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봤다.” 딘 껌은 손가락으로 한쪽 눈을 가리킨다. 이윽고 그 손가락으로 저 너머를 가리킨다. 그는 큰 원을 그린다. 뭔가를 둘러싸고 있는 원을. 그의 몸짓은 주위를 둘러싸는 위협으로부터 그가 몸을 숨기며 숨죽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손가락을 땅으로 옮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남베트남의 국기가 차례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자신의 눈을 가리킨다. 땅을 가리켰던 손가락은 눈으로 옮겨진다. “나는 봤다.”

그 자체로 말하고 있는 것들
이 이야기는 베트남의 어느 마을로부터 시작된다. 증오비나 위령비들이 나란히 세워진 곳, 꽃과 향으로 떠나간 가족을 기리는 곳에 카메라는 시선을 던진다. 응우옌 럽은 “위령비가 있는 곳은 사람들이 많았던 곳”이라며 윗마을부터 내려와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 마을에 당도했던 그 날의 폭격을 회상한다. 그는 한국군의 지뢰 파편을 눈에 맞아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응우옌 티 탄은 “아직도 기억에 사라지지 않는 날”, 온 가족이 죽었던 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살을 말하는 응우옌 티 탄의 목소리에 또 다른 소리들이 덧입혀진다. 귓가에는 무차별한 폭격의 소리, 무전을 타고 흐르는 일사불란한 군인의 목소리가 울린다. 눈앞에는 군인들의 모습이 나타나다가, 총포의 섬광이 화면을 뒤덮는다. 학살이 지나가고 포성 소리가 멎은 곳에는 “상황 종료”라는 목소리와 함께 군가가 자랑스럽게 울려 퍼진다. 학살은 작전이 훌륭하게 실행된 결과였다. 1968년 퐁니·퐁넛 마을과 호앙쩌우 마을의 죽음은 각각 ‘괴룡1호’ 작전과 ‘승룡3호’ 작전이었고. 1969년 프억미 마을의 참사는 ‘승룡10호 작전’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의 약 80개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영화는 온전한 재현이 불가능한 기억들을 군인들의 모형과 되살려낸 현장의 소리를 통해 전한다. 말해지지 못한 채 봉합돼버린 당시의 기억들은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재현으로 소환된다.
전쟁은 약자에게 더 잔인했다. 딘 껌은 수어로 “한국군은 돈이 많았고 어린 여자를 샀다. 그러다 임신한 여자를 내버려 두고 고국으로 갔다”고 말한다. 이윽고 군인들과 불,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 모자이크 그림들이 비춰진다. “미국의 용병이었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우리 가족을 죽인 그 사람들이 증오스러워. 우리 가족은 전부 여자랑 아이들뿐이었단 말이야.” 응우옌 티 탄의 목소리는 울분으로 차 있다. 때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은 노래가 된다. 티 탄의 노래는 상상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는 경험으로부터 연주된 엘레지(elegy)다.
영화는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다양한 감각을 동원한다. 헤어나올 수 없는 전쟁의 파편과 거대한 죽음이 압도하는 공간에서 포착된 모든 목소리와 몸짓, 이름과 무덤들은 그 자체로 이야기한다. 고정된 화면은 거리감을 유지하며 그저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적막하고 고요하지만, 각 장면은 서로를 뒷받침하며 기억을 바쁘게 복원한다. 학살 생존자와 학살 현장의 모든 존재는 곧 증거이자 증언이며, 폭력과 죽음을 일깨우는 기억의 언어가 된다.

