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을 오래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수라에 다녀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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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아(사회 22)

살아있는 존재들을 착취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지금의 체제에 조금이나마 저항하며 살고 있습니다. 서로를 잘 돌볼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매번 넘어지고 엉엉 울게 되더라도 씩씩하게 자유 평등 평화 해방 투쟁 혁명 사랑 용기 연대를 외치겠습니다!

floria0809@snu.ac.kr

  “《수라》 보셨어요…?”

  올여름 나의 안부 인사였던 말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개봉했는데도 미지근했던 주변의 반응이 서운해 홍보에 온 마음을 기울였던 기억이 있다. 이 영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내가 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무에게나 고백하고 싶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토록 사랑하는 《수라》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큰 영화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새만금 간척사업이 현재진행형의 국가폭력임을 고발하기도 하고, 갯벌과 그곳에 사는 생명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기도 하며, 국가 간 경계와 종간 차이를 넘어 우리가 연결돼있다는 걸 일깨워주기도 한다. 한 마디로 최고의 영화이니 혹시라도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꼭 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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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라》(2023) 포스터 ⓒ황윤

  영화의 배경이 된 새만금 간척사업은 33.9km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로 바다를 막아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고,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갯벌을 매립하는 사업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전북도민에게 사업을 통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 말했지만, 개발 이후 지역민들의 삶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대부분의 이익은 수도권 소재의 대기업 건설사에게 돌아갔고, 일자리를 잃은 어민들은 일용직과 비정규직을 떠돌며 불안정노동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갯벌은 이들에게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닌 삶 그 자체였기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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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사업 일대 위성사진(2008) ⓒ새만금홍보관

  한편 엄연한 전북 주민임에도 비인간이라는 이유로 호명조차 되지 못한 존재들도 있었다. 정부는 갯벌에 살고 있는 수많은 멸종위기종을 환경 영향 평가 보고서에서 누락시켜 개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졸속으로 추진된 개발은 생태학살과 다를 바 없었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자 새만금호는 생명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나는 썩은 물로 변해갔다. 엄청난 수의 조개들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고, 방조제 완공 전 8만여 명이 관측됐던 붉은어깨도요는 최근에 수백 명밖에 보이지 않게 됐다.

  그러나 굴착기가 옆에서 뻘을 퍼내고 전투기가 큰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검은머리물떼새는 새끼를 보살폈고, 흰발농게는 견디고 버티며 삶을 이어갔다. 고라니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발자국을 남겼고, 해홍나물과 퉁퉁마디는 굳건히 제자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이들 옆을 지켰던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 있었다. 조사단은 이미 다 끝난 일이라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아름다운 갯벌과 생명들을 20여 년째 기록하고 있다.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아름다움을 모른 체 하지 않겠다는 강단, 그리고 배수갑문을 늘리고 해수 유통을 원활히 한다면 새만금이 2년 안에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굳세고 근거 있는 믿음이리라 짐작해 본다. 

  스크린을 통해 본 갯벌은 정말이지 살아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갔을 때 한 명의 목격자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되뇌었다. 갯벌의 모습뿐 아니라 인간 동물과 비인간 존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며 함께 살아가고 성장하는 모습이 너무 아프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망가진 곳에서도 꿋꿋하게 살고 있었는지…. 스러져갔던 생명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기록을 멈추지 않는 마음은 무엇인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 경이롭고 놀라워 마음이 붕붕 뜨다가도 자꾸 눈물이 났다. 이곳은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곳이구나,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곳이구나.

  올해가 가기 전 수라에 다녀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마침 전북녹색연합에서 기획한 갯벌 탐방 프로그램을 발견해 운 좋게 서천갯벌과 수라갯벌에 다녀올 수 있었다. 2021년 서천갯벌, 고창갯벌, 신안갯벌, 보성·순천갯벌이 ‘한국의 갯벌’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은 자연유산에 등재된 갯벌들과 수라갯벌을 다녀오며 갯벌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게 행사의 취지라고, 수라갯벌은 아직 등재되지 않았지만 등재 조건을 이미 충족하고도 남는다며 등재를 위한 운동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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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 스카이워크에서 찍은 서천갯벌

  서천갯벌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비릿하지 않은 깔끔하고 시원한 냄새가 기분을 좋게 했다. 탁 트인 갯벌을 보니 심장이 빨리 뛰었는데 평소와는 다른 공간 감각 때문이었다. 방대한 갯벌에 놓인 뒤 느낀 긴장은 내 생활이 얼마나 도시의 좁은 실내를 기준으로 이뤄지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반짝반짝 빛나며 날아가는 검은머리물떼새와 마도요 떼를 봤을 땐 벅차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같이 간 사람들의 탄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서천갯벌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갯벌 중 조류 개체수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가장 많을 때는 6~7만 명의 도요물떼새들이 서천갯벌을 이용한다. 러시아의 극동지방과 미국의 알래스카로부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지나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르는 장거리 비행을 하는 도요물떼새에게 한국의 서해안 갯벌은 먹이를 먹고 쉴 수 있는 중간 기착지다. 예전에는 훨씬 많은 수가 관찰됐지만, 방조제가 완공된 후엔 찾아오는 개체수가 큰 폭으로 줄었다. 도요물떼새들이 사라진다면 연이어 다른 종들 또한 사라질 것이고 생물 다양성이 붕괴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새만금 간척사업을 단순히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생태계를 훼손하는 초국가적 문제로 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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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물떼새들의 군무

  수라갯벌에 도착했을 땐 갯벌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다른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갯벌 바로 뒤에선 화력발전소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비행기가 갯벌 가까이에 착륙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군기지가 있었다. 갯벌을 매립해 신공항을 짓자는 계획은 미군기지의 확장을 위함이라는 의혹을 피할 수 없다. 이질적인 것들이 너무나 가까이 있고, 있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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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화력발전소

  수라갯벌은 갯벌-염습지-초지로 이어지는 거대한 생태축으로 이뤄져 있다. 찰박찰박 경쾌한 소리가 나는 갯벌을 지나면 염생식물이 가득한 염습지가 나오고 더 깊숙이 들어가면 초지를 볼 수 있다. 지형이 눈에 띄게 바뀌는 것이 신기해서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설렜다. 발이 안 빠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기억, 칠면초와 갈대가 어우러진 풍경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기억, 삵이 쉬어간 흔적을 발견했을 땐 그곳에 있었을 삵을 상상해 본 기억, 머리 위로 철새들이 날아갈 땐 내년에도 또 보자고 이야기했던 기억.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간다.

  갯벌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새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인간과 비인간이 삶을, 그리고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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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갯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갯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갯벌과 염습지는 탄소를 흡수해 기후위기를 막아주고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다른 곳에 있는 생명들을 지탱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갯벌이 지금껏 나를 살려왔다는 게 느껴졌다. 수라에게 살게 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다.

  아직 수라에 살고 있는 생명들이 낯설어 이름을 불러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주 부르다 보면 언젠가는 주저하지 않고 부르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라와 수라에 사는 생명들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부르겠다고 다짐한다. 스치듯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너의 이름을 오래 부를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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