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최고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충고다. 하지만 이 염려 섞인 조언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할 권리를 넘어 아픔이라는 상태를 인정하고 질병과 함께 잘 살아갈 권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사회단체 다른몸들 조한진희 대표는 여성·탈식민·장애인권 등을 넘나드는 활동가이자 질병을 가진 아픈 몸 당사자다. 조한 대표는 저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잘 아플 권리, ‘질병권’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가 몸담은 사회단체 다른몸들은 질병권이 보장되고 n개의 다른 몸들이 존중되는 세상을 지향한다. 조한진희 대표에게 질병권이란 무엇인지, 질병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질병권이라는 개념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질병권이 무엇인가?
질병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흔히 쓰이는 개념인 ‘건강권’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건강권이 ‘건강할 권리’라면 질병권은 ‘잘 아플 권리’다. 건강권은 어떻게 하면 시민들이 더 건강해질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권은 의료서비스와 의학의 발달, 의료 접근권 차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건강 불평등 해결에 집중한다. 반면 질병권은 건강할 권리를 넘어 ‘어떻게 하면 건강을 회복하지 않더라도 온전한 삶이 가능할까’에 초점을 맞춘다. 질병권은 질병을 겪는 사람이 아픈 몸을 가지고도 우리 사회의 성원으로서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질병권 개념에서 아픔과 질병은 긍정적 대상인가?
물론 우리가 질병을 지향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건강과 질병을 선악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보건의료의 관점에서 건강은 선이고, 질병은 퇴치해야 할 악이다. 하지만 질병은 언제나 악인가? 나이 들고 병들고 죽는 것은 모든 이들이 겪는 경험이자 실체다. 질병권 개념에서는 생로병사를 선악의 문제로 판단하는 게 문제라고 본다. 질병은 지향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질병을 겪는 것이 반드시 불행이자 재앙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질병권 개념은 ‘건강은 행복, 질병은 불행’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나고자 한다.
질병이 악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병에 걸리면 의료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자 한다. 건강 회복에 초점이 맞춰진 의료 체계 속에서 질병을 인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건강의 완전한 회복보다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상태를 인정하는 게 왜 중요한가’로 바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는 의료가 많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질병이 완치되거나 죽거나 두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료가 발달하면서 완치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중간의 상태, 예컨대 만성질환자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의료가 질병을 인정한다는 건 이 중간의 상태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의료가 질병의 상태를 인정해야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의료가 발달할 수 있다. 의료의 목적을 완치에만 둔다면, 완치되지 않는 질병을 가진 몸은 의학적으로 실패한 몸이 되고 만다. 이런 몸은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의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다행인 건 의료 체계가 점차 아픈 몸을 인정하는 추세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덜 불편하게 살 수 있도록 의료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의료 체계 속에서 질병을 인정하는 건, 완치되지 않는 아픈 몸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들의 삶을 위한 의료의 역할을 고민함으로써 가능하다.
사회단체 다른몸들은 질병권 개념을 젠더·장애·민족·계급 등의 문제와 교차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차적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질병에 걸리면 병원에서는 세포 수치만 본다. 하지만 질병이 생기기까지, 또 그 질병이 진행되고 치료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는 생물학적 요인뿐 아니라 젠더나 빈곤, 계급 등의 요소가 관여해 있다. 질병권에 대해 교차적으로 고민한다는 건 질병을 젠더와 빈곤, 계급, 민족 등의 요소가 결부된 총체적인 역사로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여성 관련 질환이 많이 연구되지 않는 의학계의 현실, 노동자를 질병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 노출시키는 노동환경 등을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잘 아플 권리’로서의 질병권은 제대로 보장되기 어렵다. 질병에 스며들어 있는 젠더 불평등, 계급 불평등을 함께 변화시켜야 한다.
젠더와 질병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돼있는가?
한국의 최근 3~40년 의료 통계를 살펴보면 환자의 입원일수가 점점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암 수술 시 평균 입원 기간이 예전에는 3주였다면 지금은 4~5일로 단축됐다. 의료 산업화가 만들어 낸 변화다. 입원일수를 줄여 병상의 회전율을 높이고 수술 건수를 늘려 병원의 소득을 높이는 방식이다.
입원일수 단축이 누구에게 더 큰 어려움을 초래하는지 아는가? 여성 환자들이다. 퇴원한 여성 환자들은 제대로 돌봄받지 못한다. 퇴원 이후의 암환자 간병에 대한 통계를 보면, 결혼한 남성 암환자의 8~90%가 아내에게 간병을 받는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 암환자는 30% 내외만이 남편에게 간병을 받았다고 답했다. 여성 암환자들의 답변 1위는 ‘자신 스스로 간병했다’는 응답이다. 수술 이후에 적절한 돌봄이 제공돼야 함에도 여성은 제대로 돌봄받지 못하고, 많은 여성은 아픈 상태에서 가사노동을 하기까지 한다. 병원 입원일수의 단축은 병원 내 돌봄 기간을 줄임으로써 여성 건강을 악화시킨다.
입원일수를 줄이는 의료 시스템의 변동마저도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다. 문화 자체가 성별에 따라 불균형하다 보니, 여성의 질병권은 남성의 질병권과 달리 이야기돼야 하는 부분이 많다. 이런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잘 아플 권리가 제대로 성취되기 어렵다.
