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성의 아름다움
이곳의 현실이 저곳의 이야기에 담길 때
두려움을 넘어서서

이곳의 현실이 저곳의 이야기에 담길 때

문학계에 번진 무단인용 논란

  거짓말은 경험에 기반한다. 허구의 산물인 소설 역시 작가의 경험과 온전히 분리될 수 없다. 작가도 독자도 이 사실에 암묵적으로 합의한 채 거짓의 세계를 향유한다. 더 나아가, 어떤 작가들은 허구와 경험의 분리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작가의 삶을 넘어 작가 주변인의 삶까지 분명하게 소설에 박제된다면, 그 작품은 소설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가? 최근 문단계에서 반복적으로 불거진 무단인용 논란을 알아보고 그 배경을 살폈다.

거짓 세계에 진짜 이야기가 담겼다

사진 설명 시작. 2024년 1월 6일 동아일보 기사에 달린 댓글의 캡처본이다. 아이디

신춘문예 기사 댓글 속 폭로글

  2024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작인 이상민 작가의 「호모 헌드레드」가 무단인용 논란에 휩싸였다. 이 작가의 주변인이 그가 현실의 인물들을 멋대로 차용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폭로자 A씨는 자신을 이 작가의 전 직장동료라고 밝히며, 작품 속 인물들의 이름과 성, 연차까지 업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실제 인물을 유추할 수 있게 쓰였다고 주장했다. A씨는 동아일보 측에 수상 취소를 요청하며 이 작가를 고소했다고 밝혔으나, 이 작가는 고소 연락을 받은 바가 없고 실제 인물을 재현한 바도 없다며 폭로 내용을 전면 부정해 논란은 아직 지속 중이다.

  작가의 주변인이 작품에 무단인용돼 사생활을 침해받았다고 피해를 호소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0년에는 김봉곤 작가, 2021년에는 김세희 작가가 차례로 위와 같은 논란을 겪었다. 2020년 7월, 폭로자 B씨는 김봉곤 작가의 소설집 『시절과 기분』에 수록된 「그런 생활」 속 인물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B씨는 작품 속에 자신과 김봉곤 작가가 나눈 메시지의 내용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수록된 탓에 성적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노출됐다고 밝혔다. 이후 C씨도 김봉곤 작가의 『여름, 스피드』 속 인물이 본인이라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아웃팅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몇 차례의 입장문이 오고 간 끝에 『시절과 기분』, 『여름, 스피드』와 더불어 「그런 생활」이 실렸던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판매를 중지했고, 김봉곤 작가는 젊은작가상을 반납했다. 2021년 10월, 법원은 B씨의 김봉곤 작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무단인용이 아니며 불법행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했으나 문제가 된 작품들은 여전히 판매되지 않고 있다.

  2021년 4월 23일, 김세희 작가도 동일한 논란으로 문제시됐다. 폭로자 D씨가 김 작가의 단편 「대답을 듣고 싶어」와 장편 『항구의 사랑』에서 자신이 무단으로 인용됐다고 폭로하며 아웃팅 피해를 호소한 것이다. 이어 E씨도 위의 두 작품과 소설집 『가만한 나날』에 수록된 단편 「드림팀」에 자신의 이야기가 무단으로 인용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냈다. 결국 작가 요청으로 『항구의 사랑』은 판매 중지됐다.

‘나’를 담은 소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문단계에서 유사한 무단인용 논란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은 이례적이다. 논란의 양태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세 사건 모두 ‘오토픽션(auto fiction)’과 연관돼 있다는 점 역시도 주목할 만하다. 오토픽션이란 작가 자신의 삶과 경험을 소설 안에 녹인 작품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학비평가인 세르주 두브로브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오토픽션은 자서전과는 다른 글쓰기의 가치를 지닌다. 불문학자 변광배는 자서전이 삶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자서전에 허구를 접목한 오토픽션이 새롭게 실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고 평했다. 온전한 사실을 말하는 글도, 온전한 허구를 말하는 글도 아닌 애매함이 오토픽션의 본질이자 중요한 가치인 셈이다.

