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이 아닌 소망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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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하(서어서문 졸업) seulha27@naver.com〈서울대저널〉과 〈비마이너〉 기자로 활동했다.  ‘혁명’은 늘 설레는 말이지만, 4차 산업‘혁명’은 날 무력하게 만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빼앗길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써서 세상에 알리는 일. 기자가 해오던 일을 이제는 인공지능이 대신할 거란다. 사람들은 ‘기레기’보다 훨씬 낫겠다며 손뼉 쳤다. 마냥 따라 좋아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은 쪼그라들었다.  겁이 많은 나와 달리, 어떤 기자들은 인공지능이 두렵지 않아 보였다. 고도의 지적행위인 기자 일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순 없을 거랬다. 일부 대신하더라도 인간 고유의 영역은 남아있을 거랬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런 말들이 정교한 분석에 기반한 예측이라기보다는 비대한 자의식에 기반한 소망에 가깝다고 느꼈다. 나도 기자라는 직업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건 나의 바람일 뿐이고, 세상은 내가 바라는 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기사를 쓰는 일이 바둑을 두는 일보다 고도의 지적행위인지 잘 모르겠다. 또한 지금껏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여겨진 것들은 점차 범위가 줄어들어 왔다. 기자라고 예외일 이유가 없다. 대비하지 않으면 기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언론계에는 인공지능보다 해로운 존재가 있다. 바로 언론인들 자신이다. 인공지능이 나타나기 전부터 언론은 위기였다. 광고 수익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론 신뢰도 자체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더는 기자를 믿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널리 쓰인 ‘기레기’란 멸칭은 기자들의 부끄러운 초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몇몇 기자들은 억울해한다. 나 역시 특정 직업의 사람들을 ‘쓰레기’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말이 등장한 맥락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자들도 분명 있지만 나쁜 기자들도 분명 많다.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자들은 주로 후자 쪽이다.  기성 언론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서 전장연 지하철 투쟁을 취재하며 만난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지하철 막을 때만 오고 평소엔 우리 문제에 관심도 없어요.” 동물권 단체 DxE의 한 활동가는 지난해 10월 1일 동물권리장전 행진을 벌인 뒤 이렇게 말했다. “보도자료 300명한테 뿌렸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저희도 〈비마이너〉 같은 독립언론 만들어야 하나 봐요.” 그 많던 기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기자 없는 기자회견 현장을 지킬 때마다 생각했다.  기성 언론은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의제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경찰서, 법원, 국회 등 출입처 단위로 움직인다. 출입처 관행은 한국 언론의 오래된 문제지만 어느 언론사도 이를 선뜻 바꾸려 들지 않는다. 그 대신, 출입처의 순기능을 강조하기 바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출입처의 순기능은 ‘취재의 편의성’밖에 없다. 쉽게 말해, 그냥 그게 편한 거다. 붙어있어야 권력을 더 잘 감시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굵직한 탐사보도를 잘하기로 유명한 〈뉴스타파〉와 〈시사IN〉 등은 출입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다른 업계의 관행은 곧잘 지적하던 언론은 언론계 관행에는 유독 관대하다. 기자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이상한 동업자 정신만 가득하다. 관행으로 묶인 기자들은 서로를 감싸주며 죄책감을 덜어주고 문제의식을 지워준다. 관행의 진정한 ‘순기능’이다. 공고한 카르텔은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 언론계에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성 언론에 대항해 새로운 언론사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닷페이스〉였다. 〈닷페이스〉는 여러 소수자 문제를 거침없이 다뤘다. 인터뷰이의 말을 최대한 가공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게 전달하는 그들이 좋았다. 그런 〈닷페이스〉가 지난해 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열린 전시에 온 사람들은 마치 자기 직장을 잃은 것처럼 펑펑 울었다. 사라진다는 소식에 울어주는 사람이 있는 언론사가 몇이나 될까 생각했다. 최근엔 대구·경북 독립언론 〈뉴스민〉이 문을 닫게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은 곳들만 왜 사라져야 하는지 슬픔이 몰려왔다.  ‘언론 동지들’의 상황을 접하며 내가 몸담았던 〈서울대저널〉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오늘도 편집실의 불을 밝히고 있을 이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서울대저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측이 아닌 소망이라 해도 좋다. 인공지능 시대라지만, 학생자치가 위기라지만, 〈서울대저널〉을 응원하는 사람이 아직 너무 많다. 그러니 행여 불안해 마시고 더욱 맘껏 즐기셨으면 좋겠다. 기사를 쓸 때면 가끔은 벽을 보고 혼잣말하는 기분이 들었던 날들을 떠올리며 감히 말을 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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