질병권과 노동은 어떻게 교차하는가?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은 극도로 젊고 건강한 신체만을 허락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지만, 한국은 특히 더 그렇다. 한국 사회는 노동 강도가 매우 높은 사회이지 않나. 한국은 오랫동안 OECD 국가 중 노동시간 1위를 차지해 왔고, 산업재해도 매우 자주 발생한다. 노동 강도가 세기 때문에 산업재해가 많은 것이기도 하다. 안전장치를 사용하면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강도 높은 노동을 수행할 수 없어 안전장치 없이 작업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노동 강도가 센 사회에서 몸이 아픈 사람은 ‘양질의 노동을 제공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돼 노동시장에서 배제된다.
한국을 스웨덴과 비교해 보자. 스웨덴에서는 ‘1일 6시간 노동’을 실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웨덴 노동자들은 자신이 맡은 업무만 수행하면 노동시간과 강도, 일정의 조정에서 상당한 자율권을 가진다. 나는 질병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루 4~5시간의 노동을 소화하는 것이 적합한 몸이다. 이 몸으로는 9시간 이상의 노동이 기본인 한국의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휴식과 노동을 신축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스웨덴 같은 환경에서라면, 나는 A급 노동자는 아니더라도 노동시장에 진입해 볼 만한 몸이 된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아픈 몸을 배제할 뿐 아니라 아픈 몸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한국처럼 노동 강도가 높고 노동시간이 길며 산업재해 규칙이 잘 적용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직장생활을 오래 할수록 골병 든다’는 흔한 말이 사실이 된다.
질병을 가진 당사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질병을 받아들여야 하나.
앞서 말했듯 질병의 발병과 치료,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삶 모두에 노동환경과 계급, 젠더 등의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질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질병의 개인화’라고 부른다. 예전에 우리 사회가 빈곤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지금은 빈곤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많이 없어졌지만, 질병에 대해서는 여전히 개인이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프게 됐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누가 질병에 걸리면 그 사람이 술을 마셔서,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는 식이다.
질병의 개인화는 질병을 겪는 이들이 저항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모든 인권운동이 그러하듯이, 어떤 권리를 주장하려면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가 증언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질병의 개인화가 심한 사회에서는 질병 당사자가 부당한 현실에 목소리를 내는 당사자로 성장하기 어렵다. ‘내가 잘못해서, 잘못 살아서 아프게 된 걸 누구를 탓하겠나’ 하고 자책하게 된다.
질병 당사자들에게는 ‘저항적 질병 서사’가 필요하다. 저항적 질병 서사란 질병을 우리 사회의 구조적·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로 보고, 질병의 발병과 그로 인한 어려움을 사회 구조와 연동해서 해석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질병에 대해 지금껏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이켜보거나, 기껏해야 질병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면서 질병을 일종의 선물처럼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저항적 질병 서사는 나에게 찾아온 질병이 내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다른몸들 구성원의 저항적 질병 서사를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 이전에 구성원 중 한 분은 몸이 아픈 것을 “매일 음식을 아무렇게나 챙겨 먹고 운동도 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항적 질병 서사에서는 이런 해석이 가능해진다. “나는 인천에서 서울로 네 시간씩 출퇴근하는 환경에 살고 있다. 네 시간의 통근을 거치고 나면, 집에서 운동은커녕 건강한 식사를 챙겨 먹을 수 있는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다. 질병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회사의 긴 노동시간, 유연하지 못한 출퇴근 시간, 서울의 집값이 너무 비싸 인천에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의 결과다. 나는 질병의 원인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겠다. 내가 비난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이다.”

질병과 돌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다.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돌봄은 어떤 형태여야 할까?
코로나19 이후 ‘약자를 잘 돌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말이 많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애인과 노인 등을 잘 돌봐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문장 자체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사람을 약자로 만드는가? 약자를 잘 돌보기보다는 아픈 사람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 나이 든 사람이 약자가 되는 사회적 조건 자체를 질문해야 돌봄이 보편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나.
질병권의 시각에서 돌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돌봄이 필요한 시기와 방식, 강도가 상황에 따라 변할 뿐이다.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돌봄은 모든 시민이 돌봄의 주체면서 동시에 돌봄의 대상이라는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돌봄의 주체는 여성으로, 돌봄의 대상은 노인이나 장애인, 중증 환자로 고정해 두었던 프레임 자체를 흔드는 것이다.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돌봄은 약자로 규정된 이들에게만 집중되는 돌봄이라기보다 사회 전체에 공기처럼 흐르는 돌봄이다. 이를 위해선 돌봄을 중심으로 사회 체제를 전환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전제로 사회와 노동시장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질병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지금과는 어떻게 다를까.
일단 지금처럼 질병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있지 않은 사회일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질병에 대한 공포는 태생적인 공포를 뛰어넘는 과장된 공포에 가깝다. 이 공포는 한국 사회에서 아픈 몸이 될 경우에 겪는 어려움이 매우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은 질병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다. 건강을 잃으면 경제적으로 빈곤해지고, 경제적 빈곤은 활동을 제약한다.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아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질병 당사자의 사회적 평판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질병권 개념이 보장되고 널리 퍼진다면 질병이 곧바로 불행이나 어려움으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질병에 대한 기이한 수준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까. 질병이 편안하게 수용되고 치료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은 또한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질병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아파서 돌봄을 받을 수 있고, 동시에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임을 전제하는 사회다. 이 전제에서는 치료를 위한 의료뿐 아니라 아픈 몸을 위한 돌봄이 강조되고, 그 돌봄을 사회 전체에 보편화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건강과 질병을 유동적인 상태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건강은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불변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일시적 상태에 불과해진다. 아프다가 회복되는 과정, 혹은 회복되지 않고 아픈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마저도 생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결국 질병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자신이 질병에 걸렸다고 해서 굉장히 슬퍼하거나 불행에 빠졌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