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틀거리며 무대 위로 등장한 낡은 장총 한 자루가 관객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 묻는다. 연극 「빵야」의 무대 위,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총성이 울린다.
나나와 빵야
이렇다 할 인기작은 없지만 꾸준히 글을 써온 드라마 작가 ‘나나’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괜찮은 작품을 쓰고 싶다. 막연히 소품창고 주인 할아버지의 사연을 써볼까 싶어 기웃거리던 나나는 소품창고에서 낡은 장총 한 자루를 발견한다. 일제강점기 인천조병창에서 만들어진 99식 소총이랬다. 오래된 전장인 한반도가 지나온 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몸에 새기고 있는 장총과, 쓰고 가꿀 이야기를 찾아 헤매던 작가의 우연하고도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나나는 장총에게 ‘빵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직관적이고 유치한 이름이지만 직접 지은 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나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빵야, 네 얘기를 듣고, 쓰고 싶어.” 말한 순간 이야기는 시작된다.
“네가 뭘 알아? 다시 그 고통을 겪으라고? 날 다시 소품창고로 보내줘.” 격동적인 한국 현대사의 무대에 오랫동안 머무느라 잔뜩 낡고 헤진 장총, 빵야. 회상하고 꺼내놓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거를 끌어안은 빵야는 자신의 일대기를 역사 드라마로 쓰려는 나나가 영 못 미덥다. 나나의 동기는 괜찮은 작품으로 성공 좀 해보겠다는 정도의 얄팍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빵야는 일제강점기의 만주, 6.25 전쟁이 한창인 지리산, 4.3 사건이 발생한 제주까지, 한반도 곳곳을 누비며 겪은 전쟁과 폭력을 증언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들을 준비도 안 된 사람들에게 나만이 아는 것들을 말해주는 일. 증언을 결심한 이들은 듣는 이의 무엇을 믿고 그런 결심을 하게 될까. 빵야는 나나의 무엇을 믿었을까.

나나는 빵야를 알게 된 이상, 이름을 붙여준 이상 글을 쓰려 한다.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뒤죽박죽한 머릿속을 헤집고 더듬어 글자로 풀어놓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글쓰기가 직업이 된 작가라는 사람들. 나나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글이 재밌든 말든,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좋아하든 말든 나나는 성실하게 이야기를 빚어왔다. 술에 취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극본 속 인물들을 그리워하고, 차마 끝맺지 못한 글에 대해선 아쉬움이 아닌 미안함을 느낀다. 결말 없이 남게 된 자신의 인물들을 못내 애달파한다. 글 쓰는 이의 한없는 마음을 토로하는 나나의 자기 고백은 빵야에게 적어도 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길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정성껏 돌볼 것이란 믿음을 준다. 그렇게 빵야는 그동안 자신을 들었던 주인들, 손에 빵야 한 자루만을 쥐고 가혹했던 시공간을 통과하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한다. 나나가 그들을 소중히 여겨줄 것이라 믿고.
총을 쏘다, 찍다, 쓰다
나나는 소품창고에서 빵야를 데려올 때 주인 할아버지에게 “쏘려는 게 아닙니다. (글로) 쓰려고요.”라고 말한다. 일평생 전장에서 쏘아지던 빵야는 마지막 주인 소품창고 할아버지의 손에 들어가선 전쟁영화의 소품으로 카메라에 찍혔다. 전쟁영화 소품 신세로 아홉 번째 주인 빨치산 소녀를 두고 온 지리산에 다시 오른 적도 있다. 그때의 빵야가 느꼈을 참담한 심정은 헤아리기도 어렵다. 잔뜩 지친 빵야의 회고 속 촬영장의 ‘컷-’소리와 전쟁터의 ‘쾅-’소리는 빵야에게도, 관객에게도 같은 소리처럼 들린다.
영어 단어 ‘shoot’은 총을 쏜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수전 손택은 “총을 쏘는 행위와 사진을 찍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했다. 카메라를 드는 이의 주관에 따라 배제할 것은 배제한 채 잘 짜인 구도 안에 대상을 맞춰 넣는 것은 총을 쏘는 일처럼 대상을 무력화해 무엇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빵야에게 겨눠진 전쟁영화의 카메라는 그가 전장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총구와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총구일 뿐이었다.
빵야에게 찍는 행위는 곧 쏘는 행위였으므로, 나나가 빵야를 글로 쓰는 행위마저 쏘는 행위가 돼서는 안 된다. 나나의 작업실은 조금 달라야 한다. 빵야가 시달린 무수한 전쟁영화 촬영장과 같을 수는 없기에, 나나는 재현의 윤리를 무겁게 고민한다.