《기억의 전쟁》 공식 스틸컷
상이한 기억들의 무심한 교차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 또 다른 추모의 장을 담아낸다. ‘한국의 월남전 전몰장병 합동 위령제’에 참전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참석했다. 추모와 함께 참전군인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펼쳐진다. 피해자의 목소리에서 가해자의 목소리로 초점이 이동하는 순간 이질감은 극대화된다. 이윽고 참전군인의 군모에 달린 태극기와 성조기가 클로즈업된다. 딘 껌이 손과 펜으로 반복적으로 그려왔던 그 국기들이다. 그러나 한국 군인의 모자에는 남베트남이 의도적으로 삭제돼 있다. 그것이 그 군인이 기억하고 있는 전쟁이다. 사이 좋게 붙어 있는 두 국기는 국가에 이바지한 자긍심의 표상일 테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의 공식적 기억은 냉전과 안보, 경제발전의 틀 안에 갇혀있었다. 감춰져 왔던 전쟁의 기억은 90년대 이후에 두 가지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오랫동안 잊혔던 참전군인들은 민주화 이후 피해 보상과 명예 회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99년 <한겨레21>이 주도한 캠페인과 시민사회의 진실규명운동으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공론화됐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참전군인들은 피해자의 기억을 부정하고 ‘자유수호 반공전쟁, 발전전쟁’이라는 공식적인 기억을 다시 공고히 하고자 했다.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전쟁의 기억은 다시 깊은 침묵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나라를 살리고, 고속도로와… 나라를 잘 살게 만들었는데, 지금에 와서 나쁜 놈이라 매도한다는 것은… 창피한 노릇이야. 대한민국 사람은 독일놈과 일본놈 같지 않아요.” 가해자라는 위치성을 철저히 거부하는 말이다. 이는 베트남전쟁을 정치적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전쟁으로 박제시키고, 성전(聖戰)의 중심에서 애국을 실천한 주체로 스스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그 욕망은 파병을 정당화하고 전쟁범죄를 은폐한 국가의 논리로부터 주조된 것이다.
베트남전쟁이 이야기된 지 20여 년, 한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없다. 피해와 가해는 없고 국가 ‘유공’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지배적이고 일방적인 기억은 나아가 ‘기념’되기에 이르렀다. 영화가 비추는 또 다른 장소는 강원도의 ‘월남참전 용사 만남의 장’이다. 그곳은 베트남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그 집들 사이로 총을 겨누고 있는 한국군의 모습을 전시한다. ‘파병용사’의 모습을 기념하고자 하는 그 공간에는 전쟁의 폭력성, 실존하는 피해에 대한 몰이해와 제도화된 침묵이 난무한다.
다음으로 카메라는 전쟁이 기념되고 있는 또 다른 장소로 우리를 이끈다. 베트남 호치민의 전쟁증적박물관이다. 이곳에는 ‘휼륭한 관광지’라는 인증 마크들이 무심하게 붙어있다. 폭력의 기억인지 잠깐의 소비인지 모를 다크투어리즘의 조각들이다. 카메라는 전시된 전쟁의 사진을 촬영하는 방문객들을 앵글에 담는다. 전쟁의 기억을 마주하는 관광객들의 옷차림과 샌들이 보인다. 장면이 하미 마을 학살 위령제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마찰의 힘은 견딜 수 없이 커진다. 영화는 별도의 설명 없이 오로지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맥락을 형성한다. 그 흐름 속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응축된 시공간이 교차하며, 충돌하는 기억 간의 온도차가 행간을 통해 부각된다.
‘다시 쓰기’의 윤리
한국으로 온 응우옌 티 탄은 몇 번씩이고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한다. 단 하루도 그날을 잊은 적 없는 사람, 자신의 삶이 가족들의 제사를 챙기기 위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입을 연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것들을 계속해서 다시 꺼낸다. 티 탄은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들이 (학살의) 진실을 인정하게 하고 싶어서” 기억의 투쟁을 지속한다. 그가 과거를 반복적으로 불러와 호소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 증명되는 기억을 공식적인 사실이라는 위치까지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증언해야 기억의 전쟁은 끝날 수 있을까. 끝없는 갈등의 골에 갇혀버리는 대신, 카메라는 조용히 여러 얼굴들을 보여준다. 베트남 사람들, 한국의 참전군인들, 티 탄의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그 이외에 많은 이들의 얼굴을. 끝으로 영화는 2018년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의 장면들을 전한다. 시민법정에서 재판부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선고했다. 세계사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한국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삭제됐던 기억들을 복원해 잘못 봉합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한 것이다.

가족이 있는 곳을 찾아 온 응우옌 티 탄 ⓒ영화 《기억의 전쟁》 공식 스틸컷
기억의 전쟁은 회피의 방식으로는 종결될 수 없다. 오히려 이 기억들은 멈추지 않고 공고한 침묵을 깨뜨릴 것이다. 기억은 과거의 것일 뿐 아니라 미래를 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하면서 동시에 현재를 또 다른 미래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그 주체로 지목되는 것은 국가, 그리고 진실을 대면한 당신이다. 당신들이 모인 우리는 영화를 경유해 베트남의 기억을 맞닥뜨리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가늠하게 됐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기억의 전쟁은 견고한 시공간의 차이를 견디며 아픈 기억에 대해 말한다. 그 기억은 무결해 보이는 역사의 틈을 파고들고, 새로운 시간의 호흡에 틈입하며 지난하게 균열을 낼 것이다. 그 기억은 지치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분명 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