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호(의류 22)
자본-권력에 의해 취약성을 안은 존재들이 서로를 마주하며 일으킬 풀뿌리변혁정치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떼어낼 수 없는 취약성과 함께 지금-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고 있습니다.
뒤얽힌 세상 속 모든 존재의 해방을 바라며, 투쟁입니다~!
s_shin@snu.ac.kr
‘완전 비건’이라는 신화
‘완전 비건’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목적과 맥락에서 가능한 한 비거니즘을 실천하려는 것을 비건 지향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완전 비건’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나는 나를 비건 지향인이라고 부른다. 완벽한 비거니즘을 만든다는 것은 착취의 역사를 덮어 놓고 이것과 단절되겠다는 것이 아닐까? 육식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 땅에서 착취의 흔적을 표백할 수 있을까? 구조적인 착취와 완전히 거리를 두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생산과 소비는 생태에 완전히 무해한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완전 비건’이라는 말이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의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언어가 신자유주의와의 만남 속에서 탈정치의 길로 빠질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개인화하면서 개인이 자유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포장한다. 신자유주의와 비거니즘의 얽힘 속에서 착취에 저항한다는 본래 목적은 가려진 채 비건 실천은 개인화된다. 이때 억압-착취-배제를 가능하게 하는 체제의 모습은 가려지고, 개인의 실천과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부가하는, 이중 가림 효과가 만들어진다. 완벽함, 무해함과 같은 낭만적 언어에 휩싸이면 가림막들과 그 내면을 포착하기 더 어려워질 뿐이다.
또 다른 우려는 무해한 존재가 됐다는 착각과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소비의 과정에서도 착취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더 윤리적인 소비자가 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윤리적인 소비자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착취하는 구조적 가해자이면서도, 탈착취가 불가능하게 된 맥락들의 구조적 피해자다.
환경윤리학자 딘 커틴이 30여 년 전 지적한 바와 같이 비건 실천 가능성은 지역성, 계급과 같은 여러 맥락의 얽힘 속에서 결정된다. 이 차이들을 논의에서 탈각시킨 채 비윤리적 소비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섭식의 전환이 아닌 다른 실천을 통해서도 윤리적 삶을 추구할 수 있고, 커틴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인간의 시체를 새의 먹이로 돌려주는 티베트의 문화를 소개한다.
이 세상 모두가 비건(에 근접하는 존재)이 될 수 없고, 누군가가 누구보다 덜, 또는 더 비건일 수는 있어도, 결코 논비건 밖의 영역에 서서 무해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비건과 논비건은 그리 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건 옵션은 비건과 논비건이 대립적인 것처럼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때 서로의 수요에 맞는 식단으로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명목하에 육식과 채식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선택지가 분절적으로 제시되는 비건 옵션의 정치 속에서 비건-논비건이라는 이분법이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음식이라는 최종적 단계 이전과 이후의 관계에서 비건-논비건 이분법의 모순이 드러난다. 음식으로 만족하는 모두에 음식이 되기 이전의 비인간존재는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건상품 구매에 사용한 재화의 일부라도 논비건상품의 생산에 사용된다면 비건 옵션은 비건이 아니다.
한편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거니즘이 개인의 식단 선택권으로 축소·환원될 여지가 남는다. 비거니즘의 목적은 착취와 학대에 대한 저항과 그로부터의 해방에 있는 것이지, 채식에 대한 단순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거니즘과 채식주의는 결코 같은 말이 될 수 없다. 비거니즘의 가치에 공명하면서 비건과 논비건의 접근(혹은 선택지)을 보장한다는 것은 비건 디폴트를 제공한다는 것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단 한 명(命)도 더 잃을 수 없다”*
*2015년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페미사이드에 저항하며 사용하기 시작한 슬로건으로, 원문은 “Ni Una Menos”다. 우리말로는 ‘한 명(의 여성)도 적지 않다’ 등으로 번역된다. 이 글에서는 김현의 논문 「단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2023) 내의 번역을 따른다. (여성)인간동물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명(名)’이 아닌 여성-인간-동물을 포함하며 모든 존재를 지칭하는 ‘명(命)’을 사용해 표현했다.
이상의 요소들을 모두 고려할 때, 비건과 논비건의 관계를 대략적인 도식으로 나타내면 아래 그림과 같고, 비건과 논비건의 경계는 흐릿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비건은 사실 논비건이다.

이 주장과 도식은 결코 비거니즘의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육식으로의 회귀 혹은 윤리적 육식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비거니즘에 대한 많은 비판과 비난이 이 지점에서 비롯되지만, 나는 바로 여기에서 비거니즘의 가치와 의의를 (재)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비거니즘은 언제 어디서나, 특히 먹는 것에 관해서 공격받아 왔다. 애석하게도 인간동물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데, 심지어 식탁이라는 공간은 자고로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결국 식탁 위 대화에서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돼 있어야 육식정상사회에서 채식을 선택·요구할 수 있다.
