간다”고 평하면서도, “한국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인물 한명 한명이 보여주는 일상성과 생애에 대한 고찰”이라며 한국 드라마에 장르적인 다양성을 촉구했다.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사회의 욕구, 사회의 분위기를 면밀히 관찰해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창작자의 몫”이라면서도,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건드려 대중적인 정서를 새롭게 환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짚었다.  

더 나은 방식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려면

  거대 자본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들이 흥행 공식처럼 획일적으로 수렴되는 경향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다시 한번 드라마라는 장르의 본질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픽션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장르로, 수용자와의 접촉면이 가장 넓다. 언제나 사회와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만들고 감상하는 대중 매체라는 것이다. 

  박소정 선임연구원은 “드라마는 항상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현실에 개입하기 위한 픽션 물로서 기능”해 왔지만, 이는 “현실사회에 존재하는 정서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으론 달성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박 선임연구원은 드라마가 각 개인에게 “더 나은 것에 대한 상상력을 불어넣는 힘,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힘”이 돼줄 때 비로소 이 같은 기능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박상은 선임연구원 역시 “미학적인 발전이나 오락적 재미, 쾌감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이 향해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드라마야말로 전망이 좋은 드라마”라고 전했다. 박상은 선임연구원은 “시청자들은 인물에 대한 충만한 이해가 가능하고, 그 이해가 내 삶의 지점과 계속 맞닿을 수 있는 드라마를 늘 기다리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박소정 선임연구원은 그를 위해 무엇보다 드라마가 내적인 다양성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획일화를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즐거움의 요소, 가치나 인물, 정서의 다양성”이라는 설명이다. 박 선임연구원은 또한 “작은 이야기, 색다른 플랫폼, 신인 제작진으로부터 일어나는 변화들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상파 방송사나 대형 OTT 플랫폼의 흥행작들이 실패하는 부분을 소규모의 웹드라마에서 성취해내는 경우가 있다”며 “변방에서 조금씩 이뤄지는 변화의 순간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고민하고, 과열돼 삐걱거리는 제작 환경 전반을 살피는 작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는 결국 드라마를 만드는 산업의 생태계를 다시 꾸리는 일이다. 김유정 전문연구위원은 “한국은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방송영상 산업에 뛰어난 인력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곳”이라며 “좋은 인력을 가지고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재생산이 계속해서 이뤄지는 제작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고민할 때”라고 전했다. 다양한 도전과 혁신을 지원하고, 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며, 적재적소에 자원을 배분하는 제작 시스템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전문연구위원은 “그럼에도 드라마 산업의 본질을 생각했을 때 좋은 작품 제작 시스템에 있어 일정한 규모를 갖추는 것은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단순히 다양한 사업자의 다양한 시도를 허용하자는 낙관 이상의 “전향적인 산업 전반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상은 선임연구원은 「2023년도 한국 드라마의 경향성-동시대 드라마, ‘공공·공영성’의 전망을 모색하기」(2023)에서 오늘날 드라마에 ‘지금-여기의 사회적 불안을, 현실의 결핍과 모순을 넘어서고 싶은 대중들의 역동을 읽어내려 하는 애정 깃든 작가적 성찰’과 동시에 ‘소비를 넘어 자신의 삶과 동시대의 더 나은 사회적 삶을 연동지을 수 있는 시청자의 성찰’이 요청된다고 짚는다. ‘지금의 사회적 현실과 대중들의 미시적 삶 속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중장기적 기획’이 필요하다고도 언급했다. 한국 드라마로 모여드는 각기 다른 주체들이 더 나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더 좋은 이야기를 마음껏 상상할 때다. 

  한국 드라마는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가닿으며 수많은 사람을 울고 웃게 했다. 드라마를 만들고 또 보는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대도, 좋은 이야기는 여전히 필요하다. 대중은 언제나 원한다. 이해받고 싶은 나의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 몰랐던 타인의 삶이 있는 드라마,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위로하는 드라마를. 결국은 이 공동체를, 그 안의 사람들을 사랑했던 드라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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