나나는 빵야의 증언을 들으며 무언가를 재현하는 일은 그 대상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아무리 온전하게 재현하려 애써도 빵야가 겪은 당사자만의 실재가 자꾸만 깎여나가는 것 같다. “기록과 기억과 증언이라는 말도 거짓말이다”라는 나나의 독백에선 재현하는 자의 어쩔 수 없는 죄의식과 책임이 느껴진다. ‘좋은’ 재현은 오만한 말이고, ‘재현 불가능성’은 무력한 말이다. 더 나은 재현을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이야기를 쓰는 것은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며, 우리는 때로 이야기 안에서 과거의 고통과 슬픔을 만나곤 한다. 부족하더라도, 불가능하더라도 어떤 고통에 가닿기 위해 손 뻗는 일이 그저 무의미하지 않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다. 고민이 깃든 나나의 대본에는 어떤 재현의 윤리가 담겨 있을까.
총구가 응시한 곳에는
「빵야」가 나나의 대본을 통해 조심스레 제안하는 재현의 윤리는 이전의 재현이 달성하지 못한 지점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말해지지 못한 것들을 말해보는 것이다. 나나는 빵야를 주인공으로 세워 그가 만나고 헤어졌던 여러 주인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낸다. 나나가 주요 인물로 삼는 이들은 기존의 역사 재현물에서 쉽게 누락돼왔던 이들이다.
중국 팔로군에 속해있던 독립운동가 ‘강선녀’는 무장 투쟁의 현장에 분명히 존재했던 여성 독립군이자, 이념적 문제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빨치산 소녀 ‘지설화’ 역시 이데올로기 갈등의 문제로 잘 다뤄지지 않은 지리산 빨치산 투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지설화는 빨치산 부모 밑에서 적절한 돌봄과 보살핌 없이 자란 아동으로 성폭력 피해에 노출되기도 한다. 전시 상황에서 여성과 아동에게 행해졌던 또 한 겹의 폭력을 짚어보는 대목이다.
나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극본을 받은 제작사는 “그래도 공산당은 좀….”이라며 정치적인 논란을 우려해 나나의 극본에 난색을 표한다. 남과 북, 선과 악, 좌와 우 등 모두에게 익숙하고 쉬운 도식으로 간단히 구별할 수 없는 이야기가 주는 불편함 때문이다.
가운데

하지만 나나는 그저 빵야가 응시한 곳을 그렸을 뿐이다. 그곳에 장소와 이념의 구획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은 언제까지나 누락될 수만은 없는 풍경이었다.
영원히, 더 이상, 무엇도 발사하지 않는 총이 있어
언젠가 빵야가 나나에게 슬쩍 내비친 소원은 악기가 되는 것이었다. 전쟁터를 구르다 고장난 제 방아쇠를 누군가 호른의 밸브를 아무렇게나 덧대어 고친 순간부터 빵야는 악기를 꿈꿨다고 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 고운 소리를 내고 싶다고. 나나는 드라마의 마지막 화에서 빵야의 소원을 이뤄준다. 빵야와 함께했던 인물들이 저마다 악기 하나씩을 맡아 오케스트라를 꾸미고, 빵야가 그들과 재회하고, 한 치의 절망도 없는 음악을 다 함께 연주한다. 빵야는 이제 너무 낡아 총탄을 쏠 수 없다고 했다. 단 한 발만 발사해도 총열이 부서지고 말 거라고. 하지만 그 한순간의 부서짐이야말로 이 음악에 꼭 필요한 마지막 소리다. 벅찬 마음으로 기꺼이 마지막 한 발을 쏘는 빵야가 마침내 음악을 완성한다. 극 내내 발화하고 증언한 자, 빵야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는 순간이다.
끝끝내 편성도 투자도 받지 못했지만 나나는 드라마를 공들여 써내고, 마지막 화를 관객에게 상연하며 극은 막을 내린다. 나나의 작품이 편성도 투자도 받지 못한 원인은 아무래도 이런 데에 있을 것이다. 절제된 세련미 같은 매력은 부족한, 약간의 투박함과 촌스러움이 깃든, 드라마 대본으로는 보이지 않는 과하게 극적이고 동화적인 결말 같은 것들. 하지만 어떤 투자자의 말처럼 나나의 극본은 “좋은 정서의 글”이다. 멋들어진 결말은 못 내더라도 빵야의 소원만큼은 이뤄주고 싶었던 나나의 마음이 담겼다.

고통에 대해 기억하고 말하는 일을 그저 고통스럽고 어렵게만 두지 않을 것, 고통과 비극의 당사자에게 위로와 안식이 되어줄 것. 그 역시 이 극이 보여주는 재현의 윤리다.
마지막 총알을 쏜 빵야는 파편이 되어 흩어지지만, 과녁 없이 쏘아진 빵야의 마지막 총알은 영원히 나아간다. 빵야의 마지막 총소리는 정성껏 만들어진 이야기를 타고 아득하게 멀어진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분명히 다시 들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꺼이 듣고 쓰려는 자에게, 기꺼이 말하려는 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