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더 이상 책장에만 갇혀 있지 않다. 스마트폰의 일상화와 디지털 환경의 변화는 도서 소비 트렌드를 바꿨다. 빠르고 간편한 것을 찾는 현대인들에 맞춰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이 등장하고 있다. 주머니 속 시집, 봉투 문학, 오디오북,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출판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 이들을 만나 디지털 세대 출판물의 미래에 관해 얘기해봤다.
카드형 문학 작품, 주머니시
‘주머니시’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송유수 대표(송): 독립 출판 ‘주머니 속 시집’ 대표 송유수입니다. ‘주머니시’는 문학을 가볍게 소비하고 공유하고자 기획한 서적이에요. 담뱃갑 모양의 패키지에 카드 형태의 시 20편이 담겨 있습니다.
주머니시의 작품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요?
송: 공모를 통해 작품을 선정해요. 문학성과 공감성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시를 선호해요. 함축이 많고 추상적일수록 많은 사람이 즐겨 읽기 어려워지죠. 시가 너무 어려우면 저희 목적과 맞지 않기 때문에 공감 가능한 시여야 해요. 대중성과 문학성 사이의 균형을 찾고 있어요.
주머니시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송: 대학생 시절 힘들어하던 친구에게 힘내라고 쪽지를 써주곤 했는데,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걸 그때 실감했어요. 당시 담뱃값 인상이 이슈였는데 마침 쪽지 생각이 나서 담뱃갑 안에 작품을 담아 쪽지처럼 펼쳐볼 수 있는 시집을 만들었어요.

▲주머니시 중 ‘비타민 시’ 라인. 앞면엔 발췌한 시구를, 뒷면엔 원본 시 전체를 수록했다.


▲상측은 주머니시 초기 버전, 하측은 주머니시 시리즈 중 ‘시거랫’ 라인이다. 실제 담뱃갑 문구를 패러디했다.

▲’아인서점’의 주머니시 진열대
시의 매력을 최대한 부각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송: 시의 매력은 짧은 길이로 아름다운 언어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담뱃갑 모양에 시를 넣을 수 있는 것도 글의 길이가 짧아서예요. 시가 디지털 세대에 가장 적합한 문학이라 생각해요. 글의 디지털화라는 트렌드에 맞춰 제품화한 것이 주머니시인 셈이죠.
도서 번호(ISBN)를 부여받는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송: 주머니시도 도서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도서 번호를 신청했어요. 팬시 상품 형태지만, 굿즈가 아닌 서적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싶었죠. 처음에는 카드 형태의 시가 ‘활용 후 가치가 소멸하는 일회성 자료’라는 사유로 반려됐어요. 서적에 대한 정의가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규격이나 형태는 통용되는 서적과 다르지만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저작권 보호를 받는 ‘문학’이거든요. 다시 발급을 요청하면서 종이책 소비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문학을 전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서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요청 결과 ISBN을 부여받을 수 있었어요.
※ 도서번호란 서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정한 도서 표준 고유번호다. 도서의 주민등록번호와 같다.
주머니시의 최종 목표가 있나요?
송: 작가들이 글을 업으로 삼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싶어요. 문학콘텐츠 플랫폼 ‘봄놀다’를 구축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오프라인과 온라인 모두에서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작가들의 문학 활동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명함 제작업체에서 제작되는 주머니시

▲QR코드를 찍으면 온라인 문학콘텐츠 플랫폼 ‘봄놀다’로 연결돼 글을 읽을 수 있다.
봉투 속 근대문학, 프로젝트 메이지
‘프로젝트 메이지’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최수민(최): 새벽고양이라는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최수민입니다. 저는 시집과 산문을 출간한 작가이고, 세계 근대 문학을 발굴해서 알리는 ‘프로젝트 메이지’를 진행하는 번역가이자 편집자예요. 새고서림이라는 책방도 운영하고 있어요.
프로젝트 메이지 시작 계기는 무엇인가요?
최: 일본 문학을 전공해서 근대 문학과 단편 소설의 매력을 잘 알아요. 장편 소설과 고전의 장벽이 높다는 것도 이해하고요. 매력적인 근대 문학을 알리고 싶어 직접 작품을 찾고 번역해 출간하게 됐어요.
프로젝트 메이지의 작품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요?
최: 분량이 적당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발견하려 노력해요. 주로 12~14장 분량의 작품을 찾아요. 잘 알려지지 않은 근대 문학을 소개할 때 뿌듯함을 느끼죠.



▲엽서 형태의 봉투에 근대단편소설 1편과 사진 1장이 들어간다.


