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호
극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4년, 그리고 4년

극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연극 《빈센트 리버》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동성애 혐오를 묘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일어난 폭행 살인사건. 사건의 피해자는 빈센트 리버였다. 빈센트의 어머니 아니타는 사건 이후 자신을 수개월째 따라다니던 ‘데이비’를 마주하게 된다. 데이비는 자신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라 말하고, 아니타는 그를 집으로 들여 빈센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니타는 데이비가 빈센트의 연인이었으며, 빈센트가 동성애 혐오범죄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극 《빈센트 리버》는 데이비와 아니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했을 보호와 구원을 이야기한다.

피해자들의 연대

  구원과 속죄가 이뤄지는 크리스마스의 밤, 빈센트와 데이비를 위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위협당하고, 빈센트는 끝내 살해된다. 데이비는 도움을 구하려 소리치지만, 크리스마스 날 밤 두 사람을 위한 구원은 끝내 행해지지 않는다. 범죄의 피해자인 빈센트와 데이비는 폐쇄된 기차역에 남겨지고, 빈센트를 살해한 가해자들은 캐럴이 울려 퍼지는 거리로 사라진다. 길을 덮는 눈과 함께 빈센트의 억울한 죽음도 잊힌다.

  빈센트, 아니타, 그리고 데이비는 모두 피해자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론이 관심을 둔 건 오직 빈센트의 성적 지향뿐이다. 사람들은 빈센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다. 아니타는 동성애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싸늘한 시선을 받는다. 결국 아니타는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듯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게 된다.

  데이비는 빈센트가 죽기 전에도, 후에도 자신이 빈센트의 연인이었음을 밝힐 수 없었다. 동성애자는 어디서도 환영받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가족들에게조차 연인을 잃은 슬픔을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서 슬픔을 억누른다.

  누구도 아니타와 데이비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빈센트를 죽음으로 내몬 혐오를 문제 삼는 이도, 명백히 존재하는 피해자들의 슬픔을 이해하는 이도 없다. 빈센트에 관한 이야기는 데이비가 아니타의 집을 찾아온 순간에야 시작된다.

사진 설명 시작. 아니타의 집으로 표현된 무대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인다. 아니타는 무대 왼쪽 끝에 놓인 식탁에 걸터앉아 있고, 데이비는 무대 오른쪽 끝에 자리 잡은 소파에 앉아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고 있다. 무대 중앙 뒤쪽에는 아니타가 막 이사온 것을 나타내는 이삿짐 박스가 쌓여있다. 사진 설명 끝.
▲데이비와 아니타가 아니타의 방 끝과 끝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mpncompany

  데이비와 아니타는 어디서도 할 수 없었던,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통해 단둘뿐인 연대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치유한다. 빈센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위로를 건네며 자신이 입은 상처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아니타는 데이비를 통해 빈센트를 완전히 이해한다.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임을 부정하던 아니타는 대화를 통해 빈센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데이비 역시 자신의 상처를 직시한다. 빈센트의 죽음 이후 데이비는 약혼, 어머니의 병간호 등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며 자신도 사건의 피해자임을 외면해왔다. 하지만 데이비는 아니타와의 대화를 통해 빈센트에 관한 이야기는 곧 자신의 이야기임을 깨닫는다.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도 이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홀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자신 역시 피해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데이비는 정리하지 못하고 회피하기만 했던 기억을 마주하고 상처를 다듬을 수 있게 됐다. 

  대화는 짧지만 소중했다. 두 사람은 알지 못해 마주하지 못했던, 혹은 알면서도 회피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은 상실을 치유할 수 있었다. 데이비와 아니타가 만난 4월의 부활절,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빈센트는 다시 살아난다. 데이비와 아니타가 빈센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기억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빈센트의 삶은 다시 의미를 찾는다.

구원에서 배제된 사람들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빈센트 살인 사건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갔다. 사건 이후로 부활절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빈센트를 살해한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사망한 빈센트, 일상이 망가진 데이비, 아니타 세 명만이 피해자로 남아있다. 범죄의 피해자지만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세 사람과 혐오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가해자들. 진정으로 보호받고 구원받아야 할 자들은 누구였을까.

사진 설명 시작. 데이비는 얼굴에 상처가 난 채로 소파에 앉아있다. 아니타는 서서 데이비 얼굴의 상처를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다. 데이비의 얼굴이 정면을 향해있고, 아니타는 그런 데이비의 얼굴을 보며 상처를 닦고 있어 사진 속에는 데이비의 얼굴과 아니타의 뒷모습만 보인다. 데이비는 상처를 닦는 것이 어색하고 따가운지 물수건을 피하려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사진 설명 끝.
▲아니타가 자신의 집에 방문한 데이비의 얼굴에 난 상처를 닦아주고 있다. ©mpncompany

  데이비와 아니타의 대화는 조용시작해 조용히 마무리돼야만 했다. 동성애자, 그리고 동성애자의 어머니라는 시선 때문에 아니타는 공개된 장소가 아닌 자신의 집에 조용히 데이비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빈센트가 동성애 혐오범죄로 죽었음을 알게 된 후에도 아니타는 감정을 터뜨리지 못하고 그저 데이비에게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데이비가 떠남과 함께 막은 그저 내려진다. 가해자들은 처벌받지도 않으며, 아니타의 집을 제외하면 빈센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곳은 없다.

객석의 방관자에게 남겨진 것

  관객들은 사건의 방관자로 폭로된다. 폭행을 당하던 빈센트는 도와달라며 소리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관객 역시 지켜볼 뿐이다. 극의 후반부에서 데이비는 사건 당일 기찻길과 플랫폼을 회상하며 객석으로 내려온다. 관객들 사이에선 데이비는 사건 당시의 상황과 자신이 느낀 두려움을 독백으로 쏟아낸다. 하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잠잠하다. 데이비의 회상 속 따스한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만이 이질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사진 설명 시작. 데이비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다. 의자 뒤편에는 책상이 있고, 그 위에 술병이 놓여있다. 붉은색 조명과 푸른색 조명이 무대 배경을 덮으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사진 설명 끝.
▲데이비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빠져있다. ©mpncompany

사진 설명 시작. 아니타가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벽에는 붉은빛의 전등이 달려있으며 은은하게 아니타를 비추고 있다. 소파 오른쪽에는 협탁이 있고, 그 위에 재떨이가 놓여있다. 사진 설명 끝.
▲아니타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빠져있다. ©mpncompany

  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 그들의 사건을 바라보기만 한다. 아니타가 사건 당일의 이야기를 모두 전달받는 순간, 조명은 객석을 비춘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아니타를 향한 관객들의 시선이 조명에 의해 명확하게 드러나고 관객들은 자신들도 빈센트의 사건을 그저 지켜보기만 한 방관자임을 깨닫는다. 극 속의 가해자와 방관자들만 탓하던 관객들은 자신도 얼마든지 사건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객석으로 내려온 데이비를 마주하고, 자신에게 향한 조명을 바라보며 관객은 더는 극과 거리를 둘 수 없다.

  데이비, 아니타 그리고 빈센트까지. 세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은 자신을 돌이켜본다. 모두에게 따뜻했지만, 데이비와 빈센트에게만 유달리 차갑고 혹독했던 크리스마스. 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보호받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객석에 남겨진 이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어떻게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연극 《빈센트 리버》는 관객들이 극장을 나오는 그 순간, 새롭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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