비거니즘이 윤리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된다(이때 논의의 주인공은 언제나 싱어와 레건이다). 식물 재배 증대로 인한 환경 파괴를 이야기하고, 인간이 아닌 육식동물을 비건으로 만들 수 없다며 인간동물의 비건되기 프로젝트는 종차별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 속에서 비거니즘의 가치가 도출될 수 있는 맥락들이 탈각되거나 뭉뚱그려지며,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합과 전환, 그리고 그 가능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식물상품 생산량의 증대를 비판하는 시각에서는 대안으로 윤리적 육식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품생산량의 증대로 생태가 파괴되는 것은 무계획적 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식물성 상품인지 동물성 상품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또, 누구의 환경이 파괴되는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에코페미니즘이 오랫동안 지적한 바와 같이, ‘글로벌 노스’의 고소득층 도시 거주민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사우스’의 여성, 어린이, 동물, 자연은 1순위 착취 대상이 된다. 가장 적절한 답은 분명히 탈자본주의에 있다. 하지만 윤리적 육식 담론은 탈자본의 상상력을 재단하고, 여전히 책임을 개인화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가 만든 세 번째 포장지라고 할 수 있다.
비거니즘의 인간중심성 비판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면, 비거니즘은 인간이 소비와 생산 행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모든 인간동물이 비건이 될 수 없으므로 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보다 덜 죽이자, 죽이지 말자, 먹지 말자”라는 주장이 무용해지지는 않는다. 지금처럼 다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완전히 탈-인간중심주의적인 선택지는 존재할까? 지난 1월에 제정된 ‘개 식용 종식 특별법’을 생각해 보자. 개는 반려동물로 분류되는, 인간동물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이 때문에 다른 동물들의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의 크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목소리가 모였다. 제정 논의에서 제기된 비판 중 하나는 법의 이름으로 동물들 사이에 경계를 긋게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동물의 해방이라는 의제에 공명함에도, 명백히 종차별적인 이 법을 환영하는 이유는, 죽어가는 동물을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게 돼서다. 그만큼 살리는 일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특별법 제정을 종착점이 아닌, 모든 동물이 학대와 착취의 메커니즘 속에서 죽지 않게 하는 과정 속 한 발자국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단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를 동물 운동에서도 외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동물 한 명을 살리는 게 이론적 논쟁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떤 동물은 죽었다. 인간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라는 미명 아래 비거니즘과 특별법 제정이 비윤리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동물을 살리는 것 중 어떤 선택지가 더 윤리적인가?
비거니즘을 취약한 존재들의 저항으로 확장하기
지금의 비거니즘은 일상 속 소비가 중심이 되는 라이프스타일 운동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비거니즘의 (재)확장을 통해 정치적 저항성을 증폭할 것을 제안한다.
비거니즘의 정의로 돌아가자. 비거니즘은 동물의 착취와 학대에 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비거니즘의 가치는 착취와 폭력이 생산되는 고리를 끊어내는 데 있다. 모두가 비건이 될 수도, 비거니즘이 인간중심주의의 혐의를 벗을 수 없어도, 비거니즘의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완벽하게 실천할 것을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행위에서 착취, 폭력, 그 결과로 생산된 상품을 목격하고, 이에 최대한 저항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의 정의 속 동물은 분명 인간동물을 포함하지만 (해야겠지만), 표면적으로는 누락돼 온 듯하다. 또한, 생태라는 관계망 속에서 동물은 동물들과 관계 맺기도 하지만, 비동물자연과도 관계를 맺는다. 두 가지를 종합하며, 비거니즘을 비인간동물뿐만이 아닌 여성, 장애인, (성)노동자, 퀴어 등 모든 인간 존재 그리고 비동물자연의 착취와 배제에 반대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때 비거니즘은 취약성의 정치에서 저항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거니즘은 채식을 비롯한 소비 행위에 한정되지 않고, 광장에서의 사회운동과 체제 전환을 위한 움직임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조차 가려진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 서로를 마주하고, 조용히 죽어간 존재들에 애도를 표하며, 단절의 도구로 사용됐던 취약성을 연대와 교차의 도구로 삼아 “우리는 단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라고 외칠 힘을 얻게 된다.
일상 속 채식도, 취약한 존재들이 광장으로 나와 저항하는 것도, 체제를 전환하는 것도 비거니즘이다. 확장된 비거니즘의 지향점은 탈근대-탈육식-탈축산-탈자본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여 어제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지금의 체제는 은밀하게 취약성을 부여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를 교묘하고 복잡하게 작동하는 억압-착취-배제의 고리 속으로 빠뜨린다. 비거니즘이 이 체제들을 당장 전환할 동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부정의와 이를 가능하게 만든 체제의 실체를 직시하게 만든다. 착취뿐인 체제에 의해 함께 죽어가는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한 명이라도 살려내기 위한, 같이 살기 위한 저항적 움직임이 비거니즘에서 비롯될 수 있다. 정치학자 채효정이 「탈육식과 동물해방운동」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건 실천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천 중 하나면서도 체제를 전환할 동력을 만드는 장치다.
취약성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고통과 함께한다. 자본과 권력의 통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취약성을 떼어낼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영원한 고통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보다 저항과 돌봄으로 “고통의 질감”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우리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단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 같이 살고, 서로 돌보며, 함께 저항하자!
[참고문헌]
김현(2023), 「단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 『안과밖』 54, pp. 116-151.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2020), 『에코페미니즘』, 손덕수·이난아 역, 파주: 창비.
채효정(2021), 「탈육식과 동물해방운동」, OFF MAGAZINE, https://off-magazine.net/TEXT/2021-hyojeongca.html.
Deane Curtin(1991), “Toward an Ecological Ethics of Care,” Hypatia 6(1), pp. 60-74.
연극 〈헤르츠클란〉(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