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 …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얼마 전 SNS에서 ‘다큐멘터리 3일’의 클립 영상을 보았다. PD가 한 어부에게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어부는 위의 시로 답했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와 조지훈 시인의 ‘사모’가 절묘하게 이어졌다. 그는 과거 국문학과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낙화’와 ‘사모’는 모두 교과서에 실린 시다. 오지선다형의 문제가 뒤에 따라오는, 쿰쿰한 갱지에 새겨진 지루한 활자. 대학에 오기 전 나에게 시란 그 정도의 글이었다. 그런데 그가 낭송한 시는 완전히 달랐다. 어부 뒤의 노을진 바다가 더하는 낭만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문학이 자신의 꿈이었다 말했지만, 이미 그의 삶이 문학이었다. 20초 가량의 짧은 낭송에서 그의 삶이 읽혔다. 아니, 읽고 싶어졌다.
기사와 시는 글의 여러 종류 중에서도 양극단에 놓여 있다. 기사는 사실을 전달하는 글이고, 시는 정서를 표현하는 글이다. 데스킹 과정에서 기자들의 시적인 비유는 대체로 잘려나간다. 시의 미덕은 기사의 미덕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영상을 보다 문득, 기사를 쓰는 것이 시를 듣는 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는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글이다. 현장의 언어는 기사의 언어처럼 말끔하지 않다. 말로 다 하지 못한 맥락이 압축되어 있고, 어떤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다. 명확한 질문을 가지고 다가가도 현장의 목소리는 손쓸 새 없이 곁가지를 치고 뻗어간다. 누군가의 삶과 어느 곳의 역사가 밀려 들어온다. 마치 시와 같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복잡다단한 세계, 그것을 읽어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이 시를 듣는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기에 나는 아직 어리고, 엉성한 해석으로 쓴 글이 오히려 실례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시가 휩쓸고 간 마음은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래서 시를 더 읽고 싶다. 여기, 저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