  2010년대 후반 한국 문단계에 생긴 주요한 변화 중 하나는 오토픽션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경숙 표절 사태로 문학 권력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던 2015년,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이 전개된 2016년을 거치며 작가들은 한국 문학의 목소리가 전제하는 발언 가능한 주체를 문제시하는 여러 시도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 퀴어 등 소수자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각광을 받았고, 소수자가 단지 소재가 아닌 재현의 주체로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오토픽션이 다수 등장했다.

사진 설명 시작. 좌측에는 김봉곤 작가의 소설집 『시절과 기분』의 표지가, 우측에는 김세희 작가의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의 표지가 있다. 사진 설명 끝.

『시절과 기분』, 『항구의 사랑』 표지  ©창비·민음사

  특히 김봉곤 작가를 필두로 퀴어 소설에서 오토픽션의 가능성이 주로 논의됐다. 김 작가는 한국 문단계 최초로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자인했으며 등단 당시부터 꾸준히 자신의 소설이 오토픽션임을 표명했다. 김 작가는 논란이 된 사건과는 별개로 허락을 받지 않고 주변인의 이야기와 이름을 소설에 쓴 적이 있음을 글에서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글쓰기에 대해 노태훈 평론가는 ‘‘작가-인물’인 ‘나’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픽션의 영역을 확장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토픽션을 동원한 소수자 문학이 정체됐던 문학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가능성이 된 셈이다.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도 오토픽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김 작가의 인터뷰 내용 속에 ‘목포가 고향인 김세희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해당 작품은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통해 여자 중고등학생들의 동성애적 관계를 진솔하게 그렸다. 김건형 평론가는 『항구의 사랑』에 대해 ‘그간 누락돼 온 여성 청소년의 문화적 향유를 다시 쓰는 수행과 그런 자신의 수행을 다시 읽음으로써 고정된 이성애 젠더성을 넘어, 여성의 생애와 언어를 회복하는 퀴어적 스펙트럼이 열린다’고 평했다.

  이상민 작가의 「호모 헌드레드」는 작가가 오토픽션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 두 작가의 작품과는 성격이 다르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안경 전문 신문사에서 이 작가가 2023년 12월까지 근무했다는 점, 작품 속 등장하는 ‘안경 렌즈로 도자기를 만드는’ 개인전에 대한 기사를 이 작가가 실제로 작성한 적이 있다는 점이 소설과 작가의 공통점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작가가 표명하지 않는 이상, 소설의 내용이 현실의 어디까지를 빌려왔는지는 알 수 없다. 때문에 이 작가의 사례는 오토픽션이라 밝히지 않았던 소설이 오토픽션이라고 폭로된 상황이란 점에서 이전 사례들과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 작품 모두 공통되게 작가의 현실이 소설에 자명하게 묻어 있다는 점이고, 이러한 작품의 탄생 배경에서 문단의 흐름을 간과할 수 없다.

‘너’가 끌려온 소설

  소설에 작가와 겹친 ‘나’가 들어가면서, 애매함의 미학이 새롭게 향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인 내가 작품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나와 관계된 ‘너’를 작품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작가에게 창작의 자유를 지켜줄 때 소설은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다. 완전히 현실과 별개인 소설은 적을 수도, 적을 필요도 없다.

  문제는 확실하게 현실의 ‘너’를 겹쳐볼 수 있음에도 작가가 지인에게 이를 미리 허락받지 않을 때 발생한다. 더욱이 오토픽션은 내밀한 삶을 솔직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에 응답해야 하는 글쓰기 전략이다. 즉, 작가가 아닌 주변인의 삶 역시도 작품에 실릴 경우 당사자는 사생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 설명 시작. 책을 보고 놀라는 독자의 뒷모습이 그려져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소설에 무단으로 인용되었을 때, 이를 발견한 독자가 충격받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그림 설명 끝.

