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20대 대선이 끝났다. <서울대저널>에서 이번 대선 과정을 논하는 커버스토리를 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대남’ 프레이밍을 다뤄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부터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이대남’ 프레이밍의 피해자이자 당사자라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20대들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채롭다는 걸 보여내겠다 자신했다.
20대 청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을 인터뷰이로 모집했다. 성별, 나이대, 주거지역 등의 배경을 적극적으로 다양화하려 노력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라면 다양한 답변을 주지 않겠냐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대선후보들의 청년 공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20대 남성이라면 ‘병사월급 200만원’ 공약을 좋아하겠지, 취업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취업 지원’ 공약에 관심이 있다고 하겠지. 인터뷰이가 속한 사회적 배경으로 관심 있을 만한 공약을 점쳤다. 그러나 인터뷰이들의 답변은 예상과 달랐다.
수도권에 거주한다고 밝힌 몇 인터뷰이는 지역 불균형 해소 공약을 눈여겨봤다고 답했고, 한 인터뷰이는 군복무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했지만 군인 공약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안의 ‘피해자’이자 ‘당사자’라는 점만으로 인터뷰이의 생각을 넘겨짚을 순 없었다. ‘20대 남성은 여가부 폐지에 환호할 것’이라는 정치권의 프레이밍을 비판하고 있었음에도, 나 역시 20대 청년을 납작하게만 바라봤음을 깨달았다. 자가당착에 빠졌음을 체감했다.
나의 편협한 시야를 실감하는 순간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지면에 실어내지 못한 일화를 이렇게 데스크칼럼을 통해 토해내는 건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편협함을 실감하는 순간순간들이 내 손을 굳게 잡아 이끌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취재원을 마주할 수 있는 본래의 자세로 말이다. 이번 커버스토리에서 취재원들이 내놓은 목소리는 20대들의 관심사가 다양하다는 걸, ‘이대남’ 프레이밍이 한계적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냈다. 편협함을 깨닫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아직은 기사를 써 내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