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번역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영상번역 업계의 민낯을 마주하다

 좋은 번역은 무엇일까. 올해 초 방영된 <JTBC> 드라마 《런온》의 주인공 미주는 영화번역가다. 좋은 번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영화배급사 대표의 질문에 미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최대한 기억에 안 남는 것? 안 거슬리고 스치듯 사라지는 것.’


 번역 텍스트는 주목받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 그런데 번역 텍스트와 번역가에 대한 대중들의 이목이 심심찮게 집중되는 분야가 있다. 영상번역계다. 영상번역은 전통적으로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의 자막과 더빙을 가리켰지만, 다양한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영상번역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 최근에는 OTT(Over-the-top) 서비스의 폭발적인 성장세에 힘입어 각종 해외 드라마와 영화의 자막번역이 영상번역의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OTT 서비스 어플리케이션 ⓒ신동준

  누구나 미드(미국 드라마) 하나쯤은 정주행해 본 경험이 있는 오늘날, 양질의 자막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오역이나 자막 내 혐오 표현 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영상번역 자막을 둘러싼 논란과 그 이면에 놓인 영상번역 업계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봤다.

엔드게임부터 넷플릭스까지, 영상번역의 현주소

  영상번역의 질을 두고 가장 먼저 제기되는 논란은 오역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3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9)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We’re in the endgame now)’라는 대사가 ‘이젠 가망이 없어’라고 번역됐고, 이는 SNS를 통해 회자되며 영상번역계 오역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상영관뿐만 아니라 OTT 서비스에서도 오역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드라마 《브루클린 나인-나인》(2013~)에서는 ‘Two Daughters Diner’가 ‘딸딸이 식당’이라고 번역됐다.

  오역이라는 비판은 영상번역과 번역가를 비난하는 데 무분별하게 동원되기도 한다. 번역가는 비문처럼 명백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최적의 번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잘못된 번역’이라는 질타를 받기 쉽다. 경남대 통번역센터장 박윤철 교수(영어교육과)는 “전문가들은 번역을 잘 된 번역과 잘못된 번역, 어색한 번역으로 구분하는데, 따지자면 오역은 ‘잘못된 번역’에 해당한다”며 “어색한 번역까지 무조건 오역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오역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자막번역 특유의 ‘16자 규칙’과도 관련이 있다. 자막이 떴다 사라지는 데 보통 2초에서 4초가 걸리는데, 16자 정도여야 시간 안에 읽기에 무리가 없다는 이유에서 통용되는 규칙이다. 장면의 내용이나 배우의 대사를 짧은 시간 동안 충분히 전달하려면 번역가는 내용을 생략하거나 응축된 형태로 축소번역 해야 한다. 박윤철 교수는 “시간적 제약과 글자 수 제한이 어색한 번역이나 오역에 영향을 주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글자 수 제약 등 영상번역이 지닌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자막의 부족한 인권 감수성을 정당화하긴 어렵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에세이 『가능한 꿈의 공간들』에서 외화 번역의 성차별 사례로 남녀 캐릭터 간 존·하대 문제를 지적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국내에서 개봉했을 당시, 여자 주인공 샐리는 자막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 주인공 해리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으로 번역됐다. 이후 텔레비전 더빙이나 DVD 자막 등에서는 해당 문제가 교정됐지만, 듀나는 성차별적 자막이 영화관에서 상영된 것 자체가 번역업계의 감수성 부족을 잘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남녀 캐릭터 간 존·하대 표현은 많이 개선됐다. 함혜숙 영상번역가는 “최근에는 이유 없이 아내만 남편한테 존댓말을 하게 번역하지 않고, 집사람이나 안사람, 마누라처럼 아내를 비하하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번역업계 내의 성평등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상번역 전문회사 누벨콘텐츠미디어 박나연 대표는 “영상번역은 문화콘텐츠를 다루는 일인 만큼 변화하는 트렌드에 민감해야 한다”며 “옛날 표현을 성찰 없이 막 넣어선 안 되고,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차별적 번역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2016)에서는 ‘You drive just like yourmother!’라는 대사가 ‘김여사 같이 이게 뭐야!’라고 번역됐다. 운전이 서툰 여성을 희화화하는 표현인 ‘김여사’는 여성이 남성보다 운전을 못 한다는 편견을 일반화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러브》(2016~2018)에서는 사치스러운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영어 신조어 ‘Baller’가 여성혐오 표현인 ‘된장녀’로 번역되기도 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번역도 많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원데이 앳 어 타임》(2018)에서는 ‘퀴어 여성(queer women)’이 ‘동성연애자 여성’으로 번역돼 논란이 됐다. 퀴어라는 용어가 동성애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을 아우른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아서다. 해당 대사를 번역한 번역가는 자신의 SNS를 통해 ‘퀴어 여성이라고 번역해서 보낸 게 중간에 수정됐다’며 넷플릭스 코리아 측에 원래의 번역대로 고쳐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원 데이 앳 어 타임’의 시즌 1, 2를 번역한 김현경 번역가의 문제제기 후,
현재 넷플릭스에서는 해당 번역이 수정된 상태다. ⓒ김현경 번역가 트위터 캡처