책에서 자신의 삶을 맞닥뜨린 독자  ©송나윤

  세 작가의 피해 당사자 모두 목소리를 내게 된 배경에 치명적인 사생활 문제가 엮여있다. 김봉곤 작가와 김세희 작가 논란은 성적 대화 노출뿐만 아니라 아웃팅 문제가 연관돼 있었다. 폭로자 D씨는 이로 인해 ‘소설을 읽은 주변인들에게 성 정체성과 관련한 사적인 질문을 받아야 했다’며 피해를 호소했다. 이상민 작가의 피해 사례는 아웃팅 문제가 결부되진 않았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문제적이고 부정적인 인간상을 나타내고 있어 폭로자 A씨는 ‘소설에 등장한 사람들 모두 소설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과에 다니고 있으며,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만큼 치명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피해를 호소했다.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 중 우선돼야 할 것은 당연히 후자다. 동종업계의 창작자들도 피해자의 권리 보호에 힘을 보태고 있다. 김봉곤 작가 논란이 일었을 당시 김초엽 작가는 피해자의 공론화에 지지를 표하며 『시절과 기분』의 출판사이자 피해자에게 미온적 태도를 보여 비난을 샀던 창비를 비판했다. 김초엽 작가는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소설을 싣지 않겠다고 밝히며 ‘소설의 가치가 한 사람의 삶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역설적으로, 김봉곤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 그 배타적임으로 생기는 내밀함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오토픽션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나’만이 알 수 있는 섬세한 지점을 포착하기 위한 도구였던 오토픽션이, ‘너’를 배려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작가에서부터 독자로까지, 찬찬한 발걸음으로

  소설에 주변인을 무단인용했다는 논란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작 태도다. A 강사(국어국문학과)는 “언급된 작가들의 경우 모르는 사람들은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작가는 분명히 인지할 수 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과 관련된 사적 텍스트가 문제시된 것”이라고 평했다. A 강사는 또한 “누군가와의 대화, 혹은 누군가의 삶이 자신의 작품으로 들어올 때 최소한의 가공을 거치거나, 인용 및 작품화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품에 묻은 삶의 흔적 속에 누가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비판적이고 엄중한 시선에서 소설을 검토하는 작업은 작가만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 주변인이 무단인용되는 문제의 책임을 작가에게만 묻고 넘어가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고의성 여부를 판가름하는데 열을 올리기보다도 재현의 윤리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작가, 출판사, 비평계, 독자 등 문학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과정에 참여하는 여러 주체들 모두 현 문제에 침묵하거나 성급히 덮어버리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사안을 논의해야 한다.

  무단인용 논란이 발생했을 때 매번 작품만큼이나 문제시됐던 부분은 작가와 출판사의 소극적 대처였다. 별다른 해명 없이 작품으로 복귀한 김봉곤 작가와 김세희 작가는 물론, 피해 당사자가 사건을 공론화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출판사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건이 공론화되고도 출판사들은 많은 이들의 질타가 이어지고 난 후에야 형식적인 사과와 판매 중단 등의 대처를 보였다. 이마저도 결정적인 책임은 작가 개인으로만 한정하고 선을 그으려는 모습이 여실한, 불완전한 사과였다. 책이 나오기까지 작가와 가장 많이 소통하고 고민을 거듭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출판사도 보다 책임감 있는 태도로 사안에 접근해야 한다.

  비평계의 개입과 반성도 필요하다. 강동호 평론가 또한 김봉곤 작가 논란 당시 ‘비평이 작가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으로서 그 역할과 기능을 하지 못한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며 비평장의 반성을 촉구했다. 비평가들이 새롭게 발견한 문학의 가능성을 칭찬하기 바빠 예측할 수 있었던 재현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를 미리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 평론가는 비평적 개입이 부재한 상태로 사과와 후속 조치를 통한 관성적 반성을 반복한다면 사실상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채 문학계는 제자리걸음을 걷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A 강사 역시 “새로운 세대의 글쓰기임을 증명해야만 문학계에서 인정받는 기존 시스템이 그대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하며 문학장의 중심과 주변이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 넓게 바라볼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곳저곳 반성의 목소리가 오갔던 김봉곤 사태로부터 몇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질문을 당면하고 있다.

  수많은 목소리가 아직 활자 속에도, 지면 위에도 올라가지 못한 채 부유한다. 작가들은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목소리 내는 방법을 익혀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자신에게 묻어있던 주변 사람의 목소리까지 두루 기억하고 나아가 동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목소리가 독자에게 다다르기까지, 그리고 읽히고 해석되기까지는 작가를 포함한 수많은 행위 주체의 손을 거쳐야 한다. 더 많은 ‘나’가 글 속에 등장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너’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이 복잡하게 얽힌 문학장 속 각각의 주체들이 재현의 윤리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고민할 때다. 정답 없는 물음이 지치지 않고 오갈 때, 비로소 어제의 우리가 겪었던 불미스러운 아픔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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