▲프로젝트 메이지 특별판 『유서의 일부로부터』. 전 과정이 가내수공업으로 이뤄진다.
엽서 모양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유서의 일부로부터』는 봉투에 담긴 편지 형식이에요. 이런 형태로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최: 편지 형태의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다 만난 작품이 『유서의 일부로부터』예요. 죽음에 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유서가 편지 형태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주고받았던 편지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기도 했고요. 서적 형태를 먼저 생각하고 적합한 작품을 찾은 셈이죠.
10월 출간 예정인 ‘프로젝트 종이비행기’는 항공권 형태의 오디오북이라고 들었는데요, 기획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최: 프로젝트 종이비행기는 코로나 19 이후 해외여행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콘텐츠 교환을 위해 시작했어요. 일본 독립출판 ‘레몬책방’과 ‘aida project’와 협업해 해외여행 욕구를 충족시켜줄 출판물을 기획했고, 강릉과 히로시마에 대한 여행 에세이를 교차 출간하기로 했어요. 일본에서 강릉 편이, 한국에서는 히로시마 편이 출간되는 거죠. 항공권 형태의 봉투에 여행 포스트카드 12장이 들어가요. 뒷면의 QR코드를 찍으면 12개의 영상과 오디오북을 재생할 수 있어요.
글의 디지털화라는 흐름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최: 전자책을 즐겨 읽진 않지만, 디지털 시대에 책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다양한 시도를 하되 종이책의 본질을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본질을 유지하되 종이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다른 매체로 담아 장단점을 보완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어요.

▲프로젝트 종이비행기
일기 딜리버리와 콜링 포엠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문보영 작가(문): 일기 딜리버리와 콜링 포엠을 운영하는 작가 문보영입니다.
일기 딜리버리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유형의 우편물과 전자 메일을 함께 활용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문: 예전부터 이벤트로 편지를 우편으로 부치고 싶었어요. 꾸준히 쓰던 일기를 메일링하고, 독자들이 보관할 수 있게 물성이 있는 것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우편물도 보내게 됐죠.


▲매달 첫 번째 원고는 일반 우편으로 봉투에 담아 배달된다.
전화로 시를 읽어주는 ‘콜링 포엠’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문: 옛날에 어떤 외국 시인이 행위 예술처럼 전화로 시를 낭독했다고 하더라고요. 시는 눈으로 읽는 장르면서 소리 내 읽는 장르기도 하니까 직접 낭독하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코로나 19로 인해 독자를 대면할 수 없다 보니 통화로 독자들을 만났죠.
어떤 시를 읽어주시나요?
문: 미발표한 시 중 괜찮은 시를 읽어드려요. 통화하면서 시가 구어체로 바뀔 때도 있어요. 말하면서 어미나 어휘가 바뀌고, 애드립이 들어갈 때도 있죠. 끊고 나서 바뀐 게 더 좋으면 퇴고하기도 해요. 대부분 숨죽여 들으시는데, 어떤 분은 시를 듣고 감상을 들려주시기도 해요.

▲우편 안에는 손글씨 원고가 들어있다.
다양한 시도를 하시는 거 같아요. 디지털 세대로서 출판물의 변화를 실감하시나요? 어떻게 변화할까요?
문: 종이책과 전자책이 공존하며 책을 향유하는 방식이 더 다양해질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일기 딜리버리를 하면서 디지털 세대일수록 독자들이 물성을 찾는다고 느꼈어요. 종이 글과 전자 메일 모두 좋아해 주셨지만, 특히나 우편물을 좋아하시더라고요. 종이책이 더 좋다는 건 아니지만요.
페이퍼문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하설(하): 소설 쓰는 하설입니다. 소설 메일링 ‘페이퍼문’을 운영했고 최근 1인 출판사 별닻을 설립했어요. 메일링한 작품을 엮은 『아날로그 블루』라는 단편집을 올해 하반기에 발간할 예정입니다.
페이퍼문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하: 소설을 쓰고 보여주는 걸 좋아해요. 인터넷에서 소설을 연재하고 문예창작동아리에서 합평할 때 독자의 반응이 창작에 도움이 된다고 느꼈죠. 대학 졸업 후 독자를 찾지 못하니 창작 동력이 사라져 글쓰기를 지속하기 어려웠어요. 스스로 독자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메일링을 시작하게 됐어요.

페이퍼문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됐나요?
하: 개인 SNS로 모집했어요. 신청받을 때 독자들에게 써줬으면 하는 소재도 받아서 글을 썼어요. 글은 PC 버전과 모바일 버전 UI를 따로 준비했어요. 한 독자분께서 본인은 지하철에서 읽어서 스크롤하는 방식으로 바뀌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보내주셨거든요. 그 후로 두 가지 구성으로 메일을 보냈어요.
단행본 준비와 메일링 준비에서 느끼는 차이점은 뭔가요?
하: 메일링은 디지털 방식이다 보니 디지털 화면에서 보기 편한 UI를 고려했어요. 화면으로 봤을 때 보기 좋은 여백, 행간을 고민했죠. 인쇄물과 달리 예산 제약이 없으니 메일링은 다양한 색상을 사용했어요. 『아날로그 블루』는 실물 책으로 출판되다 보니 디지털 원고 프레임을 그대로 옮겨 올 수 없어 디자인을 처음부터 다시 구상했어요. 종이책은 책장을 넘길 때 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종이 재질도 신중하게 선택했죠.
출판물 생산자로서 글의 디지털화라는 흐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 종이책과 전자책이 주는 느낌은 정말 달라요. 아날로그적인 것이 주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종이책이 없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채택하겠죠. 특이한 질감을 활용하거나 책의 모양 자체를 다르게 만드는 거죠. 문학이라는 장르도 디지털 세대의 특성에 맞게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추구할 것 같아요. 독자들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바뀌는 식으로 부가적인 즐길 거리를 제공하지 않을까요?


▲좌측은 ‘페이퍼문’의 PC 버전, 우측은 모바일 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