번역가를 착취하는 번역업계


  오역과 차별적 번역이 발생하는 원인으로는 번역가의 무지를 탓하기가 가장 쉽다. 번역가 개인의 언어적 지식이나 혐오 표현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해 번역상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영상번역 현장의 생각은 다르다. 인권 감수성이나 오역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영상번역계의 노동 환경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영상번역의 수주는 크게 두 방식으로 이뤄진다. 공중파·IPTV·OTT·영화제 등의 업체는 번역가와 직접 계약을 맺거나, 번역회사를 통해 번역을 의뢰한다. 번역회사는 업체와 번역가를 연결하는 중개인이며 번역의 감수 역시 담당한다. 박나연 대표는 “업체와 직접 계약을 맺는 번역가는 유명 번역가거나 업체와 연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많은 프리랜서 번역가는 번역회사를 통해 일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영상번역 업계의 계약 구조 ⓒ홍원준

  번역회사에 주어지는 번역 마감 기간은 평균적으로 드라마(60분) 1편당 4일, 영화(90~120분) 1편당 일주일 정도다. 이 기간 안에 번역가의 번역과 번역회사의 감수가 모두 마무리돼야 하기 때문에, 회사를 통해 일을 받는 번역가가 실제로 번역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은 훨씬 촉박하다. 함혜숙 번역가는 “업체에 따라 하루에 드라마 한 편, 나흘에 영화 한 편 정도로 마감 기한을 촉박하게 요구하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마감이 촉박한 만큼 번역의 질은 떨어진다. ‘속도가 실력’이라는 업계 내 불문율이 양질의 번역을 가로막는 셈이다.

  낮은 번역료 역시 번역가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에 일조한다. 함혜숙 번역가는 “방송국에서 책정하는 번역료가 20년이 넘도록 거의 인상되지 않았고, 번역료를 인하한 곳도 많다”고 지적했다. 번역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경우는 상황이 더 열악하다. 박윤철 교수는 “데뷔를 원하는 번역가 지망생은 돈 받지 말고 무료로 해준다는 생각으로 업체를 찾아가 의뢰를 받아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영상번역가 대부분은 지위가 불안정한 프리랜서다. 영상번역가에게는 근무 여건을 두고 업체와 적극적으로 협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박나연 대표는 “도무지 오르질 않는 번역료 때문에 번역가들이 수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라며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글이 나오는 법인데, 현실은 그럴 수 없다”고 비판했다.

더 나은 번역과 번역 노동환경을 위해


  오역 논란의 해결을 위해서는 표준화된 번역 기준이 세워져야 한다. 기준은 연구를 통해 마련할 수 있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지배적이다. 예컨대 전쟁영화나 사극 등 각 장르에 맞는 자막 특징을 연구한 자료가 마련돼야 더 좋은 번역을 위한 기준을 확보할 수 있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박윤철 교수는 “현재로서는 영상 자막번역 연구에 책정된 예산이 없고 정부기관의 주도 없이 관심에 의해서만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성차별적 표현이나 혐오 표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번역가 개인에게 혐오 표현 시정의 책임을 맡기기보다, 번역 업체 측에서 혐오 표현 등을 규제하는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함혜숙 번역가는 “번역가들도 젠더 이슈 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에 대응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번역가는 업체의 매뉴얼에 맞춰 번역을 진행한다”며 업체가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번역가의 노동에 대한 업체의 인식변화가 절실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번역가가 과잉 공급되는 가운데 업체들은 번역 납기 일정이나 보수에 불만을 표하는 번역가와 계속 계약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익명을 요구한 번역가 A씨는 “모 업체의 경우는 번역료의 절반을 떼가는 식이었는데, (번역료 산정) 기준도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 업계가 돌아가는지 몰라서 몇 번 하다가 그만뒀다”고 말했다.

  번역가가 생산해내는 자막의 질과 그들의 노동환경은 무관하지 않다. 번역가와 번역회사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시급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박나연 대표는 “의뢰 업체가 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번역회사 입장에서 우리와 계약한 번역가에게는 급여를 밀리지 않고 드리려다 보니 곤란할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박윤철 교수는 번역업계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표준화된 번역료 가이드라인이나 번역가에 대한 복지혜택 등을 정부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OTT 서비스의 등장과 성장세는 영상번역가 지망생이나 영상번역가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열어줬지만, 번역가에 대한 처우 개선까지 이끌어내진 못했다. 오역이나 관습에 젖은 혐오 표현, 스크린 너머 번역가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번역업계 안팎의 인식이 필요하다. 양질의 번역과 노동환경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더욱 건강하고 풍성